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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봉촌리에 있는 전성촌 해월의 집터. 사진 가운데 보이는 감나무 뒤쪽에 해월의 집이 있었다. 해월은 이곳에서 보따리 하나만 들고 시도 때도 없이 다닌다고 해서 ‘최보따리’라고 불렸다. >


수운탄신제에 각포(各包) 두령(頭領) 82명 참가


1884년의 가섭암 기도를 통해 해월은 강서를 받는 깊은 종교적 수행을 했다. 그러면서도 해월은 지속적인 탄압 속에서도 확산되는 교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육임제를 만들고  새로운 주문을 사용했다. 해월에게 있어서 가섭암 기도가 더욱 의미 있었던 이유는 뒷날 동학교단을 이끌었던 손병희와 박인호를 직접 단련시켰다는 점이다. 기존에 강수와 유시헌이 중심이었던 교단 지도부에 손병희 등 재주 있는 청년들이 가세하자 교단은 활기를 띠게 됐다. 이들은 특히 충청도에서의 교세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10월 28일 해월은 자신이 기거했던 단양의 장정리로 가서 수운의 탄신제례를 지냈다. 이때 각포(各包)의 두령 82명을 위시해 많은 도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깊은 산중인 단양 장정리는 일시에 수천 명의 동학도들로 뒤덮였다. 해월은 스승인 수운의 탄신제례에 정성을 다했다. 제례에 참석하는 제자들은 모두 목욕재계를 시키고 새로 빨래한 옷을 입게 했다. 그리고 의식에는 법복(法服)과 법관(法冠)을 갖추어 입도록 했다. 제물도 정성을 다해 마련했는데 삼색비단을 각각 3자 3치씩 놓고 밥과 떡을 만들 쌀은 일곱 번 찧어 정미했다. 과일과 채소도 한 말들이 그릇에 담도록 했고 싸라기들은 모두 골라냈다. 음식을 지을 때 쓰는 땔감도 말라죽은 것과 썩은 나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제례의 의식은 초학주문(初學呪文)과 강령주문(降靈呪文), 본주문(本呪文)을 각각 세 번씩 읽은 후 축문(祝文)을 지어 읽었다. 이렇게 동학의 의식에서 주문을 세 번 읽는 것은 현재 천도교 의식의 ‘주문3회 병송’으로 이어지고 있다. 축문은 <동경대전>에서 수운이 사용한 것을 응용했다. 축문 중에 ‘갑자년(甲子年) 봄에 참변을 당하니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1864년 대구에서의 수운의 억울한 참형을 의미한다. 해월은 각종 의식에서 수운의 억울한 참변을 해소시켜야 한다고 강조했고 동학도들은 이런 해월의 뜻을 마음에 새겼다.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은 이러한 오랜 시간의 동학도들의 염원이 행동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전성촌으로 가서 가족과 상봉


수운의 탄신제를 마친 해월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봉촌리 전성촌(前城村, 앞재)에 있는 가족을 찾아 나섰다. 전성촌으로 해월의 가족을 이주시킨 이는 박치경이었다. 박치경은 단양 장정리가 지목을 받자 해월을 일단 익산 사자암으로 피신시킨 후 인적이 드문 전성촌에 세 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해 해월의 가족을 이주시켰다. 전성촌은 상주시에서 서쪽으로 약 30㎞, 충청도 보은에서 동쪽으로 약 30㎞에 있는 마을로 외진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원통저수지가 있으며 마을 뒤에는 해발 597m의 원통봉(圓通峰)이 있다. 전성촌(前城村)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마을 입구에 성(城)이 있다고 한 데서 붙여졌다. 표염삼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성터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1980년에 와서 허물어져 거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게 됐다고 한다. 해월의 집은 원통봉 바로 아래 있었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지만 감나무가 있어 그나마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해월은 전성촌에 머물면서 충청도 청주와 진천 지역을 순회하며 도인들을 지도하는 데 힘썼다. 전성촌에 있으면서 청주 지역으로 포덕을 나갔다가 겪었던 유명한 일화가 ‘천주직포(天主織布)’, 풀이하면 ‘베 짜는 한울님’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청주(淸州)를 지나다가 서택순(徐?淳)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徐君)에게 묻기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하니,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道人)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降臨)하셨다 말하라.(<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해월은 충청북도 진천(鎭川)의 금성동(金城洞)으로 포덕을 하고 돌아오다 청주 북이면 금암리에 있는 서택순의 집에 들렀다. 해월이 마당에 들어서자 안방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밥을 먹고 나서도 베 짜는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해월은 서택순에게 베를 짜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서택순은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다고 하자 해월은 웃으면서 “그대의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게 진정으로 그대의 며느리인가?”하고 다시 물었다. 서택순은 해월이 말을 하는 의미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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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풍속화 ‘길쌈’. 해월은 서택순의 집에서 베를 짜는 며느리를 한울님이라고 했다. 일을 하는 여성을 귀하게 여기는 해월의 생각은 이후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에 고스라니 담겨있다. ‘일하는 한울님’은 노동의 신성성을 강조한 해월의 대표적인 가르침이다. 해월의 일하는 한울님은 우리 시대 노동에 대한 인식을 돌아보게 한다.  >


베를 짜는 며느리가 한울님


동행했던 제자들이 서택순의 집을 나선 후에 베 짜는 며느리에 대해 물어오자 해월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우리는 밥을 먹는데 끼니도 거르고 물레질을 하는 며느리도 가족인데 같이 밥을 먹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자신의 며느리를 한울님으로 대하면 끼니를 거르고 일을 하도록 놔두겠느냐고 반문했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셨는데 며느리도 한울님을 모신 사람으로 대해야 도를 바르게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월에게는 서택순의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가 마치 한울님이 베를 짜는 소리로 들려왔다. 해월에게는 베를 짜는 며느리가 ‘일하는 한울님’으로 보였다. 이러한 해월의 일하는 한울님은 노동의 의미를 재해석한 것이었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고 노동은 피지배층인 농공상인과 노비들만 하는 천한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쉼 없이 노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해월은 노동의 신성성을 부여했다. 해월 자신이 노동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노동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해월은 노동은 삶을 영위하는 생명의 창조적 행위라고 보았다. 베를 짜는 며느리를 한울님으로 잘 대접하는 것이 도를 바르게 실행하는 것이라고 해월은 강조했다. 


서택순은 손병희를 동학에 입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충청도 청원의 동학접주 서우순의 젊을 때 이름이다. 그는 1849년 10월 3일 청안군 원서면 금곡리(현 증평군 도안면)에서 태어나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자랐다. 부친 민보(民輔)와 모친 덕수 이씨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자는 석여(錫汝)이고 도호는 영암(泳菴)이다.
1884년 손천민의 포덕으로 동학에 입도해 손천민, 서장옥과 함께 속리산 상고사(上庫寺)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하는 등 수련과 포덕에 힘썼다. 접주가 된 이후에는 북이면 일대에 주문 소리가 널리 퍼졌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활동했다. 1891년에는 해월이 금암리 그의 집에 피신해 한동안 지냈다. 서우순은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집강으로 참여해 청주성에서 관군에게 체포돼 3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1898년 출소한 이후에도 육임의 교수(敎授)와 성도사(誠道師) 등 교단의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1915년 66세로 사망했는데 당시 교조 손병희가 만사(輓詞)를 지어주고 장례비를 지원할 정도로 교단의 주요 인물이었다. 서우순이 활동하던 청주의 금암리는 바로 손병희가 태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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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사(誠道師) 서우순(徐虞淳)의 사진. 1914년 9월 15일 발행된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 제50호에 실린 사진으로 사망하기 1년 전인 65세 때의 모습이다. 해월은 청주 서택순의 집에서 ‘베 짜는 며느리가 한울님이다’라는 일화를 남겼는데 서택순의 다른 이름이 서우순이다. 서택순은 해월의 지도를 잘 익혀 이후 천도교의 가장 높은 정신적 지도자인 성도사(誠道師)에 올랐다. >


최보따리 아저씨  


해월은 상주 전성촌에 이사했어도 늘 밖으로 다니며 동학의 교세 확장에 매진했다. 전성촌 사람들은 해월이 늘 보따리 하나만 메고 마을을 들락거리자 해월을 가리켜 ‘최보따리’라고 불렀다. <천도교창건사>에는 최보따리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신사(神師)가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니 그때 세상 사람들이 신사를 칭하여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지었으며, 또 신사가 길을 떠날 때에는 반드시 봇짐을 두 번 싸는 습관이 있으니 그는 만사에 자세(仔細)하심이며, 그리고 봇짐 위에는 반드시 짚신 한 켤레가 있고 봇짐 안에는 반드시 점심(點心)이 있으니 이는 항상 위난(危難)에 쫓기는 몸이라 불시의 염려를 준비함이며, 어느 제자의 집에 가든지 주문(呪文)을 외우는 습관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낮잠을 자거나 또는 빈손으로 무료하게 있는 법이 없고 반드시 짚신을 삼으며 또는 노끈을 꼬거나 만약 노끈을 꼬다가 일감이 다하고 보면 꼬았던 노끈을 다시 풀어서 꼬았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면 말하기를 “사람이 그저 놀고 있으면 한울님이 싫어 하시나니라.”할 뿐이었다. 한 달 혹은 석 달이 멀다하고 이사를 하시되 새로 들어간 집에 가서는 반드시 나무를 심고 겨울이면 멍석을 내였었다. 가족과 제자들이 “내일이라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터인데 그것은 하여 무엇 하겠습니까?”하고 물으면 신사 대답하되 “이 집에 오는 사람이 과실을 먹고 이 물건을 쓴들 무슨 안 될 일이 있겠느냐. 만약 세상 사람이 다 나와 같으면 이사 다닐 때에 가구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느니라.” 하시었다. 


마을 사람들은 해월이 최씨인 것은 알았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보따리를 매고 시도 때도 없이 마을을 들락거리니까 마을사람들은 해월을 ‘최보따리’라고 불렀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싼 봇짐에 짚신을 하나 걸고 해월은 분주하게 마을을 드나들었다. 해월에게 보따리는 언제라도 숨어들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사람이 한울님으로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보따리 하나 메고 전국을 돌아다녔던 성자(聖子)가 해월이었다.


나도 한울님, 너도 한울님


집에 있을 때면 해월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제자들이 쉬라고 해면 한울님이 쉬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쉬겠느냐고 하면서 짚신을 삼고 노끈을 꼬았다. 노끈을 다 꼬고 나서 일이 없으면 다시 풀어서 꼬았다. 그리고 새 집으로 이사를 하면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늘 과일나무를 심고 채소밭을 일구었다. 가족과 제자들이 먹지도 못할 것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 새 주인이 와서 내가 심어놓은 과일과 채소를 먹으면 자신이 먹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하였다. 나도 한울님이고 너도 한울님인데 다 한울님이 먹는다고 답했다.  


해월은 동학의 교리를 이렇게 일상에 녹아들게 만들었다. 한울님을 높고 멀리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바르게 아는 것이 올바른 도이며 한울님이 쉬지 않기에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용행사가 도라고 했다. 위기에 처한 삶속에서도 과일나무를 심고 텃밭을 가꾸고 쉼 없이 일하는 해월의 모습은 일상을 도학의 경지로 승격시켰다. 자신이 아닌 모두가 같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광제창생의 구현을 해월은 몸소 실천했다. 김지하는 이러한 해월의 모습과 동학에서 ‘인간의 사회적 성화(聖化)’를 발견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