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바다까지 생산되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시장에서 유통된다. 물건이 있으며 사람이 모인다. 그 물건과 사람에 따라 길이 생긴다. 그래서 모든 길은 장터로 연결된다. 장터는 물물교환의 장소, 먹거리의 장소, 정보의 총집결지, 일상의 탈출구, 문명의 보급소, 정보의 공유와 소통 등등 다양한 기능을 하였던 생생한 삶의 터전이었다. 언양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영남알프스의 길은 언양장으로 연결된다.


언양시장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양은 부산에서 양산을 거쳐 경주로 이르는 신라길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언양은 부산 동래, 양산, 울산, 밀양, 청도, 영천, 경주 등으로 연결된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그만큼 시장도 활성화되었다. 그래서 언양시장을 7 읍장이라 했다. 장날이면 인근 주민들은 8~20km씩 잿길 넘어 보따리에 지게에 농산물이나 짚공예품, 옹기, 소금, 땔감 나무, 숯, 생선, 쌀 등등을 이고 지고 또는 소달구지에 싣고 언양시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영남알프스의 모든 길은 언양시장으로 연결되어있다. 현재 언양은 울산시에 포함되어 있지만 1914년까지 언양군으로 울산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규모가 있었던 독립적인 지역이었다. 최근 KTX 울산역과 영남알프스 산악관광 활성화를 계기로 새로운 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언양장의 역사는 기록보다 오래되었다.


언양시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헌산지>(1757, 영조 33년)를 보면, “장시(場市)는 읍내장(邑內場)이 매월 2일, 7일 여섯 차례 열린다. 유목정장(柳木亭場)은 매월 4일, 9일 열렸는데 합쳐졌다.”로 되어있다. <동국문헌비고>(1770, 영조 46년), <경상도읍지>(1832, 순조 32년), <영남읍지>(1871, 고종 8년), <영지요선>(1876, 고종 13년), <언양현읍지>(1880, 고종 17년)에 이르기까지 읍내장은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고, 유목정장은 몇 군데 빠져있다. 이로 보면 언양의 5일장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대한제국 말의 탁지부사세국(度支部司稅局)의 <한국각부군시장상황조사서(韓國各府郡市場狀況調査書)>(1909년 9월)에 따르면, 언양시장은 남부장으로 개칭하고 언양읍 동부리에 소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9월 조선총독부 총령 제136호 ‘시장규칙’에 의거 언양시장은 정기, 매일시장인 ‘제1호 시장’으로 1915년 12월 5일 설립되고 2, 7일 장이 서게 되었다. 하지만 1919년에 편찬된 <언양읍지>에 따르면, 읍내장의 내시(內市, 안장)는 매월 세 차례 7일에, 외시(外市, 바깥장, 배끄장)는 매월 세 차례 2일에, 그리고 신시(新市, 새장)는 4, 9일에 여섯 차례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들 가운데 내시와 외시는 예전부터 있었고, 신시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겨난 시장으로 보인다. 유목정장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신시는 유목정장의 장날을 계승하고 있다. 아무튼 1919년 당시 언양에는 세 개의 장터가 공존했었다. 이렇게 큰 시장이 있었기에 언양삼일만세운동이 있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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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골목은 할매들의 생계터전이자 놀이터이다.>


안장과 바깥장은 분리된 듯하지만, 연결된 골목 장터였다


안장터는 현재의 도로명 주소인 ‘옛장터1길과 3길’ 주변이다. 남문 사거리(김약국)에서 동문길 사거리(임약국)까지는 고사리, 더덕, 마늘, 채소 등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현재 SS모텔 주변지역(구, 안나유치원)은 생선을 파는 어물전이 있었다. 당시 내륙지역에서 생선은 인기품목이었다. 안장터 건너 도로 김약국 뒤쪽에 언양 차부(버스터미널)가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까지 있어 안장은 언양의 중심지로 장날이면 난장이 벌어졌다.


바깥장터는 현재의 남천교사거리에서 동서 양쪽 방천리와 남부1리의 남천 언저리를 따라 있었다. 바깥장의 지번인 남부리 340-1번지를 보면 마치 실핏줄처럼 연결된 골목길을 볼 수 있다. 생업을 위해 나온 장돌뱅이나 인근 마을 주민 노점상들이 골목 장터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골목 장터 길은 인근 마을에서 생산된 물건을 파는 사회적 약자들의 생계 터였다. 마을 할매 장터가 그러한 곳이다. 바깥장은 보부상이 찾아오는 다양한 물건의 거래 공간이었다. 닭전, 솥전, 자리전, 포목전, 나무전, 옹기전, 쇠전(우시장)이 함께 섰다. 옛장터3길의 소공원지역(구, 언양보건소)이 닭전이었고 그 맞은편에 언양의 특산물인 무쇠 솥을 파는 솥전이었다. 그 아랫길 따라 남천까지 돗자리를 파는 자리전이 있었다.


방천리와 건너편 물문걸에 목물전이 있었다. 목물전은 제상, 병풍, 목기 등의 목물(木物)과 제사용 그릇인 제기(祭器), 그리고 돗자리 등을 팔았다. 물문걸은 물문(수문) 입구라 대장간이 있었지 싶다. 대장간에서 만든 쇠솥을 팔고, 그 쇠솥을 길들이는 데는 참기름이 필요했다. 또 그 가마솥에는 쇠고기를 삶아 곰탕을 팔고 그 연료는 숯을 사용했을 것이다. 국밥의 간을 맞추기 위해 울산 소금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언양은 쇠솥과 숯, 참기름, 국밥, 소고기, 울산소금이 서로 연결된 장터이기도 했다. 남천길 따라서 포목전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나무전, 마지막에 옹기전이 연이어 있었다. 옹기전의 옹기는 장이 파한 후에도 그대로 두어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옹기를 깨거나 가져가면 평생 재수 없다는 속설이 전해왔기 때문이다. 현재 솥전의 흔적은 문물걸에서, 옹기전의 흔적은 시장 남문 입구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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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은 늘 새로 확장되어 언양장을 만들었다 


기록에 있는 언양 신시(새장)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시장으로 음력 4, 9일 장이었다. 1927년 6월 남천 호안공사가 완료되어 남천 둑길을 따라 시장 공간은 넓어졌다. 언양의 남천 둑길을 따라 방천리에서 남부리, 그리고 현재의 언양터미널 사거리까지 확장된 듯하다. 1930년 중반 이후 언양시장은 도로규칙을 무시한 복잡한 통행 도로변을 이용하였다. 물산이 대대적으로 집합될 때는 1년을 두고 수차례 부분적으로 이리저리 함부로 옮기게 되므로 언양 시내의 골목골목은 시장화가 되었다. 노점상은 불편을 안 느꼈지만, 일반주민은 공설시장터를 요망하였다(동아일보,1938.9.23.). 읍내는 시골 아낙들의 보따리에 따라 골목골목이 시장화하여 장날이면 난장 그 자체였다.


시장이 읍내 한 가운데에 있어 공설시장의 논의는 1935년부터 40년까지 지역적 경제적 위생상 등의 이유로 남천 제방 주변과 서부리와 남부리 일부로 확장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지속되었다. 한때는 지금의 터미널 근처의 산업조합터로 옮기자는 의견에 주민들 간의 마찰이 있기도 했다. 이 와중에 1939년 6월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자 언양면 당국은 한발 대책을 마련하다가 시장을 남천 변으로 이전하면 비가 내린다며, 1939년 6월 27일부터 시장을 옮기고 다음 날 기우제를 지냈다. 이러저러한 결과, 언양시장은 남부1리의 여러 골목과 물문걸에서 방천리 쪽 도로변, 그리고 남부2리 남천 제방에서 경주 쪽 언양터미널 사거리까지 장터가 형성되었다.


작은 기억이 마을의 역사를 만든다


한 사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은 작은 역사를 만들고, 그 작은 기억의 역사가 모여 한 지역의 역사를 만든다. 지금 시장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는 장터할매 소머리국밥집 창원댁, 그릇전 박영자 할매, 쌀전의 자매 할매, 매일대장간의 박병오 할배, 울산에서 제일 오래된 하나서점의 김충열 할배 등등이 그들이다. 그 기억이 모여 언양시장의 역사를 기록한다. 하지만 기억은 다르고 희미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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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트를 설치한 언양매일시장>



언양 주민의 애환이 담긴 언양시장터


현재 과거의 내시와 외시 장터는 모두 건물이 들어서서 장터의 흔적은 없고 이제 골목길만 남아있다. 골목길은 평소에는 길이었다가 때가 되면 장터가 되는 상점과 노점 사이의 배려 공간이었다. 특히 언양 성당이 소유하고 있던 570여 평의 안장은 위생 문제 등으로 1954년 폐쇄되고 빈터가 되었다. 언양면에서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위해 1955년 지금의 언양종합상가 위쪽의 미나리꽝과 저습지(남부리 124, 137, 139번지) 일대를 매립하게 된다. 지금의 롯데리아에서 하나로마트, 종합상가 일부 지역까지 남천의 돌과 자갈로 매축하였다. 당시 언양면사무소에서 주민에게 돌덩이 수나 짐바리 수를 집마다 의무적으로 정하여 어린이들까지 동원되어 매립하여, 언양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매축된 그 땅에 기둥과 양철지붕을 세웠다. 신시로 어물전이 옮겨오기도 했다. 결국, 1955년 10월 2일부터 지금의 시장을 중심으로 장이 서기 시작하였고, 장날도 음력에서 양력 2, 7일 장으로 바뀌었다. 물론 안장에도 매일장의 역할을 하고, 새 시장은 5일장으로 기능이 더 강화되었다. 그때 어물전은 옮겨지고, 우시장(쇠전)은 현재의 상가아파트(동수참기름 고추방앗간) 자리에 있었다. 도로 건너 맞은편 우리마트 아래쪽에 1960년대까지 도살장이 있었다. 그 후 언양의 우시장은 남부리에 있다가 1979년 어음리 500-15번지(현, 언양 파출소)로, 2002년 삼남면 교동에 옮겨졌다가 울산 KTX 역사가 생기면서, 2012년 상북면 지내리로 언양가축시장을 옮겼다.


언양시장은 사람과 물건이 만나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1969년 언양시장은 5천여 평의 대지에 죽세공점포 10여개를 비롯하여 의류 잡화상 194개, 농기구상 20개 등이 상설되어있었다. 그리고 장날이면 5백여 노점상, 평균 2백 마리의 축우가 출두하는 우시장, 50여 톤이 출하 거래되는 청과상들이 운집하여 크게 혼잡을 이루었다. 특히 1만여 개의 도기(옹기)가 항시 쌓여있는 도기점은 시장의 명물이었다. 장날이면 하루 3만여 명이 드나드는 큰 시장이었다. 그리고 언양시장에 모인 짚공예품인 광주리, 소쿠리 등은 하루 3트럭분인 6천여 개씩 수집되어 수출되기도 했다 (매일경제, 1969.11.01.). 농한기 부업으로 방천마을 공동작업장에서는 싸리 바구니를 만들어 연간 10만 달러를 수출하였다.


과거의 안장터에 1974년 언양 성당에서 안나 유치원과 3층의 매일상설시장 건물을 지어 명맥을 유지했지만, 2013년 철거하고 지금은 모텔이 들어서고 주변의 골목시장도 사라졌다. 1974년 전후로 매립지역에 새로운 상가가 들어서면서 그곳에서 장사를 하던 분들이 지금의 남천 둑길 공설시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시장은 나무 칸막이 위로 천막을 지붕에 얹은 장옥 형태로 오늘까지 운영되고 있다. 장옥은 오늘날 5일장의 중심이 되었으나, 하천부지이기에 장터 국밥집을 경계로 하여 도로확장 공사를 하면 기존의 장옥이 철거될 위기에 있다. 아무튼 1980년 언양초 앞 언양차부와 돌가리마당 근처 울주군 버스주차장이 지금의 언양시외버스터미널로 전부 옮기면서 자연스레 언양시장의 상권은 이동되어 시장은 지금과 같은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그 후 1984년 종합상가건물의 신축과 함께 주변의 언양매일시장 상가가 들어서면서 시장은 매일장이 되었다. 남부리의 안장과 바깥장은 점차 주택지로 변했고, 남천 둑길과 매일장 골목길은 5일장을 형성하였다.
세상이 변하듯 시장도 변해야 한다.


언양시장은 1980년대 초반까지 번영을 누렸지만, 인근에 메가마트 등 대형마트의 등장과 유통구조의 변화 그리고 소비 패턴의 변화로 2010년까지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최근 시장의 활기가 되살아나면서 2014년에는 이름을 ‘언양알프스시장’으로 바꾸고, ‘찾고 싶고 오래 머물고 싶고 다시 방문하고 싶은 시장’을 목표로 과거의 명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2014년 한국 관광의 별’ 후보지로 선정되는 등 다양한 먹거리,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있는 전통시장이다. 1980년부터 있었던 남천 둔치 주차장을 2017년 4월에는 186억 원을 들여 남천 천변에 총 632면의 주차공간을 만들어 주차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제 언양시장은 깔끔한 거리와 지붕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언제든지 즐겁게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5일장과 매일 시장, 상가형 시장까지 다양다종한 복합적인 형태의 시장이 되었다. 길을 걷다 보면 벽화거리도 만날 수 있다. 최근 토요장터, 할매장터, 어린이 벼룩시장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여 시장의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농기구를 제작 수리하는 언양매일대장간과 수제로 만들어 파는 어묵공장,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의 손맛을 자랑하는 쇠고기 국밥, 그리고 시장 거리를 고소한 냄새로 가득 채우는 참기름 집, 수십 년을 한결같이 자리하는 칼국수집, 반찬가게 등등은 언제나 문을 열고 손님을 마중하고 있다. 매일 혹은 5일마다 만나는 시장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으로 시장길은 언제나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매력을 듬뿍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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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장날의 여러 모습>



언양시장은 언양의 별이다


언양알프스시장은 인근의 언양읍성,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 작천정, 그리고 신불산과 가지산을 비롯한 영남알프스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볼거리, 먹거리, 이야깃거리, 살거리의 중심이 되기 위해 많은 상인이 노력하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사람 살아가는 인정이 가득한 곳이다. 장터에는 삼삼오오 모여 장사를 하는지 세월을 보내는지 사람 만나는 재미로 있는지 허리굽은 할매들이 모여든다. 많게는 50여년 동안 시장을 지킨 사람들, 그들의 기억도 세월이 지남에 흐릿하지만, 장터 이야기만 하면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언양 알프스 시장은 흑백 사진 같기도 하지만 이제 스마트한 동영상이기도 하다. “오이소, 보이소. 즐기소, 먹으소, 사이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병길 시민기자.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