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부터 1953년까지 신불산을 비롯한 영남알프스는 빨치산의 해방구였다. 영남알프스 고산 준봉은 나무뿌리가 뻗어 나가듯 다른 곳으로 연이어져있다. 배내봉에서 동쪽으로는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오룡산으로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 한 갈래는 능동산을 따라 천황산과 재약산으로 또 한 갈래는 능동산, 중봉, 가지산, 억산, 운문산 그리고 고헌산으로 빙 둘러있다. 지리적으로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울산광역시가 연결되어 있다. 도시로는 울산시, 양산시, 밀양시, 청도군, 경주시가 서로 밀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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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산고지 공비지휘소 자리에 있는 전망대는 영남알프스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영남알프스는 해방구였다


영남알프스는 소도의 산이었다. 봉건왕조 때도, 일제 강점 때에도, 해방 전후의 시기에도 권력자는 없었다. 생존의 산이었다. 정치적 억압이나 종교적 억압을 피해서 민중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곳에서 만들었다. 그리고 저항의 산이었다.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대해 농민과 천민의 저항 불꽃이 운문산과 신불산에 있었다. 청도 운문의 김사민과 울산 초전의 효심은 무려 10년 동안 영남알프스에 은거하며 ‘운문적’이 되어 저항하였다. 그들은 영남알프스 빨치산의 원조였다. 그때 영남알프스는 빨치산의 해방구였다.


영남알프스는 산을 타고 넘어 다른 지역으로 노출되지 않고 산악 유격전을 벌일 수 있는 곳이다. 배내골 주변은 천연의 요새였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전투상황을 알아보니 이천(배내)보다 더 험한 데가 없고, 만일 반란군이 배내골 지역을 먼저 차지했다면 비록 1만 명의 군대가 있었더라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영축산 정상 인근에 있는 단조성을 두고 명나라 장수는 “조선에는 성이 많지만, 이 성을 빼앗겨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고 하였다.


영남알프스는 한국전쟁의 포화를 직접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해방 이후부터 1953년도까지 빨치산의 해방구였다. 이렇게 빨치산이 모여든 곳은 영남알프스가 가진 지형적 특징 때문이었다. 1천 미터 넘는 산들이 줄지어 있고 주변에는 빨치산들이 이용하기에 숨을 곳도 많았고 또한 식량도 구할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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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에 전시된 당시 참전한 학도병의 모습>


배내골 681고지는 빨치산의 지휘소였다.


배내골 지역은 신구빨치산이 활동하는 지역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내려온 남도부 부대가 오고 나서부터 빨치산의 해방구가 되었다. 하지만 빨치산과 토벌대, 양민의 처절한 삶의 공간이기도 했다.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남도부가 지휘소로 자리 잡은 곳은 배내골이 한눈에 보이는 681고지였다.


681고지는 베네치아 산장 뒤로 난 길로 오른다. 채 5분도 되지 않은 곳에 커다란 바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배내골을 관측하기 제일의 장소이다. 그리 높지 않은 데 울산-밀양고속도로 공사 현장이, 멀리 원동과 언양 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배내골은 길이 한 방향 외길이라 양쪽을 장악하면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적을 소탕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혜의 고지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산을 30여 분 오르면 평지 지역이 나타난다. 이곳이 남도부 부대의 숙영지이자 지휘소였다. 주변에는 수령 2백 년이 됨직한 소나무가 몇 남아있다. 둘레 200여 미터에는 긴 참호가 패 있다. 그리고 군데군데 낙엽으로 덮인 큰 웅덩이 같은 곳이 있다. 숙영지로 추정된다. 아직도 이곳에서는 당시의 흔적인 잉크병, 탄환, 옹기, 그릇 등이 발견된다. 위로 좀 더 올라가면 갈산고지로 알려진 681고지, 그리고 더 위쪽에는 995고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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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 숙영지 주변에는 옹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었다.>


681고지에서 바라보면 동서남북 모든 것이 열려 적들의 움직임을 쉽게 관찰할 수 있고, 또한 도주하기 좋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쉬운 곳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인근의 파래소 폭포는 취사소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남도부는 681고지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각 중대가 방어하도록 했다. 1중대는 동남쪽인 백련천 골짜기와 남쪽 배내천 본류를, 2중대는 고지 정상에 중화기를 설치하고 특히 신불산 방향을, 3중대는 영축산 서쪽 능선에서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도록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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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산고지에서 바라본 신불산 일원>


신불산 빨치산의 숙영지였던 681고지 표지석에는 울산지방 출신 빨치산 홍길동 부대가 더 알려진 듯 홍길동 부대의 지휘소라 새겨져 있었다. 남도부 하준수는 실상 그가 체포되기 전까지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닌듯하다. 심지어 백선엽이 52년 2월 신불산 토벌작전을 벌일 때에도 그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리산 남부군의 이현상과 달리 그는 익명의 존재였지만 영남알프스에서 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해여단 부사령관 하준수와 공비 토벌대 김종원 만나다


하준수(1921~1955)는 경남 함양 출신으로, 일제의 학병징집에 반대해 일본에서 귀국했다. 그 뒤 지리산의 괘관산에 입산해 보광당을 만들어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당시의 경험을 해방 후 잡지에 발표하였다. 해방 이후 큰 정치적 목표는 친일잔재 청산을 통한 민족의 완전한 해방과 남북통일정부의 수립이었다. 하지만 1945년 이후 전개된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이를 목격한 하준수는 민족주의자에서 서서히 공산주의자로 변해 갔다. 해방 이후 건준위 활동을 하고, 잠시 이승만의 경호실장을 하였다. 하지만 친일 경찰의 재등장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목격한 그는 다시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48년 남한 정부 수립 이후 월북하여 소군정으로부터 레닌 훈장과 영웅칭호를 받고, 인민군 소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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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부 하준수(동아일보.1954.10.16.)>


하준수는 남한 출신 유격대원을 양성하는 강동정치학원 교관을 거쳐 1949년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동해여단) 부사령관으로 월남하여 일원산, 내연산, 보현산 등을 거점으로 동해안 일대에서 무장 유격 활동을 한다. 사령관은 강동정치학원 출신으로 제주4.3사건 당시 제주도 남로당 군사부장으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던 김달삼(1923~1950)이었다. 하지만 1950년 3월 국군 3사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령관 김달삼은 강원도 정선군 여랑면 반론산 근처에서 교전 중 죽는다. 그곳 지명이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다. 민족의 비극, 전쟁의 잔혹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명이다. 당시 제3병단의 동해안 침투가 실패한 원인은 박헌영과 이승엽 종파분자 일당에 스며든 남한 치안국 분실장 백형복과 전남로당 경북도당책 배철이 제3병단의 침투로를 무선으로 밀고 했기 때문이라고 북한은 주장하고 있다. 당시 10여 회 침투했는데, 3천여 명이 사살되었다. 하준수는 남은 60여 명을 데리고 다시 월북한다.


제3병단이 활동한 경북 영덕지역에 당시 영남지역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국군3사단 23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연대장은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로 악명 높은 김종원이었다. 김종원은 빨치산 토벌을 하면서 자신을 ‘백두산 호랑이’로 자칭하고 자신의 부대를 맹호부대라고 칭했다. 1950년 3월 14일 영덕 중곡동에서 빨치산 내통자를 처벌하던 중 한 명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고 죽자, 분노한 김종원은 유치장에 갇혀 보고 있던 33명 가운데 31명을 직접 학살했다. 50년 2월 신불산 구빨치, 야산대를 토벌한 그는 양산 배내인 원동에서 사살한 공비 수십 명 목을 잘라 양산 군청 광장에 전시한 적이 있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 천황산을 비롯한 영남알프스 일대를 생명이 붙은 것은 동물뿐만 아니라 초목까지 태워버렸다. 50년 8월에는 양산지역 양민 700여 명을 경찰, 특무대 등과 관련하여 김종원이 학살했다고 한다. 당시 우는 아이에게 ‘김종원이 왔다’ 하면 울음을 그쳤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다. 하준수와 김종원은 어느 산골에서 우연히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20대 후반의 물불 안 가리는 시기였다.


한국전쟁 때 남도부 부대, 영덕.포항 전투에서 김종원을 다시 만나다
 
1950년 6월 하준수는  중장으로 승진되고,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한테 작전명 ‘남도부(南到釜)’라는 가명을 받게 된다. ‘남조선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300여 명의 유격대원과 함께 남파되었다. 남도부 부대는 1950년 6월 24일 속초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죽변, 울진을 거쳐 칠보산과 포항 구룡산에 큰 전투를 벌인다. 유격대는 영덕에서 안강지구를 향해 서남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남하하는 남도부 부대와 인민군 5사단을 막아선 것은 김종원의 3사단 23연대였다.


1950년 7월 1일 경북 영덕 칠보산 700고지에서 쌍방은 교전하였다. 23연대는 50명이 전사하고 700고지를 빼앗긴다. 김종원은 학살에는 능했을지 모르지만, 전투능력은 달랐던 모양이다.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남도부 부대는 이후에도 계속 23연대를 밀고 내려가 무려 4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영덕 전투를 치른다. 1950년 7월 15일 김종원은 영덕 전투 패배의 한풀이를 보도연맹에게 하였다. 영덕읍 화개리 뫼골에서 보도연맹원 160여 명을 학살한 것이다. 한 때 ‘김종원이 영덕에서 수천 명을 죽였다.’ 할 정도로 민간인의 피해가 많았다.


김종원은 탈환 공격의 실패 분풀이로 소대장과 사병을 즉결처분하여 결국 해임당한다. 8월엔 군국 3사단장도 교체된다. 하지만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는 이승만은 오히려 그를 진급 시겨 부산 헌병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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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원(좌)을 이순신에 비유한 이승만(우), 이 둘은 극렬한 반공주의자였다.


남도부 부대는 비학산, 운문산, 가지산을 거쳐 주계덤에 있다가 천황산을 거쳐 드디어 신불산에 거점을 두고 1950년 7월 중순부터 1953년까지 신불산 빨치산 시대를 연다. 남도부 부대는 부대원은 15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남도부 부대는 신불산에 근거지를 두고 유격대로서 8월의 기계.안강 전투와 포항 전투, 그리고 9월의 영덕 전투에 후방에서 작전을 했다. 북한군 766부대가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데 남도부 부대는 후방 공격을 담당했다. 남도부 부대는 포항역을 진입하여 영일 비행장을 습격 점령하고, 청도 터널과 형상강 폭파작전에 참여했다. 2010년에 제작된 영화 <포화 속으로>는 1950년 8월 11일 새벽, 학도병 71명이 북한군의 공격을 4시부터 11시간 반 동안 막아낸 포항여중 전투를 그리고 있다. 포항 전투는 한국군 학도의용단과 북한군 766부대의 전투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울산 상북중학교 교사 4명, 학생 76명이 참전하여 16명이 전사하였다. 1950년 8월 중순까지 벌어졌던 기계.안강전투는 국군 초급장교의 무덤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고, 동부전선에서 인민군의 8월 공세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실패한다. 하지만 1950년 7월에서 9월까지 3개월이 남도부 부대가 가장 유격대다운 유격 활동을 한 때였다.


신불산 빨치산의 유격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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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부 부대의 활동 지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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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부의 이동 경로>


남도부는 낙동강 전선이 고착된 가운데 남도부는 적의 한 가운데 신불산에 거점을 두고 정규 인민군의 공격에 맞추어 적 후방인 남쪽에서 공동보조를 맞추어 전투를 수행하는 유격 활동을 하였다. 남도부의 활동은 그의 재판 과정 신문 기사에 보인다. “군경 및 양민학살 2800여 명, 각종 무기탈취 800여 정, 동 실탄 20만 발, 민가 방화 700호, 군용열차 전복 28회, 군경 자동차 소각 670여 회(동아일보, 1954.10.07.)”가 신불산 빨치산의 유격활동이다. 하지만 신불산 지역에 고립된 이후의 성일기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 12월 토벌대 공격이 1년 만의 전투이고, 1952년의 1년은 전투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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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체포된 남도부 부대원 사진. 좌로부터 남도부, 홍영식(유응재), 홍만식(이원량), 지춘란, 문덕준(문일준). 동아일보 1954.10.14.>


전투에서 손실된 남도부에게 절실한 것은 병력 충원과 식량, 무기보급이었다. 식량은 양민에게, 무기는 경찰과 국군(미군)의 습격을 통해 획득할 수 있었으나, 병력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신불산 시기의 빨치산 활동은 소규모 활동으로 정규군과 연대하는 전투는 할 수 없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부대는 더욱 고립되어 신불산 아지트를 요새화하고 장기전인 빨치산 생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무기와 보급 투쟁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후방교란의 형태였다.


낙동강 오리 알 같은 신세가 된 남도부의 몇 번 북상 시도는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다시 노동당의 명령으로 다시 남하한다. 그런 가운데 내부적으로 지도부의 혼거와 중복 등으로 갈등을 빚기도 한다. 게다가 장기간의 보급투쟁으로 양민들도 점점 등을 돌리게 된다. 결국 외곽부대는 서서히 전투와 공비토벌로 전사하고 병사는 보충되지 않고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결국 남도부 주변에는 10여 명만 생존하는 가운데 1953년부터 하산한다.


양민의 고통은 증가하고…


신불산 빨치산의 투쟁은 배내골과 언양 주변 양민과 토벌대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울산에서 양민 200여 명, 경찰 146명의 희생이 있었다. 양민의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이야기하기도 싫소. 어릴 때지만 생생해! 빨갱이들이 와서, 소 새끼 내놔라. 먹을 것 내놔라. 간장 내놔라. 양식 강탈해서 상북으로 피난 갔지. 농사지은 물건 이고 나갔지. 못 가져간 것은 땅에 묻었고…. 소개령 때는 군인들이 집을 다 태웠제. 밤에는 인민공화국, 낮에는 대한민국. 암울한 시절이었어. 밤에 빨갱이가 내려와 공출고지서를 갖다 주고 공출해갔어. 통일되면 전부 돌려준다는 거였제. 하지만 전부 휴지 조각이 되었지. 낮과 밤마다 눈치 본다고 미칠 지경이었어. 밤에는 밥 달라고 빨갱이들이 왔고, 낮에는 밥해준 집이 어디냐고 경찰들이 와서 쑤시고 다녔어. 나중에 경찰 밥, 군인 밥, 빨갱이 밥 다 해줬어. 당시에 똑똑한 놈은 빨치산 되고, 못 배운 놈은 순경됐어. 근데 지방 빨갱이가 더 설쳤어, 이 지역을 잘 아는 악질이었제. 그래서 지 맘에 안 든 사람 집에 밤에 와서 불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극단적 이분법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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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산고지에서 만난 얼굴 모습의 소나무는 고난을 겪은 민족의 얼굴 같았다.>


681 갈산고지를 오르다가 사람 얼굴 소나무를 보았다. 길 방향에서는 멀쩡한 정상적인 나무가 측면에서는 다소 찡그린 듯한 얼굴로, 그러나 경사진 곳에서 바라보았을 땐 끔찍한 얼굴 형상이었다. 눈도 코도 입도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엇인가 호소하는 듯한 참상의 얼굴이었다. 공비토벌작전의 네이팜탄 탓인지 불에 탄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려운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역사적 자화상 같았다.


전쟁은 오로지 적과 아군만을 구분한다.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 이분법이 한반도를 지배한 지 70여 년이 지났다. 전쟁의 상처는 극단적인 배제의 논리를 주입했다. 아군이 아니면 적이다. 반공, 빨갱이가 오로지 정치적 선택의 기준이었다. 괄호 안과 밖뿐이었다, 중간의 중첩 부분인 비무장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적대적 의식이다. 한국전쟁은 청춘의 무덤이었고, 살아남은 자는 그때의 기억을 평생 간직했고, 그 후손은 그 기억에 세뇌되었다.


지난 이승만의 12년, 박정희의 18년, 전두환의 8년, 모두 38년의 독재.반공정권은 한국전쟁이 낳은 극단적 이분법적 사고를 우리에게 주입했고 그 결과 아직도 그 이념에 지배되어있는 사람이 많다. 87년 민주화 이후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승만이 낳은 친일 매국적 기회주의적 가치관과 박정희의 반공주의적 사고가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그 유령은 언제나 “니, 빨갱이지!”하고 손가락 총질을 하고 있다.


아직도 산에는 꽃이 피고 있다


이제 남북이 만나고 북미가 회담하는 역사적 순간에 살고 있다. 극단적 이분법의 장벽이 남과 북, 심지어 태평양 건너서도 변화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 변해야 한다. 물론 북한도 미국도 역시 그 양민들이 변해야 한다. 적과 아군 사이에 존재하는 선량한 시민들이 있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반도가 비무장화되는 평화의 시대를 갈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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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북중학교 교정에 있는 ‘한국전쟁 학도병 참전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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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몰학도 충혼탑에서 바라본 ‘포항지구전적비’와 포항시내>


정전협정문에는 협정 후 3개월 후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코리아 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65년이 지난 이제 겨우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는 시점에 있다. 참으로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극단적 이분법의 시대가 점점 희석해지고 남과 북이 좀 더 다양성이 풍부한 시대로 가기를 기대한다. 봄이 가고 있어도 아직 산에는 꽃이 피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병길 시민기자.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