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장으로 통한다, 남창역
모든 길은 장으로 통한다, 남창역
  • 황주경 시민기자. 시인
  • 승인 2018.10.0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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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남창역 전경, 신역사 신축 후에 더 보존된다.
남창역 전경, 신역사 신축 후에 더 보존된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은 한 국가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온라인 결제가 보편화된 요즘은 세금징수가 초광속으로 이루어지지만, 쌀, 베, 특산품 등 현물이 곧 세금이던 시절에는 이를 걷고 보관하여 운반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팔도 곳곳에 세곡창을 두어 구렁이알 같은 세금을 관리했다. 동해남부선이 관통하는 울주 온양 일대는 예부터 임금님께 쌀을 진상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곡창지대였다. 이곳에 남창, 서창, 화창 등 세곡창에서 유래된 지명이 유독 많은 이유다.

한가위 대목 앞에 남창역南倉驛을 찾았다. 울산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에 위치하는 역이다. 1935년 12월에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여객업무를 지속하고 있는 곳이다. 2002년에 역사驛舍를 전면 보수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형태를 대체로 보존하고 있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105호로 지정됐다. 전면에 ‘ㅅ’자형 박공지붕을 얹었으며 후면부에는 두 개의 박공지붕을 겹쳐 한껏 멋을 부렸다. 2020년경 복선사업이 완료되면 현재의 역사는 보존하고 지금보다 조금 북쪽에 들어설 신역사에 역무기능이 옮겨간다.

열차에서 내리면 복선 전철사업이 한창이라 구내는 어수선하다. 대기실로 들어서면 작은 규모지만 앙증맞은 옹기들이 그야말로 옹기종기 앉아 승객들을 반긴다. 남창역 인근에 외고산 옹기마을이 자리한 까닭이다. 남창역은 역사뿐만 아니라 신설 당시의 부속 건물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일부러 찾는 이에게는 볼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역사 화장실은 옛 창고를 개조한 것이고, 역사 우측편으로 40여미터 남짓 걸어 들어가면 일제 때 지어진 철도관사 4채도 그대로 남아 있다. 2채는 얼마 전까지 살림집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는 3채만 남아있다. 폐가가 되어 을씨년스럽지만, 역사보다 더 큰 규모의 관사를 보면 남창 일대에서 벌어진 일제의 자원 수탈 정도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일제는 열차 개통과 동시에 남창에 새 곡물창고를 지어 수탈을 쉽게 했다.

 

남창역 대기실에 전시 중인 옹기
남창역 대기실에 전시 중인 옹기

 

남창장 풍경. 모든 길은 장으로 통한다고 했다. 남창역에서 도로만 건너면 바로 남창장이다. 오일장으로 삼일과 팔일에 장이 선다. 1916년에 개설된 장은 백년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남창장 역시 남창역처럼 외고산 옹기마을을 앞세워 그 이름마저 ‘옹기종기시장’으로 바꿨다.

 

꽃전에 가을꽃을 사러 나온 할아버지
꽃전에 가을꽃을 사러 나온 할아버지

 

남창장, 한가위 대목장 보기가 한창이다
남창장, 한가위 대목장 보기가 한창이다

 

추석대목을 앞둔 남창장은 제수를 사려는 시민들로 왁자했다. 평소 장이 서면 온양읍민은 물론 울산, 부산에서도 장 구경 오는 사람이 많다. 주말과 장이 겹치면 대운산 등산객과 간절곶 관광객이 선지국밥집, 파전집, 국수집을 찾아와 장터 분위기를 더한층 고조시킨다.

점심때를 훌쩍 지나 장터선지국밥집에 앉았다. 100여년 전통의 선지국밥은 남창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식당은 늦은 점심인데도 식사 중인 손님이 많다. 국밥이 나오기 전에 남창막걸리 한 병을 시켜 목을 축였다. 시원한 대운산 물로 빚어 목 넘김이 좋은 막걸리다. 안주로 밑반찬을 챙겨주던 국밥집 주인장에게 식당의 역사를 묻자 “오래됐지에. 어릴 때 먹던 맛을 찾아 백발이 되어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지에, 얼마 전에도 서울에서 큰 벼슬 한 사람이 아이까지 데리고 와서는 국밥 한 그릇씩 뚝딱하고는 포장까지 해 갔지에”라고 한다.

 

선지를 건져 보이는 국밥집 아주머니
선지를 건져 보이는 국밥집 아주머니

 

음식만큼 유년의 그리움을 자극하는 일이 또 있을까? 맛의 기억을 찾는 일은 고향을 찾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그때 그 시절 그대로 변함없이 기다리는 국밥집은 고향 그 자체가 아닐까? 남창이 고향은 아니지만 오래도록 시장을 지키는 국밥집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남창선지국밥은 남창우시장에서 비롯됐다. 소뼈로 우려낸 국물맛이 특유의 시원함과 깔끔함으로 입안을 즐겁게 한다.

식사를 마치고 장구경에 나섰다. 한가위 대목장은 어물전, 과일전, 과자전 등 제수용품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회 썰어주는 아주머니가 파닥거리는 돔을 대야에서 막 건져 올리는가 하면, 시장 뒤쪽에서는 파전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개천 건너 상서, 하서 마을에서 왔다는 할머니들이 열무, 배추, 파 등을 좌판에 펼쳐놓았다. 장날마다 갖은 농산물을 내다 팔아 푼돈 만지는 재미가 솔찮다고 한다. 그 돈 다 벌어서 뭐 하실 거냐는 질문에 추석 때 대학생 손주들 용돈 줄 생각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은근히 공부 잘하는 손주 자랑도 빼놓지 않는다.

 

인근 농가에서 갖은 채소를 들고 나와 좌판을 펼친 할머니들
인근 농가에서 갖은 채소를 들고 나와 좌판을 펼친 할머니들

 

시장 가장자리에서 모자전을 차린 최관길(68세)씨에게 요즘 경기를 묻자 예전 같지 않지만 그런대로 남창장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 강원도 평창 도암이 고향으로 해운대 반송에 집을 둔 아저씨는 오일장을 찾아다니며 장돌뱅이 생활을 한다고 했다. 철장사인 모자장수는 11월이 비수기이며 행락객이 많아지는 봄, 가을, 추위가 드는 12월에 벌이가 좀 낫다고 했다. 파전집 아주머니께 오늘 장사는 어땠는지를 묻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바란다.”며 전 뒤집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장터끝 원두막에 옹기종기 앉아 담소중인 남창장 어르신들을 만났다. 우신융(75세) 할아버지는 예전의 남창장은 거름지고 장에 와서 막걸리 한 사발 하고 외상을 달아놓고 갈 정도로 정이 넘치던 곳이었다며 옛 장터를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면사무소 앞에 조그맣게 섰던 장은 쌀전, 어물전, 건어물전이 있었고, 한편에는 우시장도 섰는데 그 곁에는 포장을 치고 장사하던 국밥집이 있었다. 소 판 거금을 노름판에서 날리고는 논바닥에 드러누워 주정하던 사람도 더러 있었다. 파장 끝의 장사꾼들은 보자기를 이고 지고 해거름의 남창역으로 스며들었다.

 

남창장 정자에서 담소 중인 어르신들
남창장 정자에서 담소 중인 어르신들

 

외고산 옹기마을. 남창장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 울주군 온양읍 고산리에 외고산 옹기마을이 있다. 전국의 옹기 50%를 생산하는 곳이다. 남창이 나랏님의 곡식창고였다면 외고산 옹기마을은 서민들의 식품저장고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957년 경북 영덕에서 옹기장인 고 허덕만 선생이 터를 잡고서부터 옹기마을이 형성되었다. 질 좋은 점토, 적당한 구릉이 가마를 만들기에 적합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150세대 300명 넘는 사람이 옹기를 만들었다. 지금 남은 옹기사업 종사자는 40명이고, 지방무형문화재 옹기장이 8명만이 남았다.

옹기마을의 경사진 가마를 보노라니 절로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가 생각났다. 젊은 조수와 눈이 맞아 도망간 아내, 독짓는 솜씨에서도 젊은이에게 열패하고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송노인은 최후를 가마 속에서 마감한다. 질그릇 대신 스텐그릇과 플라스틱 그릇이 등장한 우리의 근현대사처럼 어느 순간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간 옹기와 송노인의 삶이 닮았다.

 

외고산옹기마을 가마, 멀리 옹기박물관이 보인다.
외고산옹기마을 가마, 멀리 옹기박물관이 보인다.

 

다행히 최근 들어 전통 옹기의 우수성을 알고 수요가 많이 늘었다. 외고산 옹기마을 역시 세계옹기엑스포, 매년 옹기축제를 치르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옹기는 재료의 특성상 가마 안에서 고열로 구워지는 동안 숨구멍이 생긴다. 그 숨구멍 탓에 곡식이나 장류가 신선하게 보존된다. 옹기에 담은 김치맛과 고무대야에 담은 김치맛을 어찌 비교하리오.

마을을 산책하며 해거름에 빛나는 옹기를 구경하면서 그 옛날 지게에 옹기를 지고 다니던 옹기장수들이 생각났다. 이상국 시인은 어린가을이라는 시에서 옹기장수를 이렇게 그렸다.

 

어린 가을 / 이상국

 

옹기 장수가 왔다

어느날 서리처럼 왔다

지게눈을 한껏 높이고

하늘에 닿을 듯 자배기며 동이를 지고 왔다

감나무 이파리가 상기 퍼런데 일찍도 왔다며

어머니가 날 멍석을 치워주자

입동 전 첫물을 지고 가마를 떠났단다

산그늘 아래 우리집 누에방에 짐을 풀고

한 사날 바꿈이를 하고 나면

그는 또 바람처럼 떠날 것이다

옹기 장수가 왔다

양양의 가을도 잘했지만

아래 데도 시절이 좋았다며

머릿수건으로 탁탁 몸을 터는데

묵은 담배냄새가 났다

언젠가 이런 가을이 있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황주경 시민기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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