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철장: 철의 도시 울산, 과거-현재-미래
달천철장: 철의 도시 울산, 과거-현재-미래
  • 이동고 기자
  • 승인 2018.10.0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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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울산, 다시 부르는 철의 노래(1)

<기획취재: 울산, 다시 부르는 철의 노래>
1. 달천철장: 철의 도시 울산, 과거-현재-미래
2.
근대화. 산업화 전에도 철기문명 중심지였던 울산 원형 되살리기
3, 또 다른 철, 케이블카 타령 “콘텐츠가 먼저다” 
4. 철, 사람을 잇다: 폐철도 트램 가능할까?
5. 철에서 싹이 트다, 문명재생 쿠바로 가다
6. 옛날 철길, 울산역에서 철의 르네상스 다시

 

제철기술을 발명해 철을 가진 민족은 금세 강인한 힘과 풍요로운 농경문화를 꽃피웠다. 철은 신소재로 인류에게 다가온 순간 인류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울산지역에는 이런 철기시대를 이끈 달천철장 유적이 있다. 하지만 달천철장은 땅 속에 묻혀버렸다. 고대 국가이전부터 2000년 동안 질 좋은 철 재료를 생산했던 찬란한 유적은 개발 논리에 묻혀 봉인됐다.

 

철이 가진 자유성과 긴요성

예술가들은 여러 가지 재료로 작업을 한다. 쇠로 작업을 하던 한 예술가는 철이 가장 유연하고 자유로운 소재라고 이야기했다. 가장 강인한 쇠가 가장 유연하고 확장성이 뛰어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소재라고?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쇠처럼 다양한 형체를 만드는 물질도 없다. 오래 전부터 철은 절대적인 본질과 자유와 가진 물질로 여겨졌고, 부패하거나 변질되지 않는 물질로 여겨졌다. 녹만 막는다면 가장 강인한 물질이었다.

철은 높은 열과 압력이 필요하며 초신성 폭발이라는 우주적 기원을 통해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철은 또한 전쟁과 평화의 야누스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성경 이사야서에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평화의 시대를 만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만큼 철은 일상의 도구든 참혹한 전쟁의 무기든 아주 강력한 물질임에는 틀림없다.

 

철기문화를 선도한 달천철장

사람들은 철을 갖고 높은 건축물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철로도 만들고 기차도 만들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의 건축물과 공간을 만드는 철,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교통수단과 연결망으로서 철재료는 단순히 하드웨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철은 만드는 사람이나 이용하는 사람에게 그저 차갑고 딱딱한 물질로 비쳐질 수 있지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생활공간 이동을 편리하게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문화혜택을 주는 소재이기도 하다.

달천철장에서 발전한 철기문화는 철기 도구만이 아니라 철기를 매개로 한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융성을 보여준다.

 

달천철장 유적은 2003년 울산광역시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됐지만 지금은 땅 속에 묻혀 있다.
달천철장 유적은 2003년 울산광역시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됐지만 지금은 땅 속에 묻혀 있다.

 

달천절장은 초기 철기시대의 핵심 유적

달천철장은 울산시 북구 천곡동 513번지 일원에 있다.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처음 가 본 사람들은 사각의 거대봉분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달천철장은 기원전 2세기부터 공식 폐광된 2002년까지 2000년 동안 철을 생산하던 곳이고 삼한시대부터 시작해서 신라, 조선, 산업화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철의 중심지였다.

초기 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남한지역 제철유적은 총 103곳이다. 경북.경남이 50곳으로 가장 많고, 강원 22곳, 서울.경기 17곳, 충북.충남 11곳, 전북.전남 3곳 순이다. 경상도지역, 사로국의 세력권인 진한(辰韓), 변진구야국의 세력권인 변진(弁辰)지역에 약 50%의 제철유적이 집중돼 있는 셈이다. 경상도지역 초기 채광과 종합 제철 유적으로 진한의 세력권은 경주 황성동 유적과 울산 달천 유적이 있고, 변진의 세력권은 김해 하계리 유적이 있다.

 

울산 북구는 고대 동아시아 최대 철 생산지이자 수출 지역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진한과 변한지역의 철 생산에 대해 <태평어람> 위략집본에서 “그 나라(진한)에서는 철이 나는데 한과 예가 모두 이로부터 철을 취한다. 각 저자에서 매매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전(錢)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했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서도 “나라(변진)에서는 철이 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이로부터 철을 취한다. 각 저자에서의 매매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전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로써 두 군에 공급한다.”고 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나라(진한)에서는 철이 나는데 예와 왜, 마한이 모두 이로부터 철을 매입한다. 무릇 각 무역에서는 모두 철로써 화폐를 삼는다.”고 했다.

사료로 볼 때 남한지역 제철 유적의 50%가 집중 분포돼 있는, 신라의 권역이었던 진한과 가야의 권역이었던 변진에서 철을 대량 생산했고, 이 철을 마한, 예, 왜에 수출하는 무역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달천철장을 포함한 진한, 변한지역은 고대 동아시아 최대의 철 생산지이자 수출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번성할 수 있었던 힘의 기반

남한에서 고대 채광 유적은 현재까지 울산 달천광산 유적이 유일하다. 달천철장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주 황성동 유적은 신라 도성에 위치한 대규모 제철 유적이자 달천철장의 토철을 사용해 신라 초기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운영된 종합제철소 수준의 공방지였다.

4~5세기를 기점으로 신라가 가야권역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면서 철 생산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신라의 정복전쟁이 한창이던 6~7세기에는 양산~밀양으로 이어지는 철 생산을 신라가 장악했다. 달천철장 토철을 활용한 경주의 제철기술이 영토 확장과 더불어 경남 각 지방의 거점으로 전파됐다.

달천철장의 토철을 활용한 철기의 생산은 통일신라 때까지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달천철장은 남한 초기의 제철 유적지로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주요 철광지였다.

 

달천철장의 폐쇄와 부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후 달천철장은 고려시대 때 폐쇄됐다가, 조선시대 들어와 다시 활용되기 시작한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와 같이 ‘철장제(鐵場制, 철을 생산하기 위하 부역동원)’와 ‘염철법(斂鐵法, 경작면적에 따라 철을 세금으로 농민들이 납부)으로 철 생산을 국가에서 통제했다. 조선 초기 철장은 전국에 20여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상당수가 사철광이었다.

철장은 철산지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철산지에서 가깝고 제철로에서 연료로 사용하는 나무 조달이 쉬운 곳에 설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달천철장은 1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녹동 저수지(경주시 월성군 녹동) 주변에 숲이 울창해 그 곳에서 숯을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 달천철장은 조선 초기에도 철 생산이 많은 주요 철광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철은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생산되는데 이중에서도 경상도에서 전체의 91%를 생산했고, 경상도 중에서도 울산 달천철장이 가장 많은 쇠, 즉 1만2500근의 철정세공을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17세기 이후에는 사영 제철업자가 등장해 독립자본으로 철광을 개발하고 장인을 고용해 철을 생산하게 된다. 18세기 이후에는 자본을 대주는 물주(物主)에 의해 경영되는 민영 광산 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민영화된 철광들은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자본가들에게 독점됐다.

 

달천청장의 마지막 역사

달천철장의 경우도 17세기 중반부터 이의립 일가에 의해 운영돼 오다가, 통감부 시기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이의립의 13세손인 이은건으로부터 일본인 광업자 나까무라에게 넘어가게 된다.

달천광산은 자철광이 노천 형태로 산출되고 철 품위가 한반도에서 드물게 60% 정도의 유리한 품질을 가지고 있어, 조선조 말까지 한반도의 제1철광이었으며 일제의 수탈대상이 되기도 했다.

달천절장이 다시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온 것은 1943년으로 서울에 사는 정운경 씨와 울산의 김선탁 씨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은 별 이득을 얻지 못한 채, 1964년 12월에 발족한 대한철광개발(주) 울산광업소로 사업권을 넘겨 국가에서 운영을 맡게 되었다.

 

철생산 93년까지 이어져, 사문석 광산은 2002년 폐쇄

대한철광 회사는 1만 명 이상의 종업원을 고용해 연간 8만 톤 이상의 분광을 생산할 정도로 철광석 생산이 활발했다. 달천철장의 철은 모두 포항제철(현재 포스코)로 팔렸다. 포철에서 생산된 재료는 전국 중화학공업을 육성시키는 철강재로 널리 쓰였다. 1970년대부터는 삼미사가 달천철장을 인수해 다시 민영화됐다.

1977년 달천철장에서 사문석 선관장을 준공했다. 1993년 6월 철광석 생산은 끝내고 사문석 생산만 하게 됐다. 2002년 9월 사문석 생산이 완료되면서 달천철장은 공식적으로 문을 닫게 된다.

1981년 정상태 MBC 프로듀서에 의해 고 최재만 옹의 울산 쇠부리 소리가 발굴됐고, 삼한시대 이래의 제철 유적으로 달천철장의 위상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장인 집단에 의한 제철 기술의 전승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단야구 유물은 당시 제철 기술을 가진 장인 집단이 고신라 사회에서 비교적 지배계층에 속했음을 말해 준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제철 기술은 관영 수공업체제 하에서 통제되어 오다가 조선시대 후기 들어 각 지역 외공장들이 점차 사영화되기 시작했다. 철기 제작 장인들도 공납 이외에 철기를 추가 제작해 시장에서 판매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전국에 분포했던 관영 수공업지인 야장은 각 지역 철기를 제작하는 근대적 의미의 대장간으로 변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 달천철장의 경우도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세종조부터로 '세종실록지리지'에 1452년 달천에서 생산된 철 1만2500근이 수납됐다고 명기돼 있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맥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7세기 중엽 무렵 구충당 이의립에 의해 부흥개발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영 철광이자 대장간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달천철장은 통감부 시기 일본인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이의립 일가에 의해 운영됐다.

 

울산쇠부리축제 추진위원회 정재화 사무국장은 울산 달천철장 유적의 가치가 제대로 재조명되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 했다.
울산쇠부리축제 추진위원회 정재화 사무국장은 울산 달천철장 유적의 가치가 제대로 재조명되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 했다.

 

조선시대 제철 기술의 복원, 철강왕 구충당 이의립

이의립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태어났다. 광해군 13년은 임진왜란이 있은 지 30년 지난 시기였다. 21세에 부친이 별세하자 3년 상을 치른 이의립은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사람이 남의 자식이 되어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그 어버이가 기세(棄世, 세상을 버림)하였을 때는 그 정성으로써 마땅히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철(礵鐵)과 유황(硫黃)이 없어 타국에 의존하여 왔으므로 지난해에도 삼전도(三田渡,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에 비(碑)가 서지 않았는가... 다른 나라와 꼭 같은 산천이 있는 우리나라에 철과 유황이 없을 까닭이 없다. 내 아무리 소양이 없을지라도 지성으로 팔도강산을 편답(遍踏)하여 탐광(探鑛)을 해서 우리 국가 병농(兵農)에 도움이 되게 하리다.”

이민족의 침공에 굴복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철과 유황을 생산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개탄해 철과 유황을 찿아 보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북구청 쇠부리축제장에 재현된 쇠부리로. 맥이 끊어진 제철기술을 복원하는 작업은 힘겨운 작업이다.
북구청 쇠부리축제장에 재현된 쇠부리로. 맥이 끊어진 제철기술을 복원하는 작업은 힘겨운 작업이다.

 

10년의 고난, 돌고 돌아 고향 마을에서 달천광산 발견

이의립은 10년 동안 영남에서 호남으로, 다시 발길을 북으로 돌려 서북으로 관동으로 철을 찾아 다녔다.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을 돌아 삼각산, 속리산, 태백산, 소백산, 지금의 지리산에 이르는 험한 길을 남김없이 다 밟았다. 돌다 돌다 발길은 다시 고향 땅인 울산에 이르게 되었고 울산을 지나 경주 들어서는 어느 객주집에서 하룻밤을 쉬게 됐다.

밤에 꿈속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갈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튿날 까치 한 마리가 우는 방향을 따라 갔더니 달내산(達川山)에 이르러 갑자기 사라졌고 마침내 철광산을 발견했다. 천신만고 끝에 철광은 얻었지만 그것을 제련해 ‘쇠’로 만드는 일은 앞으로 또 넘어야할 어려운 관문이었다. 경주와 언양의 중간인 반곡에서 비상(비소 결정체)을 얻어, 철광을 녹일 때 비상을 불어 넣어서 쇠를 얻는 제련 방법을 발견했다.

많은 쇠를 얻는 데 성공한 그는 군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쇠를 만들어 훈련대장에게 바치고 철환, 연철, 솥 등도 대량으로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 백성들의 생활에 가장 요긴한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 솥이었고, 그는 솥을 많이 만들어 얻은 자본으로 유황을 캐는 비용을 마련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동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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