08-1

<흥해 매산리 매곡의 손봉조의 집. 작년에 찾아가 동학과 손봉조에 대해 물으니 주인은 이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해월의 포덕으로 입교한 도인들은 영덕(盈德)의 오명철(吳明哲), 유성운(劉聖運), 박춘서(朴春瑞), 상주(尙州)의 김문여(金文汝), 흥해(興海)의 박춘언(朴春彦), 예천(醴泉)의 황성백(黃聖白), 청도(淸道)의 김경화(金敬和), 울진(蔚珍)의 김욱생(金旭生) 등 수십 명에 이르러 ‘검등골포덕’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해월의 포덕이 많이 이루어진 것은 제지소를 다니며 닦아놓았던 인맥도 있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한 몫 했다.


중국은 아편전쟁(1840)에서 영국에 패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연이어 서구 열강들이 중국으로 진출하여 전통 질서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이어 태평천국운동(1851~64)이 일어나 난징을 점령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청은 서양 열강에 도움을 요청해 근근이 이를 평정해 나가고 있었다. 태평천국운동의 와중에서 애로우호 사건(1856~60)이 발생해 영국・프랑스・독일의 연합군이 청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천하의 중심이라는 베이징이 서양 오랑캐, 즉 양이(洋夷)에 의해 무너져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국내에서는 1862년이 민란의 해라고 할 정도로 전국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잇달았다. 세도정치의 난맥상에서 벌어진 삼정(三政)의 문란, 특히 환곡의 부정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은 극에 달했고 이는 농민 봉기로 분출되었다. 이해 벽두에 단성(丹城)에서 시작된 농민 봉기는 2월 들어 진주(晉州)로 번져갔다. 봉기는 4월에 이르러 익산(益山), 개령(開寧), 함평(咸平) 등지로 확산되었고 5월로 접어들자 충청도의 회덕(懷德), 공주(公州), 은진(恩津), 전라도의 여산(礪山), 부안(扶安), 금구(金溝), 장흥(長興), 순천(順天)을 거쳐 다시 충청도의 청주(淸州), 문의(文義), 회인(懷仁)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동학이 퍼져가고 있었던 경상도 지역인 단성(丹城), 성주(星州), 선산(善山), 상주(尙州), 거창(居昌), 울산(蔚山), 군위(軍威), 비안(比安), 인동(仁同) 등지에서도 이 해에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 중 일부는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옥문을 부수고 죄수를 석방하는 등의 격렬한 저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농민 봉기의 틈을 타 도적떼들도 들끓었다. 산중에는 말을 타고 총을 쏘는 화적(火賊)이 나타났고 해안가에는 배를 타고 다니며 재물을 빼앗는 수적(水賊)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초들은 살아갈 방책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동학은 한 겨울의 따스한 햇살처럼 다가왔다.


1862년 여름에 남원에서 돌아온 수운은 바로 용담으로 가지 않고 서면 도리 박대여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해월을 필두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금세 수운의 존재가 경주부에 알려지고 말았다. 수운이 도리에 은거하고 있음을 파악한 경주의 윤선달은 친분이 있는 경주 영장에게 수운을 잡으면 제자들이 돈꾸러미를 들고 와서 풀어달라고 할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여기에 혹한 경주 영장은 9월 29일 관졸들을 이끌고 도리를 급습해 수운을 체포해 갔다. 수운은 억울해했지만 관에서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수운이 경주부에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해월은 각지의 도인들을 경주부로 모이게 하고 수운의 체포 이유를 따지며 항의하였다. 특히 도인들이 윤선달이 경주 영장을 꼬드긴 사실을 알고 윤선달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거칠게 항의하였다. 5~6백 명의 도인들이 모여 연일 시위에 나서자 경주부에서는 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10월 5일 수운을 풀어주었다. 경주 영장이 윤선달의 잘못을 대신 사죄하고 수운을 풀어주자 동학도인들이 철수하였다.


08-2

<19세기에 발생한 농민 봉기 지역. 홍경래의 난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일단 용담으로 돌아온 수운은 해월에게 자신이 지낼 만한 곳을 알아보라고 부탁을 하였다. 경주부에서의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수운은 제자들에게 동학을 하지 말라는 통문(通文)까지 보내야했다. 이런 탄압 속에서 경주는 안전하지 않아서 계속 있을 수 없었다. 가장 믿을만한 해월에게 자신이 기거할 곳을 알아보라고 했다. 해월은 검등골의 집으로 수운을 모시려 하였으나 수운은 “자네의 집이 좁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검등골은 깊은 산중이라 안전한 곳이었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불편하였고 해월의 집이 좁아 지내기에 마땅치 않았다.


해월은 수운이 기거할 곳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녔지만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처가가 있는 흥해 매산리 매곡의 손봉조(孫鳳祚)였다. 매곡은 해월이 결혼 이후 10년 동안 살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처가와는 막역해서 처가의 친척인 손봉조에게 부탁을 해 승낙을 받았다. 또한 이곳은 수운의 큰어머니, 그러니까 아버지 근암 공의 첫째 부인인 오천 정씨의 친정이기도 해서 수운도 들어본 곳이었다. 해월은 11월 9일 수운을 손봉조의 집으로 모시었다. 수운이 이곳에 오자 도인들도 매곡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매곡은 신광에서 서쪽으로 3㎞정도 떨어진 곳으로 교통이 편리하였다. 수운은 이곳에서 글과 글씨를 가르치는 훈도직을 맡아 아동들과 함께 소일하면서 지냈다.


잊혀진 매곡을 찾아 손봉조의 집을 찾은 이는 표영삼이었다. 표영삼은 매곡에 사는 손봉조의 방계 후손인 손석락(孫碩洛)을 통해 손봉조에 대해 확인하였다. 경주손씨대동보(慶州孫氏大同譜)에 따르면 손봉조는 손영흥(孫永興)의 세 아들 중 차남으로 1812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손봉조는 수운보다는 12살, 해월보다는 15살 위였다. 필자도 표영삼의 안내로 손봉조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 손봉조의 집 주소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매산길 50(구 흥해읍 매산리 636-54번지)이다.


손봉조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수운이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급하게 용담에서 와서 옷가지 등의 생필품은 챙기지 못하였다. 해월은 이러한 수운의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이불 한 채와 상・하의를 지어서 수운에게 바쳤다. 수운은 “빈한한 그대가 어찌 이렇게 애를 쓰는가?”하고 고마움을 표하면서 용담에 있는 가족의 어려움을 보살필 방도를 찾아보도록 부탁하였다. 해월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인들을 찾아 음식과 금전을 마련하여 수운의 편지를 갖고 용담으로 나섰다. 이렇게 해월은 수운이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제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수운은 매곡에서 포덕에 매진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해월의 도움이 컸다. 매곡에는 수많은 도인들이 찾아와 북적거렸다. 북쪽에서는 충청도의 보은에서, 서쪽에서는 고성에서 그리고 전라도의 남원에서도 도인들이 내왕하였다, 동학이 각지로 확산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수운은 교단의 조직을 만들고자 하였다. 수운은 경주부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후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접주제(接主制)였다. 수운은 1862년 12월 29일 섣달 그믐날에 최초로 접주를 임명하였다. 이때 임명된 접주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경주부서(慶州府西) 백사길(白士吉)・강원보(姜元甫), 영덕(盈德) 오명철(吳命哲), 영해(寧海) 박하선(朴夏善), 대구(大邱, 원문에는 大丘)・청도(淸道)・기내(畿內) 김주서(金周瑞), 청하(淸河) 이민순(李民淳), 영일(迎日) 김이서(金伊瑞), 안동(安東) 이무중(李武仲), 단양(丹陽) 민사엽(閔士葉), 영양(英陽) 황재민(黃在民), 영천(永川) 김선달(金先達), 신령(新寜) 하치욱(河致旭), 고성(固城) 성한서(成漢瑞), 울산(蔚山) 서군효(徐群孝), 경주부내(慶州府內) 이내겸(李乃謙), 장기(長機) 최중희(崔仲羲) <도원기서>  


이날 접주로 임명된 도인은 16명이었고 지역은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이었다. 당시 한 접은 대체로 40호(戶)를 단위로 해서 구성되었다. 16개 접이었으니 동학도인들은 약 650호, 1천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여기에 해월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해월은 이미 접주가 아닌 수운을 보좌해 교중을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주로 임명하지 않은 것 같다.



08-3

<<도원기서>의 접주 임명 부분.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접주와 백사길 강원보 등이 보인다.>



수운은 날이 풀린 3월 9일 용담으로 다시 돌아왔다. 교단의 체제가 정비되고 경편의 저술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수운은 굳은 결심을 하고 용담으로 돌아와 포덕에 나섰다. 관의 탄압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깨달은 무극대도를 전하고자 결심하였다. 5월 하순 들어 적극적인 교화활동을 하기 위해 ‘개접(開接)’을 열었다. 개접은 접별로 돌아가면서 용담을 찾아 직접 수운으로부터 동학의 교의에 대해 문답을 통해 논의하는 일종의 강도회(講道會)였다. 개접을 통해 용담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동학도에 대한 탄압 또한 본격화되었다. 이미 4월에 영덕에서 동학도들이 탄압받은 것을 시작으로 개접이 한창이던 7월 초에는 관의 탄압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수운은 7월 23일 개접을 파한다는 ‘파접(罷接)’의 통문을 돌렸다. 파접을 하는 7월 23일 용담에서 모인 도인들 앞에서 수운은 해월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였다. 


여기에서 북도중(北道中)은 경주 이북의 도중(道中)을 의미한다. 즉, 수운이 있는 경주를 기점으로 해서 경주의 이남은 수운이 직접 관장하고, 경주 이북의 교단의 모든 일을 해월에게 일임한 것이었다. 해월이 관장한 지역은 검등골과 흥해(북산중), 영일, 청하, 영덕, 영해, 평해, 울진, 진보, 안동, 영양, 단양, 신령, 예천 상주, 보은 등이었다. 그리고 수운은 해월에게 앞으로 자신을 찾기 전에 먼저 해월이 있는 검등골을 들렀다 오라고 하여 해월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수운이 해월에게 경주 이북을 맡긴 것은 해월이 포덕한 지역이어서 해월이 관장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에게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을 때 교단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후계자가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


추석을 이틀 앞둔 8월 13일 해월은 용담으로 향했다. 양친이 돌아가서 적막한 추석 명절이 찾아오자 해월은 스승과 같이 지내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새벽에 길을 떠나 70리나 되는 길을 달려 정오가 지나서 용담에 도착하였다. 뜻밖에 해월에 찾아오자 수운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수운은 “추석이 멀지 않았는데 어찌 왔는가?” 물으니 해월은 “선생님께서 홀로 추석을 보내는 것 같아 같이 명절을 쇠려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해월은 용담에서 한가위를 준비하며 수운과 도중의 일을 의논하며 하루를 보냈다. 몇몇 도인들도 해월과 같은 마음으로 용담을 찾아왔다. 모두 수운과 함께 추석을 보내려고 찾아왔다. 해월은 다음날인 8월 14일 자신에게 다가올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명절 준비에 전념하였다. 그렇게 8월 14일이 저물어갔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