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의 길을 더듬다(1)
포은 정몽주의 길을 더듬다(1)
  • 이병길 시민기자.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미표시
  • 승인 2018.07.1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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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기행

언양에서 빼어난 산수 절경이 두 곳이 있으니 남쪽은 작궤천과 작천정이요, 북쪽은 반구대와 집청정이다. 남작북구(南酌北龜)요, 남작북청(南酌北淸)이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고 하였으니, 이 두 곳에 인연을 맺은 사람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년)다. 포은은 언양에 유람이 아니라 이인임 등의 배명친원(排明親元) 외교정책을 반대하다 유배 온 것이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지만, 학자요 정치인이자 외교가로서, 왜구토벌에도 공이 있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반구대로 가는 포은의 옛길
반구대로 가는 포은의 옛길

포은은 왜 언양으로 왔을까?

형벌의 일종인 유배형(流配刑)은 죄인을 먼 지역으로 유폐시켜 종신토록 그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거주지를 제한하는 조치다. 귀양인 유배형은 고려의 귀향형(歸鄕刑)에서 유래했다. 고려의 귀향형은 ‘본관으로의 유배[流本貫]’를 의미한다. 고려시대의 향(鄕)은 내외향(內外鄕)을 비롯하여 조처향(祖妻鄕), 증조처향(曾祖妻鄕)까지 포괄했다.

정몽주는 영일(포항) 정씨요, 어머니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고 한 영천 이씨였다. 당시의 영일은 경주부에 속했다. 포은의 처부(妻父)는 경주(慶州) 이씨요, 외조부(外祖父)는 영천 이씨였다. 포은은 영천이나 경주로 귀향했어야 했지만, ‘비향(非鄕) 유배형’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같은 죄목으로 본관인 성주로 간 도은 이숭인과 달리 왜 포은은 그와 무관한 언양 요도로 오게 된 것일까.

또 유배지가 요도라는 섬인 사실은 정치적 이해관계나 특수한 정치 상황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유배지 요도는 언양, 영천, 청도가 있었다. 청도는 같은 사건으로 연루된 문익점이 군수로 좌천된 곳이다. 그렇다면 그는 영천 요도로 가야 했다. 아무튼 포은은 유배지 요도를 찾아 길을 나섰다.

 

포은 정몽주의 울산 유배길

당시의 귀향형은 장류형(杖流刑)이었다. 먼저 곤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냈다. 조선시대는 장(杖) 100대가 기본이었다. 그래서 맞고 죽어서 유배 못가는 경우도 있었다. 포은의 귀향길은 개경(개성)에서 언양까지 산 넘고 물 건너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길을 잘 아는 압송관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지만, 홀로 귀양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귀양을 조선시대에는 자비로, 하루 80~90리를 가도록 규정되어있었다. 포은은 개경을 떠나 중간 기착지로 고향인 영천을 지나쳤을 것이다. 만약 유배지가 영천 요도였는데 이미 다른 유배인이 있었다면, 언양 요도로 변경되었을 것이다. 언양으로 오는 길은 여러 갈래였다. ‘경주-언양 길’, ‘경주-관문성-굴화 길’, ‘경주-명촌 길’이었다. 굴화 길과 명촌 길은 바다 섬인 요도를 찾는 길이었다. 또 다른 길은 원효의 반고사 길인 ‘천전리 각석-반구대-대곡천 길’과 ‘두동-범서 길’이었다. 이 여러 길 중 어느 길이 언양 요도로 온 길인지는 알 수 없다. ‘경주-언양 길’을 제외하고는 태화강을 거슬러 언양에 이르는 길이다.

 

언양 어음리에 있는 요도사
언양 어음리에 있는 요도사

포은의 유배지 언양 요도

우여곡절 끝에 포은은 언양에 왔다. 요도는 <언양읍지>(1919)에는 “밭 기슭 가운데 하나의 작은 언덕으로서 두 물길 사이에 있다.”고 하고, <헌양잡기>에는 “삼면이 물로 접해있었다”고 한다. 조선 헌종 7년 (1841년)에 제작된 <언양현읍지>의 지도에는 언양 어음리에 요도가 있다. 남천과 감천 사이에 있고 주변에는 소나무와 함께 죽림이란 글자가 보인다. 종합해보면 요도는 남천과 감천(언양천), 그리고 작궤천의 세 하천이 만나는 울주도서관 또는 언양고 인근에 있는 여뀌가 많이 자라는 삼각주 섬이다. 현재 언양 어음리에는 요도 신을 섬기는 요도사(蓼島社)가 어음리 12길에 있다. 이 요도사를 중심으로 포은의 유배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도착 직후 포은은 절도안치(絶島安置), 섬에 격리되어 혼자 있어야 했다. 나중에 양이(量移)되어 거주 제한이 언양현으로 확대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요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언양 요도에 머무르는 동안 아마도 언양현 인근의 유생들은 포은을 만나러 왔을 것이다. 목은 이색은 정몽주를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시조”라 칭하였다. 지방 유생들은 포은을 보고자, 강의를 듣고자 구름처럼 몰려왔을 것이다. 그가 비록 유배를 왔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보수주인(保受主人)을 서로 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비로소 언양은 이름 그대로 ‘선비의 마을’이 되었다.

 

국화주에 취한 유배의 서러움

포은이 언양에 온 증거는 그가 남긴 단 한 편의 시다. ‘언양구일유회차유종원운(彦陽九日有懷次柳宗元韻)’이라는 칠언절구이다. 당나라 시인 유종원이 유배당하여 아우를 위해 지은 시의 운을 따서 지었다는 점에서 언양에 유배 왔음을 알 수 있다.

“나그네 마음 오늘따라 더욱 서글퍼(客心今日轉凄然) 물 가까운 산에 올라 해변을 바라보네(臨水登山瘴海邊).”로 시작한다. 언양에서 물 가까운 산은 요도 인근의 고모산, 작궤천의 부로산 그리고 반구대의 연고사(반구산)이다. 하지만 이 산에 올라도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적으로는 영남알프스 신불산에 올라야 울산 바다를 볼 수 있다. 그가 본 것은 바다가 아니라 태화강일 수도 있다. 아무튼 유배 시절 정몽주의 심사가 잘 드러난 시이다. 배운 것은 있지만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고, 유배지에서 언제 풀려날지 모르니 목숨을 연장할 방도는 있을까 걱정하고 있다. 나라 걱정은 끝이 없으나 신선처럼 벗어나면 편해짐을 안다. 중구일에 국화는 피고 임금과 나라 걱정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데, 잊자며 국화전(菊花煎)과 국화주(菊花酒)를 먹고 마시며 취한다. 그리고 한 수의 시를 남겼다.

이 시를 정몽주는 어디에서 지었을까. 술 마시기 좋은 곳은 반구대와 작괘천이었으리라, 그중 산에 올라 마실 곳은 반구대였을 것이다. 연고산(蓮皐山, 반구산)의 한 자락이 뻗어 내려와 반구대 거북의 등을 이룬 바위 꼭대기에 올라 술을 한 잔 마시며 노래를 읊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곡천 계곡은 태고적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중간 오른쪽이 반곡천과 합류하는 지점이고, 아래쪽에 암각화가 있다.
대곡천 계곡은 태고적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중간 오른쪽이 반곡천과 합류하는 지점이고, 아래쪽에 암각화가 있다.

포은의 반구대 길

정몽주는 어떻게 언양에서 반구대로 갔을까? 당시 대곡천을 경계로 집청정은 경주, 반구대는 언양에 속했다. 아마도 포은은 이 경계를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 언양 요도에서 반구대 가는 옛길은 천전리 각석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연댐에 잠겨 끊어졌다. 각석 길은 신라 길이지만, 유배지 경계를 벗어나는 길이다.

언양 요도에서 반구대 길은 ‘반곡천 길’, ‘옹태 길’, ‘태화강 대곡천 길’이 있다. 그중에서 조선시대 지도에 유일하게 그려진 길이 반구서원으로 가는 반곡천 길이다. 언양에서 경주가는 길을 걷다가 반곡 초등학교 근처의 고하마을에서 반곡천을 따라 대곡천에 이르는 10Km 넘는 길이다. 반곡천 길은 가장 거리가 짧고, 언양장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반곡천 끝에 이르면 이제는 차도는 끊기지만 물길 따라 걸어가면 된다. 개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침내 대곡천에 이르고 하천 개울을 건너면 암각화 길을 만난다. 원시림 같은 대곡천 하천변을 걷다가 큼직한 토끼를 만나 깜짝 놀랐다. (다음호에 계속)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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