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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애 울산환경교육연구소 대표 ⓒ이종호 기자>



사회과학 써클과 학내 민주화추진위원회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80년대 울산대 학생운동부터 이야기해 달라.


오영애 대표(이하 ‘오’)=울산대 83학번인데 동기 김종훈 씨가 클래스메이트였다. 웃긴 게 서로 교실에서 얼굴 본 적이 없다. 둘 다 국문학과 같은 반이었는데... 그 당시는 거의 매일 모임이 있어서 수업을 못 들어가고 선생님, 반 친구 얼굴도 모르고...


83년도에는 입학하자마자 리버럴한 성격이라 밖에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 성남동 일대 시가지 꽃다방이나 예나르에서 죽치고... 지금 현대자동차에 있는 김봉윤 씨가 디제이를 했다.


83년 2학기쯤에 그림 전시회를 쫓아다니다 울산에서 활동하던 이윤정 화가 전시회 갔다가 울산대 학생 한둘을 만난다. 그 친구에게 학습모임을 소개 받았다. 사회과학 독서모임인데 치열하고 재밌더라. 공대 81학번 이운재, 국문학과 81학번 강미화가 선배였는데 그 사람들 만나 모임을 시작했다.


학내에서 모임하면서 자연스럽게 5.18 소식도 듣고 사회과학 써클이란 걸 알고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팀에서 경제학 책을 본 건 아니고 소개시켜주는 걸 들었는데 방학 때 여행을 가서 <경제학입문>을 탐독했다. 방에서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책을 읽으며 그 밤 이후로 소위 민주화투쟁에 헌신해야겠다 또 세상을 바꾸는 데 헌신하겠다 결심을 한 거 같다.


수업 제끼고 이 모임 저 모임 집회 열심히 따라다니고 84년 학내 민주화추진위원회 결성 직전 논의과정에서부터 같이 했다. 류기현 씨가 위원장이었다.


82학번 유무조가 있었고 노동섭, 이기호, 김창원, 나중에 정대연 씨와 결혼한 박희영 등 84 후배들은 내가 직접 스터디 그룹을 이끌었다. 엄주상도 84는 아니었지만 이 그룹에서 만났다. 신성봉 씨는 85학번인데 내가 학교 나온 뒤에 총학생회 부활운동하고 주도적 역할을 했다. 유무조는 바깥 형제교회 쪽이었고, 나는 전혀 그런 게 아니고 울산대에서 자생적으로 활동했다. 어느 날은 김연민 교수가 와서 과외를 했다. 두 번 정도 연구실에 갔는데 기억할란가는 모르겠다. 공부를 했는지, 덕담을 했는지...


그러다가 금종섭이라는 친구가 학내 그룹과 연결되면서 이 친구가 서울 쪽 정세나 기본적인 전국적 문건들, 소위 강철 그룹 문건부터 시작해서 여러 문건을 소개해줬다. 당시는 분위기가 살벌하고 긴박했는데 학교 주변에서 비합 모임을 하면서 정세 브리핑을 듣고 그랬다. 한 번은 자취방에서 공부하다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니까 한 친구가 조그만 들창으로 튀어나가고 우리도 같이 도망간다고 그러고...


학내 민추위 투쟁하고 스터디하고 교내 집회하면서 지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아직 리버럴하고 기질 자체가 낭만적 기질도 있고 이때 별명이 빨간 스타킹이었다. 집회 때 당시 키메라가 유행했는데 키메라 분장도 하고 그런 몰골로 시위에 참여하고 그랬다.


이전 티...태화방직, 태광산업, 선경합섬


85년 2학기에 이전 티(팀)가 구성이 된다. 그 전에는 낭만적인 활동이었으나 그때부터 삶의 결단, 이때부터는 조직적인 결단을 해야 했다. 이 시기에 내면적으로 힘들었다. 여상을 나와 취업해서 장녀인데 집안 반대 무릅쓰고 1년 만에 대학을 갔는데 이전 티가 구성되면서 공장으로 가는 도식이 만들어져 갈등이 되더라. 그런 이야기를 어디 할 분위기가 아니고, 이 시기가 어찌 보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했었어야 했는데 현장으로 갔다. 이전 티에 최학도라는 분이 합류하고, 나름 개인적으로 힘들었지만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지고 86년이 되면서 4학년 돼서 바로 공장으로 들어갔다.


모화에 있는 태화방직으로 갔다. 집에서는 외동딸이었으니 주는 밥 먹고 그렇게 빨간 스타킹 신고 다니다가 태화방직 앞 자취방에 누가 살림해주고 돈 대주는 것도 아니고 김치 없이 밥솥에 하얀 쌀밥에 케첩 뿌려서 먹고... 태화방직에서 일하면서 사람도 사귀고 해야 하는데 현장에 적응하는 거 자체가 눈물 없이는 할 수 없는 힘든 일이었다. 완전 바보 멍청이였다. 나날이 나 때문에 라인이 섰다. 내가 재봉질을 못하니까 원단이랑 밑에 리어카랑 빨리 해서 올려 보내야 하는데 나만 하면 라인이 서니까 반장한테 욕을 먹고 눈물 없이는 하루를 못 보냈다. 멀건 콩나물국에 밥 몇 술 떠먹고, 집에서는 케첩에 밥 비벼 먹고... 노동자 되기, 말 그대로 노동자의 삶이 죽기보다 힘들어서 징징거리기도 많이 했다. 일을 그따위로 하니 왕따 아니면 쫓겨나서 현장에서 버틸 수가 있었겠나? 얼마 안 있다가 못 있어서 나왔다.


두 번째로 태광산업에 갔다. 거기는 더했다. 보통 여자들은 방직을 많이 가는데 야음동 시골에 생판 모르는 데 자취방을 잡고, 무섭기도 무섭고, 다른 사람과 교류도 못 하고, 외롭고, 현장 적응도 못 하고... 3킬로그램 실타래를 잡아 올려 실어야 하는데, 3교대인데 노동이 너무 힘들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지금보다 몸도 약했으니까. 애를 낳고 나서도 생리통 때문에 땅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많이 아팠는데 그때 생리휴가가 가당키나 하나. 실타래 올릴 때 너무 힘들어서 조금 쉬겠다고 해도 안 된다고 그러고. 그때 그냥 실타래를 들고 어디로 숨어서 방 한 켠에서 엉엉 울었다. 태광에서도 얼마 못 있다 나왔다.


3차로 이전을 하는데 그 기간이 엄청난 고통이었다. 우정동 선경합섬에 갔다. 주변에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이전 티에 있던 사람, 이름 기억도 안 나는데 유곡동 선경합섬 근처에 방을 잡아 현장에 있던 사람 몇을 숙소 배정을 했는데 김명숙 씨하고 몇 사람이 거기서 지냈다. 3교대를 하니까 교대가 다르다 각자. 원래 교대근무가 다르면 같은 방에 있기 어렵다. 내가 퇴근해서 오면 다른 사람은 갈 시간이고 방 하나에 한쪽에서는 토론하고 한쪽에서는 출근 준비하고.


나는 예민하고 울산에서 갈 수 있는 방직 공장이라는 방직공장은 다 가고 몸은 힘들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 때문에 결단을 했는데 동지라는 사람도 없고 선배라 할 사람도 없고 굉장히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에, 집은 가출한 상태였다. 그때 류기현 씨가 현장에서 많은 위로가 됐었다.


우진 노조 결성, 초대 사무장, 해고


그러고 선경을 나왔는데 박형규 목사님 아들인 박종관 선배를 만났다. 그 분이 내 운동을 이후에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됐다. 굉장히 부드러운 성품에 냉랭한 조직생활 속에서도 꼼꼼하게 인간적으로 소위 운동과 휴머니즘의 균형 속에서 굉장히 많이 챙겨주고 그랬다.


그 다음에 간 게 효문에 있는 자동차 밴드 주식회사 우진이다. 방직공장에서 울며불며 헤매다 그때 혼자 들어갔는데 남녀 같이 자동차 물 나오는 스크류 박는 일을 했다. 실타래보다 가벼워서 그런지 우진에서는 정말 제대로 활동을 했다. 우진에 다니면서 노동운동가로 사람들 만나서 고민 듣고 이야기 풀어내고 라인 세우고 현장에서 발언도 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초대 사무장을 했다. 그 즈음에 류기현 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효문에 있는 삼주기계에 다녔다. 시댁에 현대자동차 임원들이 많았는데 현장까지 찾아오고 그랬다.


이 시기에 운동가로 안정이 된 셈이다. 그 이전에는 이리저리 그런 고민의 시간이었고. 우진 초대 노조 사무장하면서 해고되고,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하고, 해고자 복직 활동했다. 양동주, 김환 등 해고된 사람들하고 같이 효문에 식당을 차렸다.


우진 사무실 직원들하고도 친했는데 해고자 활동하면서 구사대로 변하니까 어제까지 농담 따먹기하던 사람들이 물대포 쏴대고 하니까 그런 게 되게 힘들었다. 복직투쟁 1차 승소하고 2차는 포기했다. 예전 이전 티 관계가 끊어졌고 내면적으로 혼란이 있었다. 88년 4월 총선에서는 방어진에서 김진국 선대본에 아예 운동원으로 들어가 살다시피 하고 여러 현장 지원 활동을 한다.


출산, 육아 공백 뒤에 들어간 환경연


90년에 첫 애를 낳았다. 내면적으로 몇 번의 고비가 있었는데 88,89년 동구 사회주의 몰락이 사실 제일 힘들었고 금이 간 거다. 선배도, 후배도, 동지라 할 사람도 없고, 그런 내면적 고민을 나누고 이럴 사람이 없었던 거 같다. 그래서 이게 개인으로서는 내면의 혼란이 임신, 출산, 그런 결과로 나타난 거다.


90년대에 애를 낳고서 남편은 비합 모임으로 가서 생계를 안 하고 출산 이후로 나는 그때부터는 활동에 연결이 끊어져 상당히 힘든 시기였다. 애를 키우면서 육아도 생계도 힘들고 그러고 주변에 모든 관계도, 운동도, 학교도 끊어져 되게 힘들어지고... 그러다 98년에야 환경연으로 들어간다. 공백이 길었다. 그 기간 동안이 돌아보면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환경연 이전에 학생운동 때 이와이씨를 통해 온산병 조사활동 나간 경험이 있었다. 허달호 씨가 삼주에 다니면서 남편이랑 인연이 있었는데 울산환경연에 사무국장으로 있던 허달호 씨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98년 9월에 들어갔다. 시민단체나 그런 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뭐하는 덴지도 잘 몰랐다.


환경연 활동이라는 게 크게 사업 파트가 있고 말하자면 공모사업들이 한편에 있고, 하나는 소위 말하는 환경운동 파트가 나눠져 운동 파트는 국장이, 사업은 간사나 들어간 이들이 많이 했다. 당시 윤석 씨는 박세진 씨랑 생명의숲을 준비하고 있었고, 쓰시협(쓰레기문제해결을위한시민협의회)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그 안에서 내부적으로 보니까 그 전에는 공추련이었다가 95년에 환경연으로 재창립을 해서 98년까지 이르렀는데 한기양 목사 등 창립 멤버들이 내분이 일어나서 조규식, 김화정, 정영희 등 활동가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는데 한 목사와 갈등으로 일괄사퇴해 허달호 씨만 남고 한 목사도 물러난 상태였다.


그때 사무실은 경매로 넘어가 있고 회비를 내는 회원은 얼마 안 돼 백여 명이었다. 등록회원들은 많았지만 재정은 더더욱 형편없었다. 98년 9월 21일 입사를 했는데 사무실은 경매 넘어가서 재정은 빚밖에 없고 여기서 빚 달라 저기서 빚 달라 난리도 아니었다. 인수인계는커녕, 3개월 만에 뭐하는지도 모르고 갔다가 이렇게 됐는데 고민을 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가까운 사람이 없으니 흉흉한 이야기는 도는데 사실 몰랐고 충언을 해줄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인데 내 몰라라 할 수 없고 유석환 교수가 계셨는데 사무처장을 맡으시겠다고 해서 환경연 한 번 해봅시다 그렇게 됐다.


반핵운동, 교사연수...디딤돌


그 때 반핵운동이 시작됐다. 신고리 부지 선정 관련해서 주민들 반핵 투쟁이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환경연에서 할 일을 찾은 거다. 유 교수도 정말 열심히 했다. 주민들하고 명동성당에 처음으로 반핵투쟁을 하러 갔다. 정몽준도 왔더라 그때. 정몽준 의원 사무국이 반핵운동에 조금 뛰었는데 이유는 다른 데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일도 있었다. 반핵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러고 같이 한 게 산업단지 폐기물 문제였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환경연이 빚 경매 넘어간 거 이런 거 해결하는 명분이 생기고 뭘 할 건가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됐다.


그러다가 환경연이 교사연수 때문에 급격하게 성장한다. 울산대보다 환경연이 교사연수를 먼저 했는데 수익자부담으로 했다. 많게는 두 반에 80명씩 하면서 말 그대로 회원이 급증했다. 실무도 굉장히 많이 해야 하고 교사연수를 3년차까지 하면서 굉장히 성장의 계기가 됐다.


2004년에 시청 쪽에 있던 사무실을 빼고 북구 송정으로 갔다. 북구 이상범 청장 시절이라 전국적으로 폐교 활용에 관한 여러 사업이 있을 때였는데 당시 유석환 교수 그만두고 새 사무처장으로 온 서토덕 씨가 청장을 찾아갔다. 사무실 문제는 늘 고민이었고, 경매는 어째어째 해결하고, 빚도 후원회로 갹출해서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다른 단체는 사무실도 후원자도 많은데 환경연만 후원자도 사무실도 인적 자원도 처음부터 바닥이었다. 단체 하면 경실련에 집중돼 있고 환경연은 방계 비슷할 땐데 경매도 그렇고 뛰어 봐도 한계가 있고 사무실 구하기도 힘들고 해서 폐교 활용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장을 찾아가 환경교육 폐교 활용으로 기획서를 냈다. 교사연수로 어느 정도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송정 폐교로 가면서 서토덕, 나와 활동가 다섯 명 수준으로 올라섰다.


그린피스 장생포 고래대사관


서 처장이 조직운영을 굉장히 잘했고 나는 실무로 단련됐다. 2005년 울산에서 국제포경위원회 열리는 기점으로 고래보호운동을 시작했다. 전국적으로도 울산이 처음이었다. 전국 환경연 최예용 씨가 2004년쯤에 이만한 보따리를 들고 왔는데 그때 처음 보고 우리는 공단 문제도 급하고 일도 많은데 서울에서 온 최 씨가 설득도 하고 모임도 여러 차례 하면서 고래보호운동을 하게 됐다.


환경연 총회에서 고래보호위원회 발족을 결의하고 고래사랑회 정일근 씨 등과 바깥 조직을 해놓고 전국에서는 바다위원회로 네트워크를 띄웠다. 바다위원회는 국제적으로 연계가 됐고, 이렇게 안팎을 세팅을 다 해놓고 2005년 장생포에 그린피스가 오면서 내가 울산 총괄만 아니라 거의 전국 총괄하면서 고래대사관 그린피스와 한 달 간 합숙하면서 같이 활동했다. 그 친구들 일하는 거 보면서 굉장히 많이 배웠다. 영어가 미숙하니까 나한테 단독 통역을 붙여줬다. 장생포 주민들, 항만수산과 분들, 고래보호운동하면서 접촉했던 사람들이 민관 거버넌스의 기초였다고 본다.


그린피스는 조그마한 일을 하더라도 활동의 기본을 만들어서 활동하더라. 그린피스 선박 공개, 투어 활동, 전국 집회 등도 많이 했고 국제활동도 굉장히 활발했다. 울산이 고래도시 선포한 게 한참 이후인데 고래가 세계적인 이슈로 확 올라간 거다. 2008년까지도 이어갔다. 폐기물 해양투기 반대 운동도 울산환경연의 큰 이슈이자 국제적으로 알린 계기가 됐다.


환경교육센터, 생태산단, 도시농업


환경운동도 전문화가 돼야하고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천안 광덕산에 환경교육센터가 생기고 환경교육 전문 활동가 양성 등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에 울산도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울산환경교육연구소를 만들었다. 환경교육진흥법이 2005년 만들어지면서 우리도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자고 김수환 씨와 같이 작업하면서 선도적으로 만들어냈다. 울산시 의제21과 같이 논의하면서 만들었다.


생태산단 개념도 울산환경연이 처음 들여왔다. 박흥석 교수는 원래 청정생산을 주장했는데 생태산단 토론회를 하면서 개념을 바꿨다. 민관산학 거버넌스로 가는 게 낫다고 해서 학계위원회 박흥석 교수, 시민위원회 나, 윤석 등이 실무로 생태산단시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산자부 가서 생태산업단지 논리 홍보하고 지금은 울산시의 큰 성과로 됐다. 전국적으로도 청주하고 몇 군데가 생태산단 거버넌스가 됐다.


태화강 생태도시 선언할 때 누치 폐사로 굉장히 이슈가 됐는데 생태하천 문제를 제기한 것도 환경연이 먼저였고, 수영대회 제일 먼저 한 것도 환경연이었다. 살아 숨쉬는 강을 만들자는 이벤트를 서토덕 처장이 2003~2005년에 했다.


태화강 관련 활동도 소위 송정 시절에 환경연이 가장 많이 했고, 활동가도 많고 국제적인 운동도 많았던 그런 시기였다. 생태산단, 고래보호, 경주방폐장 문제, 태화강 살리기 운동, 환경교육까지. 송정에 있을 때 처음 한 거 많다. 도시농업 사회적 일자리로 2000만원 예산 가져와서 환경연에서 제일 먼저 했다. 쿠바 도시농업 개념도 처음 쓰고 북구 300평 얻어서 열명 스무명 몰려들었다. 일 양은 엄청났지만 그때는 굉장히 즐겁고 재미있었다.


연안오염 총량관리 민관 거버넌스


부산에서 출퇴근하던 서토덕 처장이 물러나고 사람이 없다보니 내가 운영관리까지 맡게 됐다. 이사를 나오면서 다시 사무실도 얻어야 하는데 여전히 돈은 없는 거야. 의장단들도 회비 2~3만원 내고, 소액다수 원칙을 철저히 지켜서 겨우 옥교동에 사무실 얻어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환경연을 정리하고 환경교육연구소에 전념할 생각이었는데 이때 후쿠시마 사고가 터졌다. 2011년이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울산에서 제일 먼저 기자회견을 했다. 2기 반핵운동은 정말 어려웠다. 지금은 전문가도 많고 책도 많지만 그때는 반핵 책 한 권도 없었다. 대덕에서 방사선 연구자들을 찾아 핵의 원리 등에 대해 개인적으로 얼마나 독학을 했는지 모른다. 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서울대 물리학과 최무영 교수에게 울산에 와서 개념을 잡아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최 교수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으로 해라 그래서 교수님이 온다고 하면 몇 명을 조직해놓겠다 그런 약속까지 해서 모셨다. 그때 김익중 교수도 오고 다른 교수들도 오고 그랬다. 최 교수와 약속 지킨다고 출석부 가지고 엄청 활동가들 닦달해서 인원을 채웠다.


2,3년 열심히 해서 탈핵 활동가들 많이 생기고 16년째 되던 해에 환경연을 나왔습니다. 나는 협력 거버넌스형 활동이 잘 맞는다. 생태산단이나 고래도 그렇고 연안오염 총량관리제 도입하는 민관 거버넌스에 주력하고 있다. 울산에 민관산학협의회가 국가훈령으로 조직돼 있는데 그 기구에 민간 부위원장으로 참여하고 있다. 연안오염 총량관리제가 적용되는 곳이 시화, 부산, 인천, 마산 등인데 이 전국기구 네트워크에 해양수산부와 같이 참여하고 있다. 올해부터 시행되는데 4~5년간 테이블에서 여러 논의를 했었는데 연안오염 총량관리가 제대도 되도록 참여하는 일이 올해 주력할 일이다.


엄청 설레는 일, 소설 쓰기


이=소설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대입 원서 낼 때 영문과를 냈는데 고등학교 담임이었던 시인 김성춘 선생님이 보고 원서를 찢더니 너는 국문과를 가라고 해서 국문과를 갔다. 그런데 가자마자 친구 얼굴을 모를 만큼 바깥에서 활동했으니까 내가 국문과라는 것도 잊고 살고 소설이나 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오영수문학관에서 문학 수업을 개강한다고 해서 처음에 시 반에 들어갔다. 다음에 소설반 수업에 들어갔는데 첫 수업 때 거기서 아 정말 이게 삶이 인생에 몇 번 전기에 감전된다고 하던데 아, 나는 소설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 인생에 중요한 분을 꼽자면 소설반 선생님인 엄창석 소설가를 꼽을 만큼 이 분이 한 사람 한 사람 맞춤식 강의를 하고 견인을 하는데 평가도 엄혹하지만 강의를 잘 하신다. 3월말부터 반에 들어가 7월말에 소설을 내겠다고 하고 그때부터 평생 못 읽은 소설을 150권을 한참에 읽고 7월에 하나 발표를 했다. 그 전에는 쪽글을 냈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성명서 낸 가락이 있으니까. 소설을 하나 냈는데 선생님이 따로 몰래 극찬을 해줘서 굉장히 격려를 많이 받았다. 이 사람이 엄청 평가가 냉정한 사람인데 심지어 어떤 사람이 글을 좀 썼다고 하면 면전에서 바로 깨는 사람이다, 그런데 계속 써라, 한 편 더 써라 해서 세 번째까지 썼고 합평을 했다. 첫해에는 신춘 공모는 안 내봤고 그 다음에는 한 해 결산하는 의미로 냈는데 등단은 못 했다.


소설을 쓰면서 아 비로소 내가 국문과였구나 하는 기억이 났고 지금은 정말 마음의 조바심이 나는 게, 아 내가 너무 늦게 시작했구나, 아 조금만 빨랐으면 좋겠는데, 선생님도 그러고. 세월이 얼마나 아까운데 등단 이럴 때가 아니구나, 하다못해 동네문집이라도 소설을 발표해야 하는 거 아닌가, 소설가로 등단이 별거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활동하고 살아가는 거지 등단하는 제도에 목을 맬 일은 아니구나, 나이가 있으니까. 올해 오영수문학관 심화반이 따로 꾸려지는데 강의는 없이 쓰고 발표하는 게 심화반인데 소설가로 정말 제대로 된, 쓰고 싶었던 글을 써보고 싶다. 소설은 인생에 내가 하고 싶고 어쩌면 잘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는 엄청 설레는 일이다. 정말 재밌을 것 같다. 그런 일을 이제야 발견한 거 같다.


대담=이종호 편집국장
정리=이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