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철학하다(2)
불교를 철학하다(2)
  • 이동고 기자
  • 승인 2018.08.0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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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이진경 울산 초청강연

지난 울산 함월고등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이진경 교수의 ‘불교를 철학하다’에 대한 강의정리본 두 번째 글입니다. ‘내 저작물에는 따로 저작권이 없다’고 강의 요약본 게재를 허락해준 이진경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책 ‘불교를 철학하다’를 읽는 계기와 이해를 돕는 역할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이진경 교수의 저서가 30권이 넘었고, 그의 책에 감동하는 울산지역 매니아 독자층도 늘고 있다. ⓒ이동고 기자
이진경 교수의 저서가 30권이 넘었고, 그의 책에 감동하는 울산지역 매니아 독자층도 늘고 있다. ⓒ이동고 기자

 

늑대왕 로보 이야기

소는 인간의 고기를 조달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고 개는 인간의 친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다르다. 시튼이 쓴 <동물기>에는 늑대왕 ‘로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로보’라는 늑대는 소도 잡아가고 양도 잡아가고, 지능이 아주 높은 늑대였다. 덫을 놔도 오줌을 누고 가고 먹이에 독약을 넣어도 똥을 누고 가고 했다. 로보를 잡으려고 관찰해 보니 로보의 짝인 ‘레베카’가 있었다. 늑대 레베카를 잡아 로보를 덫으로 유인했다. 레베카의 주변을 한 3일 동안 돌면서 ‘우~~’ 계속 울부짖으며 도는 것이었다. 그리고 3일 째 되는 날 천천히 덫 속으로 들어오면서 레베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하~ 장엄한 장면 아닌가? 그 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 거다. 그런데 자기 짝이 있는 거다. 덫이 있으니 내가 딴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잡히더라도 짝이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갈 것인가? 이건 사실 낭만주의적 소설이나 흔히 보는 설정이지 않느냐는 건데 실제로 동물에게서 벌어진 일이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걸어 들어가 잡힌 것이다. 이 뒤에 아무런 먹이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이건 영웅적인 모습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다. 영웅적인 죽음도 내거 저기를 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단 것을 알지만 내가 가야할 이유가 있기에 가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어떤 대의를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영웅이다. 광주항쟁 때 도청에 들어간 분들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난 안 들어갈 수 없어’하고 들어가는 것이 고전적 의미의 영웅이라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본성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누가 “생각 없는 동물이야”라고 누가 이야기하나? 여러분 중 누가 자기 짝이 있다고 할 때 걸어 들어갈 수 있을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튼의 글 속에 보면, 자기가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후회가 막급하다. 데카르트마저도 동물이 생각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기계라고 본성을 딱 할당을 해버린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정의를 했는데 벌도 춤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발견이 된다. 그래서 ‘들은 것을 전할 수 있을 때 인간’이라고 재정의한다. 이런 걸 ‘사후수정’이라고 하는데 언어정의를 바꾸어가는 비겁한 행위인 것이다. 인간이 이렇다는 거다. ‘본성이 있고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공은 연기법과 짝을 이룬다

연기법은 이런 사고를 바꿔버린다. 본성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어떤 것이 있었다가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는 본성이라는 것이다. 강한 의미에서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그 때 그 때 만들어지는 연기적 조건 조건이 다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 사고방식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불교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는 ‘공’의 문제가 나오게 된다. 공이라는 개념이 연기관하고는 정반대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연기법의 짝이다. 생각을 할 때 현행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과 구별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연기적 조건에 의해 본성이 달라진다.

 

연기적 조건을 떠난 본성이 있을까?

아까 한 바이올린이 내 어깨도 떠나고 벽도 떠나고 까페도 떠나고 백남준의 손, 정경화의 어깨도 떠나고 나면 바이올린의 본성이 뭘까? 조건에 따라 달라지니 그걸 떠난 변하지 않는 뭐가 남아 있지 않겠냐고 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슈퍼에 있는 수많은 ‘닭알’(달걀)을 보고 닭이 될 본성을 타고 났다고 말한다고 의미가 있을까? 그 중에서 과연 몇 개가 닭이 될까? 아마 하나도 닭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달걀은 못 마땅한 어떤 놈에게는 모욕을 주는 역할도 하지만 대부분은 여러분 손에서 깨져 음식의 재료가 된다. 이렇게 달라진다. 이런 것을 떠난 달걀의 본성은 뭘까 하고 물으면, 닭이 낳은 알은 맞지만 병아리가 될 가능성이 없는 알을 달걀이라 부르는 것은 과연 맞을까? 우리 관념이 만든 허상이다. 바이올린도 마찬가지고. 백남준처럼 바이올린을 쓴다면 그걸 악기라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바이올린이든 달걀이든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데 본성이 정해져 있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노예라면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졌다는 것인데 다행히도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이다. 다양한 연기적 조건을 다 벗어난 상태에서 본성을 물으면 ‘아무 본성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공’이라는 것이다. 

 

공, 다양한 규정성을 가진 무규정성 

공은 무(無)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무는 ‘없다’는 뜻이지 않냐. 우리 언어 한계 때문에 ‘공’이라는 것을 ‘없다’고 표현하면 달걀 얘들이 어떻게 병아리가 될 것이며, 음식재료가 될 것이며 벽화를 그리는 물감용매가 될 것이냐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본성 전체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이라는 것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꽉 차 있는 거다. 다양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꽉 차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어서 하나의 본성으로 이야기하기 힘든 상태를 ‘공’이라 한다. 연기적 조건에서 본성을 ‘규정’이라고 하는 데, 다양한 규정을 갖는다는 것은 규정적인 본성을 그 안에 다 가지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공이라는 것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무규정성, 아무런 규정이 없음이 아니라 수많은 규정들이 이미 잠재적으로 그 속에 있음을 말한다. 이미 잠재적으로 다 있다. 그래서 ‘공’이라는 것은 ‘다양한 규정성을 가진 무규정성’을 의미한다.

공은 잠재적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것

최근 ‘공’을 연구하는 사람은 영어로 ‘오프니스(openness)’, 즉 ‘여러 규정성에 열려 있음’이라고 지칭한다. 연기적 조건에 따른 여러 규정에 ‘열려 있음’으로 해석해 오해를 풀고 있다. 


능력이 있다는 것은 보통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잠재성이다.


아이들에게 “너희들 열심히 해 봐, 화가가 될 능력이 있어”하면 아직은 실현되지 않는 잠재성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직업을 가지지 않았기에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다. 여러 가능성을 갖는 능력이 바로 잠재성, 그것이 바로 ‘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벗어날 수 없는 수많은 연기적 조건에 갇혀 지낸다. 아이들은 어떤 일이든 가능한 공의 상태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애들은 장래성이 많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백수가 공에 제일 가깝다(웃음). 백수가 제일 바쁘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 이것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자체가 공에 대한 설명
 
공이라는 개념이 석가모니가 죽고 나서 한참 뒤인 500~600년 지나고 나오게 된다. 불교가 소승불교, 대승불교로 분열되고 난 다음 결국 대승불교에서 발생한 것인데 한국불교에서는 중요하게 꼽은 금강경에는 공이라는 개념이 안 나온다. 반면에 반야심경에는 공이 나오고, 공이 개념화 된 것인데 반야심경 자체가 ‘공’에 대한 설명이다. 금강경에는 공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전이지만 그에 대한 멘탈, 즉 사고방식은 있다. 


즉,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무릇 있는 바 상(相)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닌 줄 보면, (상(相)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니라’라는 구절이 있다. 모양 있는 곳에서 모양 없는 것을 볼 때 곧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래’가 ‘공’이다. 용수도 공을 이야기하는데, 금관학 여기서 이야기하는 <중론> 이야기를 읽어 보면 아주 황당해서 ‘이게 공이야, 이게 공이야’하는 식으로 논란이 많다. 예를 들면 시간은 없다 오고감도 없다. ‘없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계기가 된다. 핵심은 규정성이 없다는 ‘이게 공이야’ 논란을 만드는 것이 많다.


반야심경에 是諸法空相시제법공상 不生不滅불생불멸 不垢不淨불구부정 不增不減부증불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조금 아까 규정을 가지지 않는 무규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공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어서 꽉 차있는 것이다. 비어있는 것이 공이 아니다. 불생불멸,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말을 하는데 무척 어려운 말이다. 지금 예를 들어 이야기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음악에 대한 관념을 깼던 현대음악
 
현대음악을 이야기하면 현대음악은 조성이 깨지면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피아노에서 키가 C라면 다른 키로 갔다가 다시 C로 끝난다. 1도에서 5도로 말이다. 바그너 때 완전 깨진다.


음악 기본개념을 바꾸려는 시도를 여러 곳에서 한다. 21세기 들어서면 미래주의자들이 음악에 대한 개념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하수도 물내려가는 소리, 쇠파이프 두드리는 소리, 자동차 와앙 가는 소리, 말 달리는 소리가 음악보다 더 아름답다고 이야기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전통적인 화음보다 불협화음인 소음이 더 아름답다고 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소음을 녹음하여 들려주는 것으로 연주회를 하고 다녔다. 음악에 대한 기존 관념에 자극을 받지만 에피소드로 끝났다. 에드가즈 바레즈가 작곡한 <이오니제이션>, 즉 ‘이온화’라는 곡은 타악기 연주를 하면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음악회장에 망치로 때리는 소리가 들어간다. 채찍으로 친다. 이런 음을 정교하게 섞어 처음에는 사이렌 소리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모든 소리가 다 음악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확장되었다. 그 다음은 전자음악시대가 열리는데 음향학적인 것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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