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도는 만국과 교역할 때 세상에 드러나
우리 도는 만국과 교역할 때 세상에 드러나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08.0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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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겸비한 손화중

1891년 6월 정읍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의 김개남의 집을 찾은 인물 가운데 손화중도 있었다.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과 더불어 동학혁명을 이끌었다. 이때 손화중은 32세로 정읍, 부안 일부와 고창, 무장 지역을 포덕하여 휘하에 천여 명의 도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손화중은 신언서판(身言書判) 즉, 예전에 인물을 고르는 표준으로 삼던 네 가지 조건인 신수・말씨・문필・판단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손화중(孫華仲)은 1861년 정읍군 과교리(현 정읍시 과교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정식(正植)이고 호는 초산(楚山)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화중은 자(字)이다. 손화중은 20대부터 고향을 떠나 식견을 넓히는 한편 당시 부패한 사회상을 통탄하며 이를 바로잡는 길을 찾아 다녔다.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에는 손화중이 21세 때인 1881년 처남 류용수(柳龍洙)와 함께 경상도 청학동에서 동학에 입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 청학동은 지리산 청학동으로 보이는데 당시까지 동학이 경상도 지리산 일대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손화중의 입도 시기는 해월이 익산 사자암에 피신해 본격적으로 동학을 전라도로 전한 1884년으로 보인다. 손화중은 동학을 통해 부패한 세상을 일소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길이 있다고 판단하고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에 입도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냈다.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에 손화중의 활동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입교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포교에 전력하였으니 처음에는 부안에 우거를 정하고 포교하다가, 그 후 정읍으로 옮겨 농소동에서도 잠깐 머물렀으나 다시 입암면 신면리로 옮겼으니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얼마 동안 음성리 본가로 돌아와 있다가 무장현으로 옮겨 무장읍 김모의 집에 잠시 포교소를 두었다가 다시 이웃 무장현 덕림리 마을로 옮겼다.

위의 글을 통해 손화중은 동학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포덕을 시작하여 동학지도자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부안을 시작으로 정읍, 그리고 고창과 무장 일대에 동학을 포교했다. 동학혁명 당시 고부의 전봉준이 무장으로 건너와 본격적인 혁명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손화중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화중과 관련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선운사 마애불의 비기(祕記)이다. 고창 일대에서 동학을 포교하며 민심을 장악한 손화중이 선운사 미륵불의 배꼽에 숨겨져 있는 비기를 꺼냈다는 소문이 일대에 퍼졌고 이는 동학혁명의 민중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이었다.

필자는 1988년 여름 정읍에서 농협조합장을 하고 있는 손화중의 손자 홍렬 씨를 만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홍렬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사진에서 보았던 손화중의 얼굴과 너무도 비슷해 놀랐다. 할아버지와 꼭 닮은 큰 몸집의 홍렬 씨를 보면서 손화중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학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하지 못할 때였는데 홍렬 씨는 반가이 맞아주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젊은 대학생이 동학 유적지를 찾아 공부하는 것에 고마워하며 식사까지 대접해주었다. 할아버지의 일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얼마 전에 찾은 손화중의 묘소에서 홍렬 씨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손화중대접주 묘소. 손화중의 묘소는 전북 정읍시 상평동의 음성마을에 있다.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최경선과 같이 참형돼 시신을 찾을 수 없어 1996년 손자 홍렬 씨가 선산이 있는 이곳에 가묘를 만들었다.
손화중대접주 묘소. 손화중의 묘소는 전북 정읍시 상평동의 음성마을에 있다.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최경선과 같이 참형돼 시신을 찾을 수 없어 1996년 손자 홍렬 씨가 선산이 있는 이곳에 가묘를 만들었다.

 

도인들의 생활 규범 정리

해월은 호남행에서 전라도 일대의 동학 확산과 함께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과 같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만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남계천의 편의장 임명으로 인한 분란을 잠재워 동학 조직의 체계화도 확립했다. 호남행을 마치고 진천군 초평면의 금성동의 집으로 돌아온 해월은 ‘한 기운을 통해서 바른 마음을 보았다’는 뜻의 “관관일기정심처(貫觀一氣正心處)”라는 글을 지어 호남행의 의미를 정리했다. 해월은 이 시에는 호남 순회를 통해 늘어나는 도인들을 이끌어갈 바른 마음자리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담겨 있다. 1891년 10월 해월은 금성동에서 동학도인들의 생활 규범 10가지를 지어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윤리를 밝힐 것(明倫), 신의를 지킬 것(守信), 업무에 부지런할 것(勤業),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평할 것(臨事至公), 가난한 사람을 서로 도울 것(貧窮相恤), 남녀의 직분을 엄히 구별할 것(男女嚴別), 예법을 존중할 것(重禮法), 연원을 바르게 할 것(正淵源), 진리를 강구할 것(講眞理), 어지럽고 복잡한 것을 금할 것(禁淆雜)” 등이었다. 동학이 확산되어 삼남 지방으로 번지자 동학을 통해 세력을 과시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도인들도 일부 나타났다. 그러자 해월은 도인들이 생활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조목조목 정리하여 반포했다. 도인들의 생활 자세를 내용을 담은 통유는 이후 몇 차례나 지속됐다.

 

동학은 만국과 교역할 때 꽃핀다.

해월은 동학에 대한 지목이 다시 심해지자 12월 들어 진천 초평의 금성동에서 충주 외서촌 보뜰(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로 이사했다. 보뜰은 되자니와 작은 되자니를 흐르는 도청천에 농사를 짓기 위해 보를 만들었던 곳으로 예전에는 대여섯 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보는 없어졌다. 마을 분들도 예전부터 보가 많은 들이라 보뜰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가장 큰 보는 현재 되자니에서 작은 되자니로 가는 다리 아래에 있었다고 했다. 해월이 이 보 근처에 있는 보뜰 마을로 은거했다. 충주접주 신재련(辛在蓮)이 보뜰에 살고 있어서 해월에게 보뜰로 옮길 것을 권했다.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 금성동. 1890년 9월부터 1892년 1월까지 해월이 은거했던 곳이다. 이 기간 중에 가족은 공주 동막골에 숨어 있기도 하였다. 금성동으로의 은거는 서택순이 주선했다. 해월이 금성동의 어느 집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 금성동. 1890년 9월부터 1892년 1월까지 해월이 은거했던 곳이다. 이 기간 중에 가족은 공주 동막골에 숨어 있기도 하였다. 금성동으로의 은거는 서택순이 주선했다. 해월이 금성동의 어느 집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해월이 보뜰로 이사 오자 신재련은 해월의 집을 찾아 집단장을 같이 했다. 12월의 한 겨울에 진흙을 이겨 집을 단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이 힘이 들자 신재련은 해월에게 푸념삼아 “우리 도의 운세가 어느 때에 태평해 지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신재련은 언제쯤 쫓기지 않으며 편안하게 두 다리를 쭉 뻗고 동학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겠느냐고 심정을 토로했다. 해월은 신재련의 물음에 “모든 산이 검게 변하고 모든 길에 비단이 깔리고 만국과 더불어 통상할 때가 그때이다.”라고 답을 했다. 이어서 해월은 “내가 한 이 말은 백 년 뒤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되리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그때를 알려주는 어떤 징조가 없습니까?”라고 다시 묻자 해월은 “우리 땅에 들어왔던 만국병마가 스스로 물러가는 징조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월이 답한 산이 검게 변한다는 것은 산에 나무가 울창하여 나무 그늘에 하늘이 가릴 정도로 산림이 무성하게 될 때를 뜻한다. 조선 후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민가 주변의 산들은 헐벗기 시작했다. 땔감과 곡물을 키우기 위해 산을 개간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헐벗은 산하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해방 후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필자도 강원도 산골에서 자랐는데 헐벗은 산이 많았다. 그러나 산림녹화 사업이 진행되고 연료가 바뀌면서 지금은 대부분 푸르러 산림이 무성해졌다. 해월이 말한 산이 다 검게 변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길에 비단을 깐다는 것은 길이 비단을 깐 것처럼 좋고 편리한 길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해월이 살았던 시대에는 넓은 길이 없었다. 길에 비단을 깐다는 의미를 당시 동학도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신작로가 만들어지고 해방 이후 산업화로 도로포장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길이 비단을 깐 것과 같이 좋아졌다. 이제는 시골의 집 앞까지 도로들이 정비되었다. 해월이 말한 길에 비단을 깐 세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월은 만국과 통상을 하는 시기가 올 때 우리 도가 세상에 드러난다고 했는데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1876년 개항 이후 서구의 몇몇 열강들과 수교를 해 문호를 개방했지만 해월이 이 말을 했던 1891년에는 일본과 중국, 서구 열강의 몇 개 나라와 수교했을 때였다. 외국의 물품은 중국과 일본을 통해 영국산 면제품 등 몇몇 국가의 물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때였다. 만국과의 통상은 꿈도 꾸지 못할 시기였다. 해방 이후 6.25전쟁과 냉전 시대에는 소련과 동구의 공산권 물품이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과 중국의 수교를 계기로 만국과의 통상이 실현되었다. 해월이 100년 후에나 나의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만국과의 교역이 시작됐다. 해월이 예언한 것처럼 지금 시대에는 동학을 누구나 마음 놓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해월은 마지막으로 만국병마가 우리 땅에 왔다 스스로 물러날 때가 동학이 세상에 드러난다고 하였다. 필자는 해월이 말한 만국병마가 물러갈 때는 외세가 우리 땅에서 물러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외세의 의존하는 시대를 벗어나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을 때 자주적 근대화를 제시한 우리의 사상인 동학이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가중

1891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한 조병식(趙秉式)은 동학 탄압에 열을 올렸다. 조병식은 1889년 함경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방곡령(防穀令)을 시행했는데, 일본은 한 달 전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방곡령의 철회와 일본 상인이 입은 배상금 지급을 요구해 11만원을 받아갔다. 조병식은 이 사건으로 좌천됐다가 복권돼 충청도관찰사로 임명됐다. 조병식의 탄압으로 해월은 여러 곳을 전전했고 동학도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1892년에 들어와서도 동학에 대한 탄압은 식을 줄 몰랐다. 해월은 다시 은거하지 않을 수 없어 손병희가 주선한 진천군 초평면 부창리로 숨었다.

충북 진천군 초평면 부창리. 1892년 충청도관찰사 조병식의 동학 탄압이 심해지자 해월은 충주 외서촌 보뜰에서 1892년 1월에 이곳 부창리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해월은 처음으로 ‘후천개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충북 진천군 초평면 부창리. 1892년 충청도관찰사 조병식의 동학 탄압이 심해지자 해월은 충주 외서촌 보뜰에서 1892년 1월에 이곳 부창리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해월은 처음으로 ‘후천개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해월은 부창리에 은거해 도인들에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관리와 공부, 도인들간의 기화, 탐욕과 아첨 등 부정한 생활의 경계, 어린아이 때리지 말기’ 등의 내용을 담은 통유문을 보내면서 어려운 시기를 견디라고 당부했다. 해월은 이 통유문의 “우리 도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운수이며 무극(無極)하고 참된 도(道)이다.”라는 대목에서 ‘후천개벽’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수운은 ‘다시 개벽’이라는 용어를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혁을 말했는데 해월은 선천과 후천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동학 이전과 이후를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학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은 동학도들을 응집시켰고 이는 종교 자유화운동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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