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 박기눙 소설가
  • 승인 2018.08.08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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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지난 오 개월, 취업준비생으로 살았다. 주말을 제외한 날짜로 계산해서 딱 100일이라는 시간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00일, 700시간의 교육이 지난주 마무리되었다. 국가 기간전략 산업직종의 인력을 기른다는 목적의 교육. 처음에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시작했는데 조기 취업이 된 이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둔 이도 생겨 교육 막바지에 열댓 명 정도가 남았다.


함께한 교육생들은 학습을 받아들이는 정도, 경력, 나이가 제각각이었다. 하루에 7시간 남짓 함께 지내는 일은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번의 회식과 만남이 거듭되자 서로의 고민과 처지를 걱정하고 의논하는 따위의 교류가 이어졌다. 생활비로, 용돈으로, 점심값으로, 교통비로 쓰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는 교육 수당은 엄격한 입 퇴실 관리에 밀려 깎이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취업준비생은 아슬아슬한 신분이라는 것을 절감한 시간이었다. 취업이 최종 목적인 이들이 모여 교육을 받는 터라 소위 스펙을 쌓는 일은 무시할 수 없는 절차였다. 서류가 통과해야 면접 볼 기회가 생기는 우리에게 소위 스펙은 힘 센 무기 같았다.


스펙이라면 당연히 자격증이었다. 자격증은 이력서에 쓰는 한낱 개별 사항에 불과하지만 그 한 줄을 위해 취업 준비생들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자격증 따는 일에 골몰하니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고 버티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는 일은 나태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교육을 받는 동안, 몇 번의 자격증 취득의 기회가 생겼다.


알다시피 자격증은 민간기관이 운영하는 민간 자격증과 국가가 주관하는 국가 기술자격증이 있다. 국가 기술자격증은 차치하고 민간 자격증은 그 종류가 분야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주관하고 운영하는 단체가 모두 상업화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겪은 민간 자격증의 실태는 정말 가관을 넘어 경악할 수준이었다.


일단 시험을 주관하는 단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다. 건설과 기계 쪽에서 많이 쓰는 프로그램이니 배우는 이도 자격증을 따는 이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응시료는 터무니없이 비싸다. 한 번 응시료가 교육 수당의 25%에 육박한다. 시험은 한 달에 두 번 시행된다. 또한, 프로그램이 깔린 전국의 학원이 시험장이다. 학원과 연계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학원도 손해날 것은 없어 보인다. 물론 문제는 어렵지 않다. 단순한 형태를 자사 프로그램을 이용해 똑같이 그리는 식이다. 그렇다고 주최하는 단체에서 문제를 고심해서 만드는 것 같지도 않다. 회마다 문제가 비슷비슷, 그동안 낸 문제를 이리 꼬고 저리 꼬아 트릭을 만드는 식이다. 점 하나를 잘못 그리면 십 수 점을 깎는 식으로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으로 삼으니 작은 실수로 응시료를 날리는 이가 제법 많음이 자명하다. 그런데도 전국에 응시생이 끊일 날이 없고 그 단체는 나날이 승승장구, 운영하는 자격증의 개수도 한 두 개가 아니니 그들에겐 화수분이 따로 없다.


처음에 나도 시험 접수를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왜 그들에게 검증을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내 능력을 적어도 그들이 운영하는, 지극히 상업적인 방법으로 운영하는 곳에서 인정받고 싶지 않았다. 취소하고 시험을 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시험을 치지 않은 일에 그쳤다.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도 자격증 하나, 이력서 한 줄을 채우려 애를 쓸 이들에게 그들의 허상을 알리고 시험 같지도 않은 시험을 보이콧하라고 말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지 싶다. 그것이 바로 내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인지를 말하는 첫걸음일 터.


700시간 동안 나는 부화뇌동하여 ‘무엇’에 골몰했다.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닌, 오롯이 나의 욕망에서 비롯한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야 할 때 사람들은 내가 ‘무엇’인지 말한다던 한나 아렌트의 일침처럼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내가 ‘누구’인지 말하며 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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