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이 바뀌면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나 모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낯선 친구들을 만난 학생들이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선생님들도 새로운 학생들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아직은 낯선 녀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면 수업을 진행하는 패턴이나 구사하는 언어의 표현방식이 작년의 내 모습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는 점을 느낀다. 새로운 학년을 맞이할 때마다 매번 이런 과정을 거치니 선배 교사들이 말씀하셨던 교사의 연륜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씀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다가 학생들과 선생님들 모두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4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수업은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금성출판사에서 펴낸 법과정치 교과서 69페이지에 ‘정치과정’이란 주제가 나온다. 개인이나 집단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결정되도록 국가의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책 결정 과정이나 사회적 쟁점 해결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교과서는 선거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나 이익단체를 통한 활동, 1인 시위, 청원 등을 기술하면서 옆에 사진을 하나 실었다. 그 사진은 ‘청소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지지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빨간색 몸자보를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몇 해 전부터 지속적으로 발생한 여러 대학교의 청소노동자 외주화와 감원 지침으로 인한 갈등을 설명하면서 몇몇 대학의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하였던 사례들을 들려주었다. 특히 숙명여대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농성과 집회를 하면서 일자리를 지켜내었고,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청소노동자들에게 목도리와 장갑, 떡 등을 선물한 사실과, 이에 보답하여 청소노동자들이 김장을 담아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에게 전달한 사실, 그 이후 일부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을 이모님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들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사례로 4년이 다 되어가도록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의 얘기도 들려주었다. 얘기를 들으며 학생들이 숙명여대의 사례에 감동을 표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몇몇이 울산과학대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 학교도 잘 해결될 것이니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가볍게 수습하였다.


한 보름 전 나는 퇴근하면서 예닐곱 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울산과학대 농성장을 찾았다. 언제나 밝게 맞아주시는 누님들과 호방한 웃음을 보여주시는 김 위원장님, 번갈아 농성장을 지키는 연대 동지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모름지기 농성장이란 다소 진지하고 결의에 찬 눈빛을 가진 비장한 표정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언제나 웃음이 넘치고 준비된 가수들이 서로의 실력을 뽐내고 목마르면 막걸리가 나오고 출출하면 국수를 말아내니 다들 무슨 소풍 온 것 같다. 농성이 오래 이어지니 절박하고 심각한 사항들이 틀림없이 많을 텐데도 오랜만에 방문한 우리들에게 전혀 내색하지 않으니 그 넉넉한 마음들이 또 고마울 뿐이다.


울산과학대 농성장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국수다. 순남 누님만의 비법으로 우려낸 국물에 쫄깃한 면발을 풀어 양념을 얹어 건네주는 국수는 단언컨대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국수 중 최고다. 언제나 왁자지껄한 농성장이 국수 사발을 손에 든 순간만큼은 조용하다. 다들 식도락가가 되어 말없이 젓가락만 열심히 움직이며 무념무상의 경지를 즐긴다. 농성이 끝나면 순남 누님은 청소를 할 것이 아니라 국숫집을 차리는 게 좋겠다고 다들 말한다.


법과정치 교과서 208페이지에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와 해결 노력’이란 주제가 나온다. 아마도 올 가을 즈음에나 이 단원을 다루게 될 것이다. 가을이 되기 전에 울산과학대 농성이 끝나면 나는 학생들에게 농성장 국수가 얼마나 맛있었는가를 가볍게 얘기할 것이고, 그때까지 농성이 끝나지 않는다면 나는 비정규직의 실태와 우리나라 재벌의 특성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진중하게 언급할 것이다.


가을이 되기 전에 농성을 끝내느냐 끝내지 못하느냐의 주요 계기 중 하나는 6월 13일 실시하는 지방 선거와 교육감 선거라고 생각한다. 선거 결과에 따라 울산과학대 문제를 포함한 비정규직 문제, 사회 양극화 문제 등의 해결 방안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선거를 잘 하자. 스산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농성장에서 국수를 또 먹고 싶지는 않다.


조성철 삼일여자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