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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조성된 작천정 벚꽃길이 공원화 사업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해마다 4월이면 작천정으로 가는 길에는 벚꽃 터널이 생긴다. 1km 길은 벚꽃 명품길이다. 꽃길 주변의 장사꾼들로 인해 꽃구경을 망치기 일쑤였지만 최근 울주군청이 토지를 매입하고 공원화 사업을 한 후로는 많이 바뀌었다. 벚꽃길은 80여 년 전인 1937년 천도교인이었던 곽해진을 중심으로 작궤천 도로를 개통하고 벚나무를 심은 데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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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천정 벚꽃길은 꽃눈 맞으면 걷기에 좋은 명품길이다.>


벚꽃길의 끝자락에 1915년에 김영걸이 쓴 인내천 바위가 있고, 조금 걸어가면 작천정이 나온다. 봄에는 벚꽃길이 유명하지만 실상 작궤천과 작천정은 풍류의 공간이다. 작궤천은 바위 면에 술잔 모양의 구멍이 있었기에 유래되었다. 작천정은 1899년 언양군수였던 최시명이 이듬해 착공해 1902년에 완공했다. 정자가 있는 곳은 아름답기 마련이다. 하지만 산과 물, 정자의 아름다움은 사람이 아름답게 여기는 데 있다. 벚꽃길을 벗어나 작천정에 당도하면 무릉도원에 온 듯 모두 탄성을 지른다.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사랑을 가슴에 새긴 사람들이 있다.


작천정에서 만난 김홍조와 이구소


작천정 앞 작궤천 술잔바위에 추전 김홍조와 이구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전 김홍조(秋田 金弘祚, 1868~1922)는 울산의 선각자요 독립 운동가였다. 염포 염전을 운영한 부친 김규한은 그를 서울로 보냈다. 그는 박영효 등 개화파와 교류하고 일본을 왕래하였다. 한때는 관직에 진출해 1907년에는 지금의 대통령 비서직인 비서감승에 등용되기도 했다. 경부선 철도 침목 공급사업, 전신주 납품 등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여 만석꾼 경주 최 부자 못지않은 경제력을 지녔다. 육영사업으로 울산에 울산여자학교 등을 건립했다. 1909년 경남일보 사장 겸 발행인, 1920년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구포은행과 경남은행을 설립, 경영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국내외 독립 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런 김홍조는 말년에 언양의 기생 이구소를 만나 사랑을 하다 55세 때에 위궤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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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천정의 봄날은 진달래와 벚꽃 그리고 물소리가 어울린다. >


이구소(1892/1894~1991)의 초명은 봉선(鳳仙), 개명은 호경(頀卿), 호는 구소(九簫)・천인재(千仞齋)이다. 9살 때 언양 고을 기생학교인 교방(敎坊)에 들어갔고 오영수 소설가의 큰할아버지 송옥 오병선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시작법(詩作法)을 배웠다. 17살에 경전에, 18세에 편지와 시(詩)나 부(賦)에 능통했다. 그녀는 김윤식, 장지연, 한용운, 이해조, 유길준, 김규진 등이 활동하던 당시 대표적 문단이었던 ‘신해음사’의 회원이었다. 1910년대부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했다.


첫사랑은 내밀하여 숨겨지고


이구소의 첫 남편은 언양 출신 송년(松年) 오무근(吳武根, 1884.7.2.~?)이다. 부부는 신해음사 창간(1911) 때부터 투고하며 활동했다. <조선신사대동보(1913)>에 따르면 그는 언양군 상북면 송대리 구교동에 거주하였고, 부친 오기영은 통덕량 벼슬을, 오무근은 궁내부주사 학무위원으로 1909년 순종 황제의 남순 때 수행을 하여 기념장을 받았다. 작천정 오래된 벚나무 옆 큰 바위에 그의 이름이 있다. 오무근 이름바위 맞은편에 작천정을 중간에 두고 이구소의 이름바위가 있다. 마주 보는 두 사람, 말 못 할 사연을 간직한 남녀의 애틋한 시선을 느끼게 한다. 도대체 어떤 사랑을 했을까. 이구소의 시집 <봉선화(1980)>에 추전을 사랑한 이야기는 있지만, 송년의 존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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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 바위는 풍류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이 앞 바위에 추전과 구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이구소는 처음 추전 김홍조의 소실로 들어갔다가 김홍조가 사망하자 거창 명문가의 종손이자 승지 벼슬을 한 정태균의 재취로 들어가 70여 년을 그 집안의 일원으로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의 첫 남편, 첫사랑은 두 집안에 알려지지 않았다. 철저히 첫사랑은 비밀로 숨겨져 있었다. 아, 사랑이여! 애달픈 첫사랑이여! 말하지 못할 사랑, 뼈와 살 속에 단단히 새겨진 첫사랑이여! 그 둘의 사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밀이다. 대략 5년 정도 사랑을 했다. 이구소 17~8세 때였으니 그 사랑은 이몽룡과 춘향,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사춘기적 사랑이었기에 더 뜨거웠을 것이다. 열 살 연상 오무근과의 동거는 세상의 눈총을 의식해야 했을 것이다. 그 둘의 사랑은 오무근의 결혼 혹은 김홍조의 등장으로 끝장이 난다.


주체적 삶의 결정자이며 전문직 여성이었던 기생


이구소는 기생(妓生)이었다.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 여자가 정절의 이념을 강요당했을 때, 기생은 노래와 춤을 하며 자신의 몸에 대한 주체적 결정권을 가지고 살았던 거의 유일한 여자였다. 양반층 남성에게 기생과의 동침은 원칙적으로 금기였다. 하지만 춘향의 예에서 보듯 말을 듣지 않는 기생에게 돌아온 것은 매타작이었다. 조선 세종 때 지방관들이 동침을 거부하는 관기를 다스리느라 정사를 돌볼 틈이 없다 하여 관기의 폐지가 논의되기도 했다. 아무튼, 기생은 양반들의 사치노예이자 성적 대상이었기에 시와 노래, 춤을 허용했고 양반을 상대할 정도의 학문 교육을 받아야 했다. 기생은 전문직 여성으로 대접을 받았고, 자기 삶의 주체적 결정자였다. 이구소는 1900년대와 1910년대 기생 출신으로 한시집을 남긴 유일한 여자였다. 기생은 노류장화(路柳墻花)라는 말처럼, 길거리에 선 버드나무나 담 밑에 핀 꽃처럼 뭇 남정네들 손에 꺾이기 쉬운 꽃이었고 시들면 버려지는 꽃이었다. 하지만 이구소는 그렇지 않았다.


1910년대부터 이구소는 오무근과 동거했지만, 이 시기에 추전 김홍조와도 알고 지냈다. 그녀는 시를 짓는 풍류적 여자였기에 이중적 생활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1910년경 당시 추전은 금릉위 박영효와 함께 울산을 방문하는 일이 잦으면서 언양 작괘천에서 여흥을 즐기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 이구소는 언양에서 기생으로 글과 노래로 명성이 높았다. 결국, 추전과 알고 지내면서 생활은 오무근과 하다가 나중에 김홍조의 소실이 되어 추전의 죽음까지 같이 살며 사랑을 했다. 이구소는 어쩜 오무근과 김홍조 사이에서 갈등을 빚었을 것이고, 오무근은 죽음 같은 질투를 했을지도 모른다. 열등감은 애증의 절정이고, 결국은 지독한 사랑만큼의 증오를 남긴다. 때론 첫사랑이 절대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모든 것은 혼자만의 비밀과 기억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름바위를 바라볼 때 과거는 분명 떠올랐을 것이다. 이구소와 이별을 전후로 오무근은 1916년 경남지방토지조사위원으로, 1923년 언양여자야학과 민립대학 발기인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바위에 사랑의 이름을 새기고


이구소는 20대 초반이었고 추전은 40대 후반이었다. 15년 동안 마음의 벗(心友)으로, 그중 8년은 부부로 살았다. 스물여섯 살, 나이 차이는 컸지만 사랑은 그것을 넘었고, 추전이 사업이나 독립운동으로 바빴지만 사랑은 지극하였다. 김씨 문중회의에서는 추전에게 구소와 헤어질 것을 권했다. 문중의 압력에 추전은 절교장을 썼지만 구소의 답시는 애절했다. “절교장 붉은 도장에 소리 없이 하늘 무너져/ 정 없다 한탄 않고 인연 없다 한탄하네/ 정녕코 헤어질 줄 일찍 알았더라면/ 하룻밤 사랑도 맹세코 이루지 않았으리” 추전은 결국 헤어지는 것을 단념했다. 만약 구소가 시를 노래하지 못하는 여자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추전과 구소는 작천정 앞 작궤천의 술잔 바위에 앉아 서로 술을 마시며 사랑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봄날에 화천(花川) 따라 핀 꽃을 보며, 백택안산(白澤案山)의 진달래를 술잔에 띄우며, 바람을 느끼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면 나이도 잊고 시간도 잊고 두견주를 한 잔 두 잔 그렇게 마셨을 것이다. 봄날 작천정에 벚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면 이구소의 머리에 어깨에 내렸을 것이고, 추전은 그런 그녀를 꽃 보듯 사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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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소의 첫사랑 오무근의 바위에는 구소의 스승 오병선, 울산의 부자 김좌성 이름도 있다. 맞은편에 이구소와 김홍조의 이름바위가 있다. >


작천정, 작괘천에서의 사랑은 어쩌면 길지 않았을지 모른다. 결혼 초기 4년은 울산에서 나머지는 부산에서 살았다. 그래서 추억의 술잔 바위에 그 둘은 이름을 새겼다. 작괘천은 이구소에게 작품의 무대인 동시에 사랑의 공간이다. 20여 편 가까운 시를 남긴 곳이다. 당시 작천정은 김홍조의 소유였다. 양반이 소실(小室) 그것도 기생 출신의 이구소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기 이름보다 더 크게 이구소의 이름을 새겼으니, 그의 만민평등사상만큼이나 이구소를 사랑한 것이다.


그리움은 사무치는데 봄은 점차 저물어


추전 김홍조는 이 작천정 일대를 둘만의 사랑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의 토지측량 때 작괘천 북쪽 임야와 정각은 오모씨 개인 명의로 등기되어 있었다. 이를 추전이  매입하여 개인 별장화하였고 정자와 하천에 지역민의 출입을 금지했다. 이에 주민의 원성이 높기도 했다. 그 후 추전이 이구소 집안으로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 언양의 천교도인 곽해진, 유철순, 최지형 등이 이구소 집안을 설득해 연명제 등기를 하여 사유화를 막았다고 한다. 나중에 곽해진은 작천정 벚꽃길을 조성하였다.


이구소는 김홍조가 1919년 2월 독립운동 하러 상해로 갈 때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큰 뜻을 품고 가시는 앞에 눈물은 금물이라 감히 울지 못하였다가 그님이 앉아 계시든 자리에 엎드려 나는 울었고 한없이 울어 그 밤을 새웠으며 아침 햇빛에 눈이 부시어 볼 수 없도록 울었다. 우주가 텅 빈 것처럼 허전하고 앞길이 아득하였다.” 추전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노래했다. “휘늘어진 버들가지 천 갈래 만 갈래로도/ 가시는 임 못 붙들 줄 나 익히 알건마는/ 꾀꼬리 노래 요란한 이처럼 좋은 때에/ 오래 같이하고 싶은데 지루하실까 두렵네” 작천정에서 구소는 또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운 한 잊을 수 없어/ 거듭거듭 다시 만나 이 경치를 즐깁시다”라고 한다. 서울 간 추전을 생각하며 “그리움은 사무치는데 봄은 점차 저물어/ 밤마다 서로 찾아 꿈속에서 만난다오.” 사모의 정을 드러내었다.


사랑은 가고 이름도 바꾸었지만


추전이 죽자 이구소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붉은 것이 푸르게 보이고 우레소리 안 들려/ 이렇게 이별한 인연 이내 한을 어이 할꼬/ 이런 날이 올 것을 분명 알았다면 차라리 이런 인연 맺지나 말 것을” 사랑은 화무십일홍과 같이 길지 않다. 긴 사랑보다 짧은 사랑이 더 지독할 수 있다. 그래도 꽃 진다고 그 사랑을 잊는 것은 아니다. 추전은 죽으면서 이구소에 당시 논 100마지기를 상속했을 정도로 깊이 사랑했다. 김홍조가 죽고 난 뒤 이구소는 일년상을 마치고 표연(飄然, 회오리바람같이)히 집을 떠나 조선 말 승지를 지낸 거창의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종손 정태균(鄭泰均, 1884~1964)의 소실로 들어간다. 사랑은 때로 다른 사랑을 통해 잊어야 한다. 그녀는 30이 되지 않은 젊은 여자였다. 추전의 죽음 이후 이구소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거창의 정태균과 40년 가까이 살았고 정씨 사후 30여 년을 더 넘게 살았다. 그는 소실이었지만 예우를 받고 살았다. 이구소는 자식 복은 없어 양아들을 두었다. 1926년 봉선을 호경으로 개명했다. 그가 거창에 살 때이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새롭게 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사랑의 시는 짓지 않았다. 하지만 구소의 삶에는 추전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남아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름바위에 새겨진 것처럼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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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소와 김홍조 이름바위, 추전보다 구소의 이름이 더 크다. 그 크기만큼의 사랑도 깊었을 것이다. 바로 위에 술잔바위가 있다. >



꽃눈 날리는 날, 그대 사랑은 안녕하신가요


작천정 벚꽃길에 꽃눈이 바람에 날린다. 사람이 하늘과 같이 대접받기를 원했던 선각자의 길을 걷는다. 꽃은 지고 나면 푸르른 잎이 돋아나고 열매가 맺는다. 우리는 꽃에만 머물 것이 아니다. 꽃의 열매를 생각하고 또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다시고 꽃피우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이 이별하였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랑은 사람이기에 여전히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봄에는 벚꽃눈을 맞아볼 일이다. 환히 내리는 꽃잎을 보면 마음이 맑아지고 다툰 사람도 환해지고 모두 어린아이 같아진다. 꽃눈을 잡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온다고 하니 꽃눈잡기 놀이를 해 볼 일이다. 꽃눈을 온몸으로 맞이하면 봄 사람 되지 않겠는가. 꽃을 보고 봄을 보고, 사람을 보면 사랑을 보는 그러한 꽃눈 날리는 날이다. 그대, 사랑은 여전한가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