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박종석

<박종석 씨에게 광주 5.18은 평생 가슴에 남은 응어리였다. 85년 울산대 첫 5.18 추념식을 벌이고, 86년 문교5원칙 철폐 싸움에 나선 것도, 87년 전교생 7000명 중 5000명이 참여해 보름 이상 싸웠던 7호관 투쟁을 이끈 것도 가슴 속 응어리로 남은 5.18의 불씨가 불꽃으로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종호 기자>



<1987> 차마 못 보고 돌아 나왔다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1980년대 울산 이야기를 들려 달라. 울산이 고향인가?


박종석(이하 ‘박’)=난 영화 <1987>을 못 보겠더라. 영화관 앞까지 갔는데 차마 못 보고 돌아 나왔다. 보고 울까봐...
광주가 고향이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80년 봄에 광주 31사단 방위로 군대에 들어갔다. 병력이 부족해서 예하부대 훈련만 하는 11경비대대에 운 없이 가서 고생했다. 일반 사병은 심하게 안 때렸는데 방위들은 완장 한 번 채워놓으니 아주 심한 사람은 삽자루 곡괭이 기합도 세고...


진압 작전에 투입된다. 31사단 내 병력이 작고 경비대대 병력이 군기가 세서 일개 소대 단위로 중요한 시설을 지키러 갔다. 변전소를 지키러 가고 무기고 예비군훈련소를 지키러 갔다. 그러면서 많이 봤다. 이고 지고 피난 가는 행렬 보면서 군인으로서 쪽팔렸다. 봐서는 안 되는 장면을 많이 봤다.


계엄군 도청 함락 때 공수가 1선, 우리가 2선에 섰다. 다음 사단 병력들은 한참 쳐져서 오고 군기가 셌다. 사단 지키는 초병으로 섰다. 운이 좋아서 난 빠졌지만 다른 이들은 다 도청으로 갔다. 같은 부대에서 사람을 두 명 죽였다고 하는 소리도 들었다. 변전소 앞에 가매장했다 발굴해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광주 80년 5월의 고통보다 이후에 더 힘들었던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경제와 모든 것들이 통제 봉쇄된 상태였다. 한 달 동안 봉쇄돼 경제공황으로 간 상황. 안감 상회랑 큰 식당을 했는데 두 곳이 폭삭 망했다. 몇 달 만에... 그 몇 달 동안 전남을 공황상태로 만들었으니 한 집 건너 한 집이 문을 닫았다.


신입생 환영회 뒷풀이 때 첫 연설
울산대 최초의 데모...5.18 추념식


83년에 현대중공업에 취직하러 울산에 왔다. 취직은 떨어지고 지나오다 보니 울산대에 시험봐 놓은 게 있어 미련을 못 버리고 조선공학과에 붙었다. 신나는 울산 생활이 시작됐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근근이 공부하고 2년을 그렇게 보냈다.


3학년 봄에 누가 나를 찾아왔다. 광주일고 선후배가 찾아와 내가 있는 걸 알고 몇 번 전에 왔는데 학교를 잘 빼먹어서 못 만났다고 하면서... 마침 그때 낮에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난 상황이었다. 되게 날 안 좋게 보던 전무가 나를 갈궜다. 사람을 이유 없이 그러니까 굉장히 고문이었고 힘들었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 욕을 먹으니까 인사하기도 전에 그랬으니 편견이나 잘못된 정보를 접한 건지 언제 한번 만나보면 묻고 싶다. 직장을 나와서 학교 연구소 조교를 했다. 처음 시간이 남았다. 그 전엔 어떤 모임이나 미팅도 못 갈 정도로 힘들었다. 광주 선후배가 신입생 환영회 갈 수 있냐 그래서 마침 시간 있어서 갔다.


라우회 호남향우회 신입생 환영회 가서 대학생활에 처음 모임이라는 데 참석했다. 1차 호프집에서 술 한 잔 하고 각자 인사하고 그러다 돈이 없어 무덤이 있는 야트막한 동산, 우리는 거길 막걸리동산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2차를 했다. 기수대로 빙 둘러서 앉는데 난 군대도 다녀왔고 3학년이라 고참 군번이었다. 처음에 조용하다 시끄러워지는데 내가 일어나서 그냥 나온 거다. “햇살이 비치는 봄날이 오면 우리 가슴 속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같은 아픔이 있다”고 연설하니 연설이 끝나고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연설 한 마디에 인생이 바뀌었다.


추모제를 하자고 그랬다. 85년이었다. 전국적인 상황이 약간씩은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지 다른 운동권은 어쨌는지 모르고 냅다 지른 것이었다. 도때기시장 같은 분위기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제안을 했으니까 난 가만히 있는 거고 선배들이 대책위를 하고, 우리는 추모제를 했는데 다른 학교는 많이 성공한 게 아니었다. 울산대에서는 이전에 데모가 없었다. 최초의 데모 사건이 5.18 추념식이었다.


총추위 민추위 두 군데 접촉이 들어와 공동회의를 하자고 해서 3분의 1씩 역할 분담을 했다. 그런데 두 추위는 잡혀갔는지 얼굴이 안 보이고 이후 듣고 보니 정말 잡혀갔다더라. 라우회만 남아 데모를 했다. 한 번도 안 해본 이들이 나가니 후배들은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제2공업탑 신복로터리까지 갔더니 건장한 사복경찰이 있더라. 전경도 없어 버스는 지나다니고.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뭐하나 쳐다보고. 신복로터리까지 20~30명 갔는데 사복경찰이 “아이 가지 말어” 하면서 막는데 밀리는 거지. 한 번 시위하고 끝났는데 어쨌든 울산대에서 최초로 시위를 했다.


문교 5원칙 철폐 투쟁


민추위 총추위 중복해서 일곱 명이 울산대 운동권이었다. 내가 83학번이었으니까 학번도 높고 그러면서 이들과 접촉이 됐다. 84~85년 해빙 분위기 이후 85년 2학기 땐가 총학생회가 부활돼 선거가 시작됐다. 운동권은 역량이 안 돼 총학생회를 장악 못하고 대대로 해온 학성고 친구들이 회장을 했다. 난 총학 사회부 차장을 했다.


그때 문교부장관이 문교 5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학생회비를 안 풀겠다고 해서 문교 5원칙 철폐 투쟁을 벌였다. 총학생회 집행부는 받아들이자고 했는데 난 안 된다 하고 갈등이 심했다. 대의원 회의에 번번이 좌절됐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일생 최대의 힘든 사건이었다. 서울대 빼고는 전국 대학 모두 다 받아들였다. 서울대는 알고 보니까 총학생회가 전부 다 구속됐고 대의원 다수가 구속돼서 그랬던 거다. 대의원 의장까지 구속되고 총학에 문화부장만 남았다고 하더라. 다른 대학들은 학생회비를 안 푸니 버티기 힘들었을 거다.


깡으로 버티고 혼자 대자보 붙이고 하던 싸움이었다. 운동권 친구들도 포기하고 하나둘 손을 놓았다. 유야무야 다음 해에 문교 5원칙을 받게 된다. 운동권은 민추위에 있던 류기현, 오영애, 유무조, 이기호, 노동섭, 총추위 김진석 이렇게 있었는데 그들과 논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단독비행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총학 집행부에 들어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 그랬다.


특이한 게 싸울 사람이 적어서 시기마다 라우회에서 대자보를 많이 붙이고 그랬다. 향우회 연합회도 많이 싸웠다. 라우회가 선도에 서고 주요 희생을 했다고 할 만큼 큰 힘이 됐다. 이후에도 그랬다.


울사협 간사, 온산 공해 싸움


울사협(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에서 나한테 간사를 하라고 했다. 학교 다니는 상황인데 박종희 선배가 그랬다. 종희 형, 김미화하고 내가 간사를 하고, 출범 후 바로는 아닌데 그 전에도 왕래가 잦았다. 내가 공해 쪽을 담당했다. 온산에 현지 출장을 많이 가고, 종희 형은 종교쪽 총괄, 미화는 무슨 역할이었더라... 나는 확실히 공해, 미화는 그냥 간사라고 불렀다. 무산이 형(백무산 시인)하고 같이 온산 댕기고 그랬다. 울산 자체 사회단체는 형제교회 달랑 하나, 울사협 하나 있고, 울대 안에 나 포함 여덟 명의 인자까지 다 합해도 한 그릇이나 될까. 버겁고 힘들었다. 내가 주로 온산 주민들 자주 접촉하고 다녔는데 비포장도로 버스 타고 전 마을 훑다시피 가가호호 아이, 형님 하면서 밥 얻어먹고, 서울서 사람들 오면 안내하고, 역학조사하고, 공해문제연구소 최열 선배 오면 같이 동행하고, 새로운 사람 소개받고 관계를 다져나갔다. 주민들이 생계문제로 싸울 때는 정말 무섭게 싸웠다. 하다못해 경찰서장도 우봉리에서 데모 막다 주민들한테 걸레쪼가리로 맞았나? 신나게 맞았다. 정말 치열했다.


그 싸움으로 공해문제, 환경문제가 현대사회에 큰 경각심을 줬다. 그 전에는 꽃 가꾸고 명찰 걸어주고 하는 자연보호 수준이었는데 적극적으로 공해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공해문제연구소에서 공추련(공해추방운동연합)으로 발전하고 나중에 환경운동연합으로 간다. 전국에서 환경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거쳐가고 관계를 맺고 급한 일 있으면 나한테 대신 일을 처리하거나 길 안내 같은 것도 하고. 그러다 경찰에 쫓기다 발목을 다쳐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울산대 첫 대중투쟁 7호관 싸움


87년에 울산에 돌아와 보니 워낙 작은 학교라 조금 유명해진 사람이 돼서 총학 사회부장을 해달라고 하더라. 했다. 또.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권 학생이 늘어나진 않았다. 맨날 그 학생... 그 애들이 끝이었다. 이기호, 노동섭이 제일 막내였는데 그 이후는 없었다.


학교에서 대운동장 중앙운동장 메인에 길쭉하게 7호관을 짓는다는 거다. 바로 계단 올라가는 5호관이랑 길이도 같고 높이 5층인 2차선 길이 있고 건물과 건물이 딱 붙어있지 않느냐, 왜 다른 데로 안 하고 거기다가 하냐고 하니까 재단에서 지어준다는데 뭐 땅 터파기 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서 짓겠다는 거다.


거기다가 110미터 건물을 짓는 게 어딨냐고, 하지 말라고 대자보를 붙였다. 7호관 반대 집회, 모이니까 20명이 모였다. 그 다음에 모였는데 학생과장님이 학생 수도 줄었드만 인자 고마해라 그래가 향우회장들도 소집했다. 건물 여기 짓는 건 심하다. 4일째에 20명 모였는데 저쪽에서 “흔들리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경영학과 과대표가 패거리를 데리고 합류했다. 이래 가꼬 되겠냐고 울분을 토하고 그러다가 4일째에 5000명이 모였다. 7000명 중에 5000명이 모였다. 운동장이 꽉 찼다. 보름 이상을 끌었다. 7호관 싸움에 총장님 물러나시라 너무 비민주적으로 하신다. 아침 10시부터 5시까지 집회 하는데 야간 학생들이 우리도 그러면 되겠냐 10시까지 끌어달라 그러더라. 끌었다. 연설하고 노래하고 기마전도 하고 5000명이 모여 공대는 웃통 벗어대고 줄다리기 하고. 줄다리기 한다고 하니 반질반질하던 총학생회장이 엄청 두꺼운 동아줄을 찾아왔다. 학성고 출신 알음알음 했는지 아무튼 찾아왔더라고. 세 판 하고 기진맥진해서 공대 먹고, 그 다음 목재소에 쌓아놓은 못 쓰는 자재로 캠프파이어 하고. 그렇게 보름 동안 했다.


스타로 떴다. 마이크를 잡으면 내가 목소리가 굉장히 크다. 지지치도 않고 목도 잘 안 쉰다.  세고 오래가는 목소리라 천상 내 적성인 거 같다. 경상도 말 안 쓰니까 좋아하대. 여학생들이 뭘 많이 사다주고...


그 싸움으로 6월 항쟁 전에 감옥으로 가고 7호관은 안 짓는 걸로 됐다. 다른 데로 가서 예쁘게 짓고 총장님은 물러났다. 87 신입생들이 그 싸움으로 많이 운동권이 됐다. 나도 후배가 공부 좀 해보고 싶다 하면 누구 연결시켜주고 그랬다. 아주 축제 같은 데모로 승리도 하고 하니까 87들이 좋은 친구들이 많이 들어왔다. 87들은 학생 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전투력이 엄청났다. 경상도에서 따라올 수 없는 전투력이었다. 백골단이 떠도 곧바로 뒤돌아서 쇠파이프 휘두르면 백골단이 처참하게 나자빠졌다. 그때 87 이후 친구들이 그랬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 연좌


6월 항쟁 때는 감옥에 있었고 집행유예로 나오니 노동자 대투쟁 터지기 직전이었다. 울사협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현장으로 정문 앞으로 나갔다. 차들이 없으니 시외버스를 타고 온산이나 경주로 가는데,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은 후배들이 갔고 나는 시외로 가는데 빨리 일어나 움직여야 하니 선배가 갔다. 현대중공업 갔던 후배들은 경비에게 전단지 다 뺏기고 터지고 깨져서 오더라, 한 기수 높은 후배더러 가라고 해도 다 터지고 왔다.


짜증이 나서 나와 정대연이 같이 현대중공업 정문에 갔는데 대연이가 정문쪽에서 유인물 돌리고 난 신호등 길 건너였는데 경비들이 전단지를 뺏을려고 하니 대연이가 악을 쓰고 버티고 나는 신을 게 없어 슬리퍼 신고 갔는데 차 사이로 후다다닥 뛰어 들어가서 날라가 부딪히면서 욕을 악을 썼다. 전라도 욕을 쓰고 거시기까지 합해 버리니까 질겁을 해 버리더라. 욕이 처음 듣고 길고 심하니까... 지나가는 버스, 오토바이도 다 보고 퇴근하는 사람들도 난리가 아니었다.


결국 경비들이 전단지를 못 뺐어갔다. 난 또 제자리로 가서 전단지 돌리는데 또 한 번 정문 앞이 바글바글해서 또 막 뒈뒈 갔드마는 경비가 전단지 뺏어가 안으로 도망가 버렸다. 유인물이 뺏기니 억울해서 본격적으로 싸웠다. 연좌하고 노래도 부르고. 경비들은 어떻게 할지 몰라서 벌벌 하더라. 두 번째 싸움에는 앞이 뭔가 깜깜해서 보니 키가 2미터가 넘는 경비가 막고 있었다. 이봉걸 스파링하던 경비인데 내가 넌 노동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손구락을 찔렀는데 그 친구 콧구멍 밑이었다. 바로 후회가 되대. 이 친구가 날 집어던지면 울산대학교까지 날라가겠다 싶었는데, 순진하고 착한 친구라 쪽팔리는지 제일 먼저 가버리더라. 그 경비는 이봉걸 스파링하면서 아마 씨름에서 1등 많이 했다.


현대중공업 정문에서 두 명이 노래 부르고 우리 주장하고 사람들 모아 연설하고 그러니까 경비대장이 미안하다고 찾아오더라. 돈 없는 학생들 푼돈 모아서 만든 유인물을 뺏어가는 건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억압한 거다 이러고 따졌다. 그랬더니 경비대장이 갖다 주고 싶어도 못 찾겠다, 전단지 뺏은 친구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경비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요구를 했다. 사람들 앞에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해라. 경비대장이 정문 앞에 모인 사람들한테 자초지종 이야기하며 약속했다.


권용목 위원장, 비단 같은 사람
“착한 문재인이라고 보면 된다”


현대중공업 정문에서 학생 두 명이 경비랑 붙은 게 전설처럼 현장에 퍼지고 며칠 후에 현대엔진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다. 밖에서 유인물 나르고 그랬다. 그러다 제3자 개입으로 연행돼 김진국, 권용목 씨랑 같이 구속됐다. 두 번째 구속이었다. 권용목 씨는 완전 비단 같은 사람이었다. 착한 문재인이라고 보면 된다. 문재인보다 착했는데 솔직히 연설을 나보다 더 잘했다. 나도 못한다는 얘긴 안 들었는데...


남부서 대용감방에서는 깡다구가 있어서 작아도 맞진 않았다. 처음 들어가면 의경들이 앉아 일어서 얼차려를 약간 주는데 다시 앉으라고 하면 시비를 붙는다. “장난치는 거냐, XX놈아.” 이러면 당황하는 것은 의경이고 흥미롭게 보는 것은 도둑이다. 이렇게 곧바로 붙기 시작하면 쟤는 건드리면 안 된다 이렇게 된다. 열 받으면 단식인데 1주일, 10일씩 했다. 제일 길게 한 게 18일이었다. 부산, 안동 교도소에서도 있었는데 기록이 넘어갔는지 건드리지는 않더라.


두 번 징역에 1년 6개월 살았다. 88년 즈음에 안동에서 출소했다. 안동교도소에서 88올림픽을 봤다. 나와서 학교는 중퇴하고 동구로 이사 갔다. 권용목 씨하고 잘 다녔다. 현해협(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이 집 바로 옆이었다.


128일 파업 때나 골리앗 파업 때는 전대협이라든지 연계해서 외부 지원 학생들이 내려오면 울대에 집결하고 어떻게 현장 돌리고 먹고 재울지 연결해주고 그랬다. 용목이 형이나 김진국 씨 밖에서 도망칠 때 현장 메신저 역할을 내가 했다. 지도부하고도 알고 군대 갔다 와서 자기들하고 친구 나이고 용목이 형이랑 한 살 차이고 현장 후배들도 많으니 후배 대신 내가 그런 역할을 노동판에서 했다.


권용목 씨는 나중에 서울에 있을 때 간혹 얼굴이나 보고, 일 끝나면 갈 데 없으면 나랑 같이 있고 그랬는데, 입이 무거워서 서울 일을 얘기 잘 안 했다. 권용목 씨는 정파도 없었는데 민주노총 중앙에서 자기들하고 같지 않다고 그랬는지, 미래권력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견제가 심했다. 울산에서는 동지냐 아니냐만 있지 동지 아닌 듯하면서 다른 동지는 있어 본 적이 없는데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가서 적응이 안 됐을 거다. 동지라면 누구도 의심 없이 같이 어깨 걸고 가던 시절이라 서울의 결이 너무나 달랐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분파 투쟁이 많다는 이야길 많이 들었지만 울산에서는 민중의당하고 울사협하고 결이 다르다고 해도 싸울 때도 의식 않고 술도 같이 먹고 회의도 같이 하고 그랬다. 울산 싸움은 큰 싸움이고 화염병 날아가는 숫자가 중요하지 내 말빨이 중요하지는 않았는데 어느 순간에 한참 뒤에 확 틀어져서 안타깝게 됐다.


민주시민회, 임지본, 울노협준비위


민족학교는 울사협 귀퉁이에 노동상담소와 함께 있었는데 사무실 한 켠에 간사들 책상이 있었다. 옥상에 옥탑방에 교실이 있었고, 다른 칸에는 노옥희 선생님 노동상담소가 있었다. 이후에는 전교조 사무실도 들어오고. 그 건물이 이철수 씨 건물이었다.


민주시민회로 바뀌고 어느 날 민주시민회에서 일일찻집을 한다고 했는데 찻집 주인이 며칠 안 남겨놓고 못 내주겠다고 했다. 티켓은 다 팔았는데... 딸랑딸랑 학생인 것처럼 찻집에 갔는데 이영희 간사가 걱정을 하더라.


중부서 정보과에 전화해서 “울산대 학생인데 정보과장님 좀 바꿔주세요.” 했다. “왜 찻집을 못하게 해요?” 따지니까 중부서 정보과장이 “누구야, 당신” 하길래 “사실에 대해 물어보는 거니 답해라. 당신들이 뭐하는 사람이야” 그랬다. 그러니까 “야 임마 이 XX 봐라” 이러면서 싸움이 붙었다. 전라도 욕을 시작했지. “난쟁이 X만한 XX”하니 꼭지가 돌아버리려고 하더라. “넌 애비도 없냐” “넌 자식도 안 키우냐” 그러고 싸웠다.


전화 끊고 집에 왔는데 이영희 간사 혼자 있는 사무실에 정보과 형사 네 명이 와서 “저희가 한 게 아이고요. 안기부에서 누가 했는지 모르겠는데 오해하지 마시라”고 “지발 그렇게 욕을 하시면 안 되지요” 그랬다. 그렇게 일일찻집은 다시 하게 됐다. 이영희가 고생 많았지...


현해협 때는 오픈 공간에서 활동한 게 아니었지만 같이 회의하고 그랬다. 임지본(임투지원본부), 울노협준비위(울산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원회)에서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쪽들 하고 같이 움직였다. 지금도 같이 서울에서 모임을 한다. 술 한 잔씩 하고. 배남효 형은 지금 은퇴해서 북촌에 작은 집 얻어서 학당을 한다. 북촌 학당에서 강연회도 하고 소일거리하고 있다.


결혼하고 현해협 바로 옆에 호프집을 했다. 생업으로... 노동자가 출마하면 사무장 맡아준다거나 하고 그랬다. 87년 이후로 90년대 넘어가면서는 노동조합이 자생적으로 많이 생겨나 감놔라 배놔라 할 필요도 없었고...


울산 떠난 지 13년 됐다. 지역에서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운동하던 사람들도 떠나가고 해서 나도 그렇게 생업만 맡게 됐다. 학원강사도 했다. 학원 선생님은 참 잘했다. 아이들하고 많이 친했다. 성적도 잘 올려주고 아이들이 참 좋았다. 애들을 가르치면서 왜 공부를 잘 하고 왜 공부를 못 하는지 알게 됐고 공부를 잘하고 싶어하는 학생이 있으면 왜 그런지 가르쳐줬다. 100등 넘게 올리기도 하고 중간 정도 돼도 명문대 올려 보냈다.


지금은 아파트에 마루 박는 일을 한다. 동생이 현장소장이라 그 일을 배웠다. 이제는 아파트에 장판이 없다. 모노륨장판 가게 자체가 없는데 뭘. 공사현장에서는 소득이 높은 편이지만 살이 8~10킬로가 빠진다. 쭈그리고 앉아 뚱뚱거리고 있으니까. 고무망치로 하니까...


5.18 응어리 가슴 속 불씨


이=울산 운동사의 순간순간 고비고비마다 전면에 있었다.


박=지하가 일곱 명이니까 바깥에 나 혼자 있으면 되지 뭐(웃음)


이=87년 시절을 돌아본다면?


박=후배들 이야기 들어보면 운동 선택할 때 갈등을 한다고 하더라. 꿈속에서도 전경에 쫓긴다고 하기도 하고. 두려움이 왜 없었겠나. 나는 특이하게 5.18을 겪고 나서 가슴 속 응어리 불씨들이 남아서 작은 후회나 갈등 없이 연설 한 마디로 훅 가 버린 거다. 뒤돌아볼 새도 없고 옆으로 볼 필요도 없고. 감옥에서 고마웠던 건 내가 늦게 지도도 없이 혼자 시작했음에도 미친 듯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줬다는 거다. 많은 양식을 섭취하게 됐다. 안동교도소 나오면서 관물대를 확인하는데 돈은 얼마고 옷은 얼마고 하는데 책을 확인해보니 300권이 있었다. 그 중에 안 읽은 책이 없었다. 빵에서는 책을 엄청 읽고 하루에 한 권씩은 읽으니 정말 좋은 양식이었다.


이후에 바깥에 나와서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지 않으려고 주제를 정해서 읽었다. 미술이라도 미술평론 등등으로 분류하고 경제 역시도 그런 저런 분류를 정해 주제를 정하고 읽기 시작했다. 감옥에서는 입맛이 어딨나. 주는 대로 읽어야지.
나와서는 해방된 분위기 속에 주체사상 이게 뭔 짓인지 모르고 동구라파가 무너지면서 북한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실상은 뭔가 싶어서 알아보려고 추운 겨울에 만주로 가서 두 달 동안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랬다. 용목 씨 소개로 연길에서 고위직 관리부터 일반시민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갔다 와 보니 주체사상의 허와 실을 이해하겠더라. 주체사상의 핵심이 수령론인데 이 수령이 잘못했을 때는 어떻게 할 건가. 무오류를 강조하니까 결정적으로 틀린 거다. 하다못해 조선시대 때도 신권 정치 정도전의 이상과 왕도 정치 이방원의 현실이해가 부딪히며 이방원이 이겼지만 조선왕조 500년은 정도전의 사대부의 나라로 존재해왔다. 가장 특징적인 제도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3사 제도다. 언관은 임금 권력자의 잘못에 상소하는 게 업이고 여론 전달을 하는데 그 나약한 왕이 나라를 500년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특히 3사 제도는 굉장히 뛰어난 민주적인 제도인데 사극을 봐도 중국 사극은 여인들의 암투 권력싸움인데 한국사극은 맨날 논쟁만 한다. 일할 밖에 안 되는 양반의 나라였지만 일부의 민주주의라도 있어 500년을 이끌어온 것이다. 북한에는 그런 언관이 없는 거다. 수령의 무오류성에 흠집이 나면 어떻게 할 건지 대책이 없다.

 
연길 농업국장을 했던 박사를 만나서 옥수수 가지고 이야길 하는데 “북한이 왜 저러는지 아느냐. 우리는 1제곱미터에 여섯 개 씨를 뿌리는 데 쟤네들은 아홉 개를 뿌려. 우리는 수확량이 10킬로그램인데, 쟤네들은 7킬로그램 밖에 안 된다. 왜 그런 줄 아냐 수령님이 그렇게 가르쳐서 그렇다”는 거다.


특별취재팀
인터뷰=이종호 편집국장
정리=이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