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최근에 세운 동학유적지 무은담터 표지석. 해월은 1878년 정선 무은담 유시헌의 집에서 개접을 펼쳐 수운 때의 동학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


개접(開接)을 열어 ‘모심[侍]’의 뜻 논의 


해월은 영월과 정선의 도인들의 도움으로 안정을 찾았다. 여기에는 유시헌의 도움이 컸다. 유시헌은 자기 집에 기도소를 마련해 해월과 도인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1878년 7월 25일 해월은 정선 무은담 유시헌의 집에서 개접(開接)을 했다. 개접이란 수운이 살아있을 때 도인들을 모아 동학의 이치를 토론하는 모임으로 현재의 강도회(講道會)와 같은 성격이다. 개접을 통해 도인들의 동학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나가며 신앙을 강화시켜 나갔다. 수운의 마지막 개접은 1863년 7월 용담에서 있었다. 이때 개접을 마감하는 파접(罷接)을 한 이후에 해월이 정선에서 개접할 때까지 15년간 열리지 못했다.


개접이 15년간 열리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은 동학에 대한 지목 때문이었다. 1863년 12월에 있었던 수운의 체포와 순도, 그리고 이어진 해월에 대한 지목으로 개접을 할 여유가 없었다. 특히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해월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집회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다음으로 해월의 종교적 성취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접을 하면 도학에 대한 질의와 응답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수운은 박학다식(博學多識)했을 뿐 아니라 깊은 종교적 체험을 갖고 있어 제자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통을 전수받은 직후의 해월은 수운과 같은 학식과 종교적 성취가 부족했다. 그래서 해월은 1년에 네 차례 49일 기도를 하는 등 15년간 꾸준히 주문 수행에 힘썼다. 특히 1872년 적조암에서의 기도를 통해 깊은 종교적 성취를 거두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목이 누구러지자 개접을 하였다.


해월은 개접의 주제로 수운의 가르침인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용담유사>, ‘교훈가’)라는 구절을 택했다. 이 구절은 동학의 핵심적인 교의인 시천주(侍天主)에 관한 내용이었다. 해월은 이때 ‘시(侍)’에 관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제군(諸君)은 시(侍)자의 뜻을 아는가. 사람이 포태(胞胎)될 때에 곧 시(侍)자의 의(義)가 성립(成立)되는가. 낙지이후(落地以後)에 처음으로 시천주(侍天主)가 되는가. 입도(入道)의 일(日)에 시(侍)자의 의(義)가 생기는가.(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시천주(侍天主)는 동학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이다. 그래서 해월은 개접을 시작하면서 시(侍), 즉 모심의 의미에 대해 제자들에게 물었다. 해월은 사람이 포태되는 순간에 한울님 모심이 시작되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에 한울님 모심이 시작되는지, 또 아니면 동학에 들어와 시천주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시천주가 되는 것인지 모심의 시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제자들에게 화두를 던졌다.


해월이 이때 한울님 모심의 시점이 언제라고 단정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해월의 글들을 살펴보면 모심의 시점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사람이 포태되는 때가 한울님의 모심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해월은 ‘이 몸은 천지부모(天地父母)가 주신 바요 나의 사사로운 물건이 아니니’라든가 ‘천포지태(天胞地胎)’ 등을 통해 한울님 모심이 포태의 순간에 시작됨을 언급하고 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존재론적 시천주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이 포태되는 순간부터 시천주의 거룩한 생명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인내천(人乃天)의 의미도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동학의 존재론적인 시천주는 평등과 공평의 세상을 만드는 광제창생으로 구체화되었다.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인 시천주이다. 해월이 말한 ‘입도의 날’이 이를 말한다. 이는 사람이 시천주라는 것을 깨닫는 종교적 수행을 통해 시천주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월은 주문 수행을 통해 내 마음에서 한울님이 작용하는 것을 인식할 때 새로운 의미의 시천주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였다. 해월은 시천주의 경험은 양천주(養天主)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내 몸에 모셔진 한울님을 경험하게 되면 한울님을 어린아이 기르듯이 하는 양천주의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의암은 이 양천주는 각천주(覺天主)와 체천주(體天主)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이는 모두 인식론적인 시천주를 의미한다.


해월은 동학에 입도해 종교적 체험을 통해 시천주를 깨달았을 때 진정한 의미의 시천주를 찾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시천주를 깨달아야 시천주의 세상, 즉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구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08-2

<유시헌의 묘. 정선접주 유시헌의 묘는 수명 마을에 있다. 특이한 점은 유시헌의 도호(道號)는 정암(旌菴), 그의 아들 유택하의 도호는 선암(善菴)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정선(旌善)에서 한 글자씩을 땄다. 유시헌 부자는 정선에 처음으로 동학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연구해 보라


1878년의 개접에서는 ‘모심’의 의미뿐만 아니라 ‘향아설위(向我設位)’와 ‘마음과 기운의 작용’, ‘주문(呪文)과 수심정기(守心正氣)와 무위이화(無爲而化)’, ‘천황씨(天皇氏)’, ‘신인합일(神人合一)’, ‘일용행사(日用行事)와 도인의 본무(本務)’ 등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해월은 개접을 통해 제자들이 동학의 신념체계에 충실할 수 있도록 지도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강시원은 개접이 이어진 것에 대해 “다시 용담(龍潭)의 즐거움을 일으키고, 구미산(龜尾山)에서 놀던 운을 여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찌 뛰어난 즐거움이 아닌가.”라고 회상하였다. 용담과 구미산은 수운이 득도한 경주의 지명으로 개접을 통해 동학의 도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기뻐했다.   


개접에서 있었던 논의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향아설위(向我設位)’였다. ‘향아설위’는 시천주의 신념체계를 의식화한 제사법이다. 해월은 유교의 제사법은 ‘향벽설위’라고 하면서 죽은 사람 즉, 귀신 중심의 제례라면, ‘향아설위’는 살아있는 사람 중심의 제사법이라고 했다. 해월이 이때 제자들에게 ‘향아설위’에 대해 앞으로 연구를 해보라고 과제로 제시했지만 이에 대해 설명은 하지 않았다.


해월이 ‘향아설위’의 제례를 몸소 실천한 것은 이때부터 20년이 지난 1897년 4월 5일 경기도 이천군 설송면 수산1리의 앵산동에서 동학창도제례를 지낼 때였다. 1897년 해월은 향아설위의 의식을 처음으로 시행하면서 이에 대해 묻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 만대에 이르도록 혈기를 계승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요, 또 부모의 심령은 한울님으로부터 몇 만대를 이어 나에게 이른 것이니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혈기는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요, 심령과 정신도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하고, 부모가 살아계실 때의 교훈과 남기신 사업의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으니라. …(중략)… 만 가지를 차리어 벌려 놓는 것이 정성이 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청수(淸水) 한 그릇이라도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이 옳으니라. 제물을 차릴 때에 값이 비싸고 싼 것을 말하지 말고, 물품이 많고 적은 것을 말하지 말라. 제사지낼 시기에 이르러 흉한 빛을 보지 말고, 음란한 소리를 듣지 말고, 나쁜 말을 하지 말고, 서로 다투고 물건 빼앗기를 하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굴건과 제복이 필요치 않고 평상시에 입던 옷을 입더라도 지극한 정성이 옳으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굴건을 쓰고 제복을 입고라도, 그 부모의 뜻을 잊어버리고 주색과 잡기판에 나들면, 어찌 가히 정성을 다했다고 말하겠는가.


해월은 조상과 부모의 심령과 정신이 나에게 남아있기 때문에 나를 향해서 위를 베푸는 향아설위의 제례가 합당하다고 했다. 나를 향해서 위를 베풀기 때문에 제사상을 특별히 차릴 필요가 없고 평소 식사를 장만하듯이 준비하라고 했다. 형편이 안 될 때에는 그저 깨끗한 물 한 그릇을 차려 놓고 지극한 정성으로 제사를 봉행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해월이 제시한 향아설위의 제법은 살아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제례법이다. 중요한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부모의 유업과 뜻을 제대로 잇고 있는가에 있다고 했다.


해월은 제사상을 상다리가 부러질듯하게 차려놓더라도 주색잡기에 빠져있거나 나쁜 말과 행동을 한다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또한 제복도 따로 갖출 필요 없이 평소 입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부모와 조상의 뜻을 잊어버리지 않고 지극한 정성을 드린다면 그것이 참된 제례라고 했다. 해월이 제시한 향아설위의 제례법은 제사의 주체를 벽에서 나에게로, 죽은 귀신에게서 살아있는 사람에게로 돌리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당시 민중들은 허례허식에 빠진 제사로 인한 경제적 고통이 컸다. 해월은 ‘향아설위’를 통해 제사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민중들의 경제적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다.  
 

08-3

<광덕리에서 본 문두곡. 정선군 남면 광덕리(廣德里)에 있는 문두곡에서  정선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길인 문두재에서 수운 사후 박씨 부인이 단양접주 민두엽의 주선으로 1년간 은거했다. 예전에는 문두재에 주막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생겨 사람이 다니지 않게 되어 흔적이 없어졌다. >


꿈에서 만난 수운 


1879년 눈이 녹자 해월은 강시원과 김연국을 대동하고 다시 경주를 찾았다. 경주에서 친지들을 만나고 강시원은 부친의 안부를 듣고 돌아왔다. 3월 10일 송두둑으로 돌아와 수운 순도 향례를 지내려고 했지만 큰 비가 와서 영양에 사는 사위를 찾아 향례를 지냈다. 단양에서 해월의 손씨 부인과 같이 잡혔던 해월의 큰 딸은 이때 영양관아의 옥리에게 시집가서 영양 일월면에 살고 있었다. 3월 26일에는 강시원과 김연국을 데리고 다시 영서지방으로 도를 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영춘에 들러 며칠 머문 후 윤 3월 초하루에 의풍을 거쳐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거주하는 노정식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이날 꿈속에서 수운을 만났다. 아래는 꿈 이야기의 일부다.


선생(수운)이 옮겨 북문(北門)에 서서 ‘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 일곱 자를 북문에 썼다. 세 번 입으로 외우고, 세 번 손으로 북문을 치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주인(해월)이 말하기를, “저희들도 역시 북문을 칠까요?” 선생이 대답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칠 일이 있을 것이다.” 말하며, 최시형을 북문에 제수하고, 강시원을 남문(南門)에 제수하고, 유시헌을 동문(東門)에 제수하고, 또 한 사람을 서문(西門)에 제수하였다.(<도원기서, 기묘(己卯)년조>)


해월은 꿈에서 수운을 만나 겪었던 일이 너무 생생해 특별히 기록으로 남겼다고 했다. 꿈속에서 수운이 북문에 쓴 ‘천문개탁자방문’을 해석하면 하늘문이 자방, 즉 북쪽에서 열린다는 뜻으로 앞으로 동학의 장래가 북쪽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해월이 꿈에서 수운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기록으로는 이것이 거의 유일하다. 해월은 고난의 시간을 보내며 늘 수운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행하려고 노력했다. 해월은 꿈에서나마 수운을 만나면서 힘든 시간을 견디며 조용히 동학을 퍼트리고 있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