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휴대전화를 몰래 훔쳐가 게임을 하던 두 녀석을 불러 세웠다. 별 것 아니지만 부러 좀 세게 야단을 쳤다. 아홉살 둘째는 아빠의 정색에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겁을 먹는다. 반면 열세살 첫째는 뭐 별것도 아닌 일에 이러냐는 듯 당당하다. 아직 세상 때가 덜 묻은 둘째는 사소한 잘못에도 예민해서 반성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부정한 일에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진 첫째는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잘못에는 둔감해진 것이다.


“내본아, 새 신발을 신으면 발뒤꿈치에 상처가 나고 아프지만 굳은살이 생기면 아프지 않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작은 잘못에도 불편한 마음이 생기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는 지금 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거야. 그게 바로 니 양심에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소리야.” 인정할듯 말듯한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첫째에게 더 이상의 잔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양심에 덕지덕지 굳은살이 베긴 내가 누굴 나무라겠는가 싶어서.


인간이 원래 선한지 악한지, 것도 아니면 백지상태인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도덕심을 타고 난 호모 모랄리스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부정한 권력이 악용하는 바람에 도덕이라는 말이 불편하고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인간에게 도덕심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지켜야 할 바람직한 행동기준이 없는 사회,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 도덕심이 없으면 그 사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지 않을까.


요즘 최소한의 도덕심마저 사라진 광경을 너무 자주 목격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온갖 비리로 얼룩져 있다는 게 사실로 들어났다. 그럼에도 끝까지 잘못한 게 없다고 버티고 있는 것은 최소한의 도덕심이 없기 때문이다. 거의 괴물 수준의 성폭력 가해자가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그땐 다 그랬다고 말하는 건 반복적 경험에 의한 도덕적 둔감 때문이다. 소위 진보 인사들의 떳떳치 못한 즐거움은 양심에 켜켜이 쌓인 굳은살 때문이다.


반복된 부정으로 부끄러운 마음도 잃어버린 사람들, 도덕의 본질이랄 수 있는 타인의 시선과 비난에도 둔감해져버린 사람들. 그들의 양심에는 도대체 얼마나 두꺼운 굳은살이 쌓여있는 것일까. 호모 모랄리스가 아니라 호모 임모랄리스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한참 애들 혼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누라가 한마디 한다. “내본아, 아빠는 양심에는 굳은살이 아니라 콘크리트가 쳐져있다~ 아빠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고, 운전하다 욕하는 거 자주 들었지? 아빠 양심에는 시멘트가 단단하게 발라져 있어서 그런 거야.” 엄마의 한마디에 첫째도, 쫄아 있던 둘째도 키득거리기 시작한다. 밉기는 하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나야말로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얼마나 부도덕한 인간이었단 말인가.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했다. 사소한 부도덕으로 인해 쌓인 양심의 굳은살 때문에 큰 부도덕에도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된다. “내본아, 생각해보니 아빠 양심에 정말 굳은살이 많은 것 같다. 목욕할 때 쓰는 굳은살 제거하는 스틱 본 적 있지? 아빠도 그것처럼 나쁜 굳은살을 좀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내본이 너도 그럴 생각 있지?” “네, 그럴게요, 아빠.” 이렇게 우리는 다시 호모 모랄리스가 되기로 다짐해본다. 다짐만 해본다.


김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