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최선생문집도원기서> 속표지. 책이름 왼쪽에 ‘사성공(司成公) 휘(諱) 예(汭) 오세(五世) 정무공(貞武公) 휘(諱) 진립(震立)육세(六世)’라고 수운의 조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최예는 사상공파의 파시조이고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에서 공을 세운 청백리이다.


구성제를 간소화


꿈에서 수운을 만나는 진기한 경험을 한 해월은 확신을 가졌다. 해월이 수운을 꿈에서 만난 것은 마치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본 것과 같은 감격적인 체험이었다. 자신의 이상을 꿈에서 만났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 서로 통했음을 의미한다. 수운을 꿈에서 보았다는 것으로 해월은 자신의 활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영월 노정식의 집을 다녀온 직후 해월은 다시 인제 김치운의 집으로 가서 구성제(九星祭)를 시행하였다. 도인들의 집단 제례를 통해 일체감을 형성해 나갔다. 정선 유시헌의 집으로 돌아온 해월은 구성제를 간소화하기로 작정했다. 그 이유는 구성제가 49일 기도를 하는 것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하자 각지에서 서로 시행했지만 구성제가 전통적 제례의식을 차용해서 동학의 이념을 담고 있지 못한 측면이 있었고, 또 도인들의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학이 민중의 도라고 했는데 도인들의 경제적인 부담을 눈으로 목격하자 해월은 이를 간소화하기로 하였다.


해월은 도차주 강시원과 상의하여 음식을 차리는 제례의식을 바꾸어 생쌀과 천으로 제수를 대신하고 제례의 명칭도 소인등제(小引燈祭)로 고쳤다. 해월은 유시헌의 집에서 이를 행하고 호응이 크자 이를 각지에 전파하였다. 지금은 이러한 의식이 남아있지 않아서 어떠한 형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인등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의암 손병희를 이어 천도교단을 이끌었던 춘암 박인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박인호는 1883년 공주 가섭암에서 시행했던 소인등제의 모습을 상세히 적었다.  


공주(公州) 가섭사(迦葉寺) 은암(隱庵)에 제단(祭壇)을 설하시니 대등(大燈) 7개를 단 전면에 제(提)하고 목기[七合器] 일조(一組)를 새로 제(製)하야 그릇마다 제수(祭需)를 성(盛)하였다. 청수(淸水)는 단 전면에 봉전하고 그 후열로 13승입(升入) 목기에서 백미(白米) 13승을 가득하게 담은 후에 백목(白木, 무명) 13척(尺)으로 그릇을 싸서 놓았으니 이것은 주문 13자를 의미하며 …… 13자, 구성, 팔괘, 칠성, 오행, 사시, 삼재를 합계한 수로 보아 49승입(升入) 목기 7개에다가 49승미(升米)를 분배해 놓은 것은 7의 수를 응용하여 49를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도교회월보> 통권 제236호, 1930년 8월) 

 

위의 기록을 보면 소인등제 의식에 사용한 그릇은 하나하나가 동학의 이념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음식을 차리지 않는 의식으로 도인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의식에 사용한 생쌀은 밥이나 떡을 지어 먹었고 무명은 옷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동학의 의식에서 제물은 모두 사라지고 청수 한 그릇만 남았다. 다만 동학에서 갈라져나간  시천교(侍天敎)에서는 해방 이후까지 시행했다고 전한다.


해월이 여러 차례 의식을 바꾸고 간소화한 것은 민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해월은 소인등제를 시행하면서 ‘지금 (살아가는) 형편을 보니 (이대로 가면) 결국에는 형편이 매우 어렵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당시 민중의 힘겨운 삶을 보듬으려는 해월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해월은 의식에 깨끗한 물 한 그릇, 즉 청수(淸水)를 표준으로 삼았다. 간소화된 인등제는 각지에서 시행되었고 나중에는 각 접에서 자율적으로 시행되었다.


정선, 인제, 청송은 물론 경주의 도인들도 인등제를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후 인등제는 매년 10월과 11월, 그리고 4월에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인등제의 보급은 동학 조직의 강화와 신앙심의 고취를 이끌어서 각지 도인들은 서로 자신의 집에서 인등제를 하기를 원했다고 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인등제는 해가 진 밤중에 행했으며 장소는 실내가 아닌 장독대처럼 단(壇)이 있는 곳에서 행하였다.


08-2

강원도 정선군 남면 호명마을.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정서(精書)한 전세인(全世仁)이 살던 곳이다. 이 마을에 전씨들이 몇집 살고 있었지만 전세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사적(史蹟)의 정리


인등제의 정착으로 동학도의 숫자도 늘어났고 교인들의 결속력도 다져졌다. 1870년대 후반 들어 동학은 영해교조신원운동의 여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다. 단양, 영월, 정선을 중심으로 교인이 증가하고 해월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숙원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해월의 숙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창도 이래 동학의 역사를 정리해 책으로 편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운이 남긴 경편들을 간행하는 것이었다. 특히 수운은 1863년 여름에 해월에게 자신이 지은 경편들을 주면서 꼭 책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었다. 해월의 보따리 속에는 수운의 경편들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해월은 관의 지목을 받아 도망칠 때에도 항상 보따리를 베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 관졸들이 쫓아오면 보따리 하나만 들고 냅다 뛰었다. 그러다 지목도 느슨해지고 교단이 안정되자 해월은 꿈에 그리던 일에 착수할 수 있었다. 


먼저 해월은 초기 동학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1879년 가을에 시작된 이 작업은 도차주인 강시원이 도맡았다. 영덕 출신 강시원은 한학에 능했을 뿐 아니라 수운이 살아있을 때인 1862년 동학에 입도해 초기 동학의 역사를 상세히 알고 있었다. 수집한 자료를 모은 후 본격적인 편찬 작업은 1879년 11월 10일에 강원도 정선군 남면 방시학의 집에서 시작하였다. 해월은 방시학의 집에 수운의 유적편집소(遺蹟編輯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초기 동학의 역사 편찬에 돌입하였다. 본격적인 편찬 작업에 들어간지 석 달만인 1880년 1월 정선 동면에 사는 전세인(全世仁)이 정서(精書)해서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당시 유적편집소에서는 임원을 정해 각각 맡은 바 업무를 분장하여 체계적으로 사적을 편찬하였다. 총 책임자는 해월이었고 도차주인 강시원과 도접주인 유시헌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유적편집소에서 간행한 책자가 바로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이하 도원기서>이다. 이 책에는 수운의 생애, 득도와 포덕, 탄압과 남원 은적암행, 접주 임명과 북도중주인 선정, 수운의 체포 경위와 제자들의 보살핌, 수운의 순도, 해월의 포덕 활동, 영해교조신원운동, 조직의 재건과 의례의 정립, 사적과 경전 간행 경위, 동경대전의 편찬 등 동학 창도부터 1880년까지의 초기 동학의 20년간 역사가 정리되었다.
강시원은 ‘후기(後記)’에서 이 책의 편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이 빨라서 기묘(己卯, 1879)년 가을에 이르러 나와 주인(해월을 가리킴)이 선생(수운을 가리킴)의 도원(道源)을 잇고자 하는 뜻이 있어, 이에 선생의 일과 자취를 수단(修單)한 즉, 두미(頭尾)가 착잡하고 전후(前後)가 문란하여 쓰되 능히 붓을 범하지 못하여 혹 잘못할 단초가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먼 것을 궁구하여 잇고자 하였으나, 이치가 기연(其然)에 가깝지 아니하고, 근원을 탐색하여 근본됨을 캐고자 하였으나 불연(不然)에 같이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기연(其然)을 알아 기록하고자 하였으나 그 본체를 알지 못하고, 불연(不然)을 믿고 쓰고자 하였으나 또 그 끝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도로써 이를 말하려했으나 이치가 모연하여 측량할 수 없고, 덕으로써 이를 논(論)하려 하였으나 실로 빛에 밝음이 있었습니다.


강시원은 1879년 가을에 해월과 자신이 수운의 행적을 정리하고자 하는 뜻을 내어서 <도원기서> 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20년 전의 기록이 가물가물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료를 수집하고 해월에게 문의하여 수운의 행적과 초기 해월의 활동에 대한 대강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도원기서>의 편찬에는 특히 강시원, 유시헌, 심시정의 역할이 컸다. 


08-3

유시헌의 증손 돈생씨가 소장하고 있는 <도원기서> 복사본. 안타깝게도 원본은 김연국에게 주고 뒤에 도원기서가 자신의 집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사본을 복사해서 소유하고 있었다.


<도원기서> 백년만에 세상에 알려져


그러나 <도원기서>는 편찬과 동시에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는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권병덕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권병덕은 1922년 9월에 발간된 <천도교회월보>(제144호)에 게재된 「천도교실사집편(天道敎實事集編)」이란 글의 서문에서 당시의 사적 편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묘(己卯, 1879년) 십일월 십일에 해월신사(海月神師)가 대신사(大神師)의 유적편집소(遺蹟編輯所)를 강원도 정선군(旌善郡) 방시학(房時學)의 집에 설(設)하사 성편(成編)이 다됨에 미쳐 굳게 봉하야 동군(同郡) 유시헌(劉時憲)에게 맡겨두시고 비밀이 부탁하야 가라사대 이책은 사람의 눈에 경계히 보임이 같지 않다 하얏던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해월은 <도원기서>를 굳게 봉한 후 날인하여 정선군 유시헌에게 맡기면서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동학이 조정의 탄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수운의 행적 및 해월의 활동과 도인들의 이름들이 상세히 적혀있는 <도원기서>를 만약 관가에서 입수하면 큰 곤경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특히 영해교조신원운동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공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월은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이었던 도접주 유시헌에게 이를 맡겼다.


이렇게 봉인되었던 <도원기서>는 저술된 지 100년만인 1978년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충남 논산의 김덕경씨가 비장하고 있던 <도원기서>가 ‘중앙일보’에 공개되었다. 유시헌이 갖고 있던 <도원기서>는 1906년경에 일부 알려졌다. 이 책을 바탕으로 천도교단에서는 오상준이 <본교역사>를 집필하는 데 참고하였고, 시천교에서 사본을 만들어 <시천교종역사>를 저술하였다. 1918년 유시헌의 아들 유택하로부터 원본을 가져가서 김연국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아들인 김덕경(당시 72세, 천진교 대종사)이 소장하고 있다가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김덕경은 자신의 부친인 김연국이 1898년 해월로부터 <도원기서>를 직접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해월의 <도원기서> 저술은 동학의 초기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용하 교수는 이 책을 ‘지금까지 구전에 의존했던 초창기의 동학 성립과정이 밝혀질 한국근세사상사의 획기적 자료’라고 평가하였고, 최동희 교수는 ‘동경대전 초간본의 발간 경위와 해월의 비밀 활동 기록이 공개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라고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 책을 번역해 출간한 윤석산 교수는 ‘동학의 어느 기록보다도 생생한 기록들’이라고 하여 초기 동학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도원기서>의 편찬을 통해 해월의 역사적 안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