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후배의 미술 전시회를 다녀왔다. 전시제목이 ‘이사’였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집을 골라 집안 전체를 비닐로 감싸는 설치미술이다. 건축학도들은 자신의 학문영역을 인문학과 가깝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물질과 구조로 표현하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가 사람살이와 밀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배는 더 나아가 집 자체도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인생과 같다했다. 태어남이 있고, 수많은 살이의 역사가 있고, 흔적을 남기며 결국엔 생을 마감한다. 인간이 생을 마감할 때 ‘염’이라는 의식을 치르듯, 집에게도 그러한 의식행위를 해주는 것이었다. 집은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조용히 끌어안으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스스로는 선택권이 없는 피동적 존재다. 그러나 요즘 집을 생각하면? 인간이 집을 선택한다기보단 집이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지... 정해진 가격과 정해진 위치에서 조건에 맞는 인간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은 정해진 위치가 있음에도 자신의 그리고 주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사를 다닌 석조물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이름은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 현재 나이 660살(고려 충목왕 4년(1348년)에 만들어짐), 출생지 경천사(개성직할시 개풍군 광수리 부소산 위치) 현 거주지 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세가 있고 예전엔 시험문제에도 자주 출제되어 낯설지 않은 탑이다. 학창시절엔 외우느라 바빴지 그게 남한에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히 찾아 보러 갈 생각도 없었고. 박물관을 개관하고서도 이것이 개성의 그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높이가 무려 13미터가 넘는 이 탑은 현재 고향을 떠나 남쪽의 국립박물관 1층 따뜻한 해를 받으면 실내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 잘 사는 집에는 자기의 출생지를 떠난 탑이나 석등 따위의 석물 하나쯤 있었기도 하고 그리고  박물관이기 때문에 본디 태어난 곳이 아닌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에 크게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남모를 이주의 수난이 있었으니...


1907년 2월 4일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던 일본의 곤토라는 사람이 일본인 수십 명과 헌병을 대동하고 개성의 폐사 상태였던 경천사 터에 나타났다. 홀로 우뚝 서 있던 10층 석탑을 허물어 가져가려 하는 것을 인근 주민이 목격하고 당시 관아에 신고를 하고 저지하려 하자, 황제(고종)가 일본 대신에게 선물로 하사하였다며 가져가려 하였다. 이에 군수는 믿을 수 없다며 근거 자료를 내놓으라 했고 주민들과 함께 지켰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의 무자비한 약탈 행위로 연일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일본 대신 타나카의 공작으로 결국 무장한 수백여 명이 동원돼 개성철도를 이용하여 인천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당시 개성에서 일본으로 탈취해간 정황 전체를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옥탑 탈거의 전말’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 밀반출에 대한 국제적 여론과 일본 내 반대 여론이 일게 되자 도쿄 우에노 공원의 제국박물관에 도착한 수십개의 가마니는 다시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가마니를 풀어보니 훼손도 있고 도저히 복원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가마니 더미는 경복궁 근정전 회랑 한 구석에 방치가 된다.(아마도 당시엔 이렇게 높은 건조물을 복원하는 기술과 인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광복이 되어서도 수십 년이 흐른 1960년 어느 날 국립박물관 한 연구원이 가마니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경복궁 동쪽 건춘문 안에 어렵게 복원을 하여 국보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1980년대 들어 경복궁 복원 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1995년 해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작업을 했다. 2005년 신축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실내에 전시되고 있다.


나라가 갈라져 있으니 제 위치에 갈수도 없고(일제시기에 전시한답시고 문화재를 서울로 가져와 제자리를 못 찾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높이도 높고, 다양한 조각이 당시 세계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니 박물관에 가시면 자세히 보고 그 이주의 역사를 한번쯤 떠올려보시길 바란다.


윤지현 기록 전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