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철학하다(1)

이동고 기자 / 기사승인 : 2018-07-25 1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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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이진경 울산 초청강연

지난 4일 울산 함월고등학교 대강당에서는 중고책 거래 사회적 기업인 ‘나비문고’에서 주최하는 이진경 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오전에는 중구청에서 ‘파격의 고전’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불교를 철학하다’라는 주제로 강의하는 강행군이었다. 이 글은 ‘불교를 철학하다’ 강의 요약 글이다.
이 기사가 이진경 교수가 지은 <불교를 철학하다>를 읽게 되는 계기와 그 이해를 돕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이진경 교수 허락을 받아 두 번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철학자 이진경. 그는 심오한 불교철학에 대한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흡인력 있게 풀어냈다. ⓒ이동고 기자
철학자 이진경. 그는 심오한 불교철학에 대한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흡인력 있게 풀어냈다. ⓒ이동고 기자

<불교를 철학하다>. 마르크스주의와 현대철학을 바탕으로 독특한 사유를 거듭해온 철학자 이진경 교수가 2016년 불교에 대한 책을 펴냈다. 지난 1년 동안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글들을 엮은 것이었다. 학문의 여러 경계를 넘나들었던 철학자 이진경이 그간 공부했던 과학, 철학, 예술, 고전 등을 불교적 사유를 씨줄, 날줄로 섞이게 만들어, 절박한 고민 속에 밀려들어갔던 불교 화두 속에서 끄집어 올린 퍼덕이는 생각을 담아낸 책이다. 책에는 제목처럼 불교를 현대철학으로 풀이하여, 불교 개념을 현재 우리 삶 속에 투영해보고 적용해봄으로써 21세기에 걸맞은 새 불교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삶은 돈을 쓰면서 사는 일



읽고 싶은 것도 많고 쓰고 싶은 것도 많아 강연을 잘 안 다니는 사람인데 울산은 벌써 3번째 온다. 울산은 자동차만 있는 곳이 아니라 아주 매력적인 도시인 것 같다. 연희동 학문공동체 ‘수유너머’에 있는데, 간혹 작은 서점도 많이 생기지만 서점을 한다는 것, 그것도 헌책을 가지고 기업을 한다는 것이 거의 자살에 가까운 일을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하지만 금세 돈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일은 다 돈이 안 된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 자체가 돈이 안 되는 일이다. 삶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사는 일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돈 되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 돈이 안 되면 가치가 없다는, 소중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분들을 보면 짠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고 그렇다. 돈 안 되면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래도 이 사회가 지탱해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적 없이 하고 싶어 하는 공부



공부는 목적 없이 하는 공부가 있고 목적 있는 공부가 있다. 목적 있는 공부의 대표적인 것이 시험공부다. 시험공부를 잘하는 친구는 조금 사이코 기질이 있다고 본다. 목적 있는 공부는 할 수 없이 하는 공부다. 진짜 공부는 목적 없이 하는 공부일 거다.



나는 시험공부는 젬병이어가지고 어떻게 하고는 다니지만 정말 하고 싶은 공부는 목적 없는 공부다. 삶 자체가 목적이 없고 여러분 목적이 있어 태어난 분은 없을 것이고 어쩌다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죽음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서어서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삶은 삶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고 살아가는 자체가 목적이다.



불교를 철학하다. 지금은 문학에 대한 것을 준비하고 있고, 선불교에 대한 것도 준비하고 있다. 파격의 고전은 고전연구자 하고 소통도 하고 의견도 나누고 싶어서, 원래 게을러서 안하는 참고문도 들어서 열심히 썼는데 연구자들이 단 한 명도, 한 마디도 별 반응이 없었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사실 법보신문에 대중적인 글로 실었는데 뜻하지 않게 전공자들이 불러주고 했다. 역시 사람은 뜻대로 살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반대 뜻을 헤아리며 살아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때문에 불교TV에서 강의를 한다. 일곱 번으로 하려고 했는데 열일곱 번을 해도 끝나지 않고 있다.



연구공간이라는 것이 다양한 주제를 다루지만 불교를 다룬 책도 낸다니까 “이제 불교도 해? 쟤 이제 맛이 간 것 아니야?”하는 반응도 있었다. 종교인이 돼간다는 오해를 하신 분도 있는 것 같고.



불교가 나에게 다가온 것은 하나의 사건



나는 사실 불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불교를 믿어 절에 자주 가시는데 나는 관심 자체가 없었다. 한 번 따라갈 생각도 못했다. 80년대 길거리를 많이 다닌 학번이다 보니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지 하는 생각도 있었고. 결국 인연이 있는 건지 불교는 사건으로 다가왔다. 지식공동체 일을 하다가 지금은 수유너머, 그 전에는 서사연(서울사회환경연구원)에 있을 때였는데, 공동체라는 것이 말이 공동체지 힘들다. 깨지기를 여러 번.



사실 공부를 하면 올인을 하는 스타일이다. 후배들이 부담스러웠는지 자기들에 너무 참견하고 특이성을 무시한다고 항의를 하고 그런 얘기를 하는데 무척이나 서운하더라. 그럼 할 수 없지. 한 친구와 같이 다니면서 1년이 지나니 또 다른 항의를 하더라. 사람을 능력에 따라 차별한다고. 참견한다, 이제는 차별한다 하니까 열 받더라. 화가 나서 큰 싸움을 하게 되었다.



우연히 만난 가장 황당한 책 <벽암록>



그 때 누가 준 책이었는데 성철스님이 쓴 <자신을 돌아봅시다>. 주로 화장실에서 보다가 <벽암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 공지영작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공작가가 "우주에 나가게 되어 책 한 권만 가지고 간다면 무슨 책을 가지고 가겠냐고"고 하길래 <벽암록>이라 했다. <벽암록>은 가장 황당하고 고준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책이었다. 정말 황당한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문장도 이해가 안 되는 책이라는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책인데 원어스님이 정말 글을 잘 쓴다. 3~4권으로 되어 있는데 한 문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 손에서 한 번도 떠나질 않는 책이라니. 정말로 놀라운 책이었다. 지금 꿈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낸 책이 30여권이 되는데 정말 쓰고 싶은 책이 처음부터 한 문장도 이해가 안 되는데 손에서 떠나지 않는 책을 써보면 원이 없겠다.



번뇌 속에서 만난 책



글쓰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읽을 책이 쌓여 있고 다른 책을 볼 틈이 없다. 화장실에서만은 그렇게 안 하려고 화장실에서만 목적 없는 독서를 한다고 보니 뜻하지 않는 책을 만나 새로운 주제를 하게 되는 것 같다. 화장실에서 보던 과정에 후배들과 갈등이 확 불거졌는데, 친하던 공동체 속 후배들과 싸우니 번민이 컸다. 심하게 상처를 받았다.



힘드니까 번민, 좌선 그런 책을 찾게 됐다. 좌선을 한다고 앉아 있는데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고 번뇌가 너무 차서 속이 울렁거리고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집밖으로 나가 관악산 약수터가 가보는데 나 밖에 없더라.



약수터 평상에 노인네가 누워 있는데 내가 지나가면서 보니까 혼자 온갖 쌍욕을 다하고 있더라. 그 때 놀라 바라보는데 나 밖에 없어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네?’하고 보니 눈이 풀어져 있어 섬뜩해졌다. 내가 바로 저러고 있었는데 조금 아까까지. 나는 입안으로 하고 있고, 저 노인으로 입 밖으로 한다는 차이만 있지 나도 저러고 있었구나. 이런 것이 중음신이 되는 모양이구나. 내가 저꼴이 되는구나. 그 길로 미장원에 가서 아주머니께 머리를 밀어달라고 했다.



내 아상을 본 순간



동네 아주머니가 말리고 그 당시 아는 스님이 있었다면 아마도 출가를 했을지도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리라도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일었다. 그렇게 머리를 삭발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번뇌가 사라졌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생각은 들더라. 내가 후배를 욕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그래 내가 잘못했어’하고 있었을까? 그들도 내 욕을 하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자기 기준과 자기 관점을 갖고 판단을 하고 싸우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거구나, 이런 게 아상이라는 것이구나. 그래서 아상을 버리라는 거구나. 그 당시 <차이의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상을 버리지 않으면 차이의 철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상을 버리지 못하면 공동체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구나. 그런데 아상을 어떻게 버리나?



연기적 조건이라는 것은 의존적인 조건



성철스님을 뵐 때 자기 만나려면 삼천배해야 한다 이야기 자주 나온다. 삼천배를 나 좋으라고 하는 거냐고, 자기 좋으라고 하는 것이지. 뭘까 생각해보니 자기를 낮추는 훈련이고 아상을 버리는 훈련인 모양이다. 삼천배, 천배는 자신은 없고 그 때부터 108배를 계속 해왔는데 더 이상 싸울 생각이 나지 않더라. 자기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싸워서 될 일이 아니고 안 싸우는 것이 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몇 명하고 나와 ‘수유너머’로 나왔는데, 무슨 스님들과 인연이 많아 송광사도 가보고 경화스님도 알게 되고 불교와 인연이 닿았는데 그 때부터 불교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 관점에서 봐서 모르겠는데 나와는 별세계 같았던 그 불교적인 사고가 굉장히 가까이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불교 관점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지만 핵심은 ‘연기법’의 발견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연하여 있는 조건’에 따라 그 본성들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내가 읽었던 맑스와 트래거와 통하는 얘기더라. 완전히 뜬금없는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석가모니 연기법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고...’
그 말이 어렵다. 연기적이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디펜던트(dependent)하다고 이야기한다. 연기적 조건이라는 것이 디펜던트 컨디션으로 번역이 된다. 무엇에 의존해 있는 조건이 연기적 조건이다. 그 조건에 따로 만물의 본성이 달라지고 정해진다는 말이다.



과연 바이올린의 본성은 뭘까?



예를 들면 내가 바이올린을 들고 켠다면 그것은 무엇이 될까? 이걸 악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악기는 음악을 연주하는 도구다.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활을 켜면 이 바이올린은 소음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라장이나 정경화를 만나면 아주 좋은 악기가 되는 것이지 만약에 벽에 걸고 있는 장식품 용도로 쓴다면 악기로 볼 수 있을까?



전에 백남준이 행위예술을 하는데 바이올린을 잡고서 천천히 위로 올린다. 무대 퍼포먼스를 하는데 청중 중에 그 높이까지 올라가니까 “그만!”하고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국립교향악단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모양인데 그 다음 벌어질 일들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바이올린은 꽝 소리를 내면서 분산되어 갔다. 그 바이올린은 악기였을까?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로 유명하니 원래 음악을 했다는 것을 잘 모르는데 백남준은 음악가이고 음악가들하고 어울렸다. 백남준은 왜 그런 퍼포먼스를 했을까? ‘이 바이올린이 악기 맞냐?’고 묻는 과정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또 백남준은 바이올린에 줄을 매달아 개 끌고 다니듯이 뉴욕거리를 세 시간, 네 시간 끌고 다녔다고 한다. 이럴 때도 악기일까? 바이올린을 그런 식으로 쓸 때도 악기일까를 퍼포먼스를 하면서 계속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 악기 맞어? 진짜 악기 맞어?”하고 자꾸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단지 장식품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바이올린이 악기가 맞나?



바이올린이 정경화를 만나는 순간, 나와 만나는 순간, 백남준과 만나는 순간 그 어느 것이 바이올린의 본성일까? 악기로서 소리 나는 것만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악기, 장식품, 퍼포먼스 도구도 다 본성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특별한 것만을 본성이라 할 수 없다. 바이올린이 무엇과 만나느냐에 따라, 만나는 이웃에 따라 그 본성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조건에 따라 본성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 바로 연기적 속성이다. 바이올린이 악기가 되게 만드는 것, 바이올린을 장식품이게 만드는 조건, 그 조건 자체가 연기적 조건인 것이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조건에서 노예가 된다’는 맑스 주장이 바로 연기론



그래서 예전에 맑스가 했던 말을 가지고 표현하면 이렇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이다. 그것은 특정한 조건에 의해서 악기가 된다.’ 맑스가 얘기했던 그 말 ‘흑인은 흑인이다. 흑인은 특정한 조건에서 노예가 된다’처럼. 흑인의 노예적 본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된 백인을 만나 사냥당해 족쇄를 차는 순간 노예가 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 나쁜 이웃을 만나면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 되는 것이 바로 연기적 조건이 된다. 흑인이 다른 연기적 조건을 만나면 전혀 다른 본성으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맑스가 했던 핵심적인 말이라고 보는데, 흑인의 본성은 동물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흑인이 인간인가 아닌가’, ‘인디언이 인간인가 아닌가’하고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시대 그런 논쟁을 벌였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순간 그들은 잘못된 대상이 되어 버려, 이런저런 본성이 저해된다는 것이다. <미션>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을 다룬다. 본성이 정해졌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 끔찍한 것인지, 너희들은 본성이 동물이라서 사냥해도 되고, 끌고 가도 되고, 사냥해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이런 것들과 정반대되는 사고가 연기법이다.



석가모니는 본성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반기



석가모니 당대를 생각하면 이해가 잘 된다. 아직 인도는 카스트 제도가 법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실질적으로는 관습에는 살아있다. 불가촉천민은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브라만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아무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격적인 것이다. 사람은 어떤 존재와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된다고 말할 때, 그 당시 본성에 의해 모든 것을 할당하는 것을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여성들이나 노예로 살던 사람이 출가를 해버리니까 막 항의를 받게 된다.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니니까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본성에 입각한 사고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혁명적인 사고, 사고의 대전환이었던 것이다.




사건은 사물이 특정 조건에서 의미를 만드는 것



들뢰즈는 '사건' 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던 타임즈> 채플린의 빨간 깃발처럼 화물자동차와 연계가 되었을 때는 ‘조심하시오’라는 경계가 되지만 시위대와 연결되었을 때는 적기가 된다. 모던타임즈의 채플린이 절묘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 다음에 운동장의 사람과 만나면 응원 깃발이 되는 것이고 원래 빨간 깃발의 본성은 없는 것이다. 들뢰즈는 어떤 이웃과 만나는가에 따라 사물이 사건이 된다고 한다. 사건은 다른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만나면서 배열화, 의미화되는 것을 말하는데, 어떤 사물이 어떤 이웃과 만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굉장히 비슷하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중요한데 우리는 본성에 의한 사고, 암기에 의해 사고하는 것이 강하다. ‘저것은 악기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저건 악기를 부순 거야’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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