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도 보은 장내에서 교조 신원과 반외세를 외쳐
동학도 보은 장내에서 교조 신원과 반외세를 외쳐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0.10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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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동학의 등장에 두려움을 느낀 기득권

1893년 2월 11~14일까지 전개된 동학도들의 광화문 복합상소에 대해 고종은 집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면서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연이어지는 유생들과 관리들의 상소와 함께 동학도와 민중들이 붙인 방문과 격문에 두려움을 느낀 서구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탄압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2월 28일 고종은 국법 준수와 민생 안정을 내세워 동학을 버리지 않는 자를 법에 따라 징계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동학에 대한 탄압은 고종의 명령이 있기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학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조정에서는 동학도들을 무지몽매한 잡배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2월 14일 <승정원일기>의 고종과 대신들의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동학도들은 잘 조직되어 있었고 의관을 갖추고 격식을 차려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학도들의 주장은 단순히 교조 신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정의 쇄신과 민생의 안정, 그리고 반외세를 주장함으로써 민중들의 염원을 주장했다. 기득권층이었던 유생들은 동학의 등장으로 영향력이 약화될까 두려워했다.

열강의 힘을 뒤에 업은 천주교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조정이었지만 우리 땅에서 만들어진 동학에 대해서는 유독 강경했다. 조정에서는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동학과 서학에 다른 잣대를 들이댔다. 이 시기 기득권들은 서학보다는 오히려 동학의 성장에 더 큰 두려움과 위기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만큼 동학은 짧은 시간에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성장했다. 그리고 동학 성장의 중심에는 해월이 있었다.

 

해월, 전국의 동학도에게 보은으로 집결하라고 명령

2월 14일 광화문에서 해산한 동학도들은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편안하게 종교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 집에 도착했지만 그들 앞에는 포승줄과 몽둥이를 든 포졸들이 나타났다. 조정의 탄압에 집에 머물 수 없게 된 동학도들은 대도소가 있던 보은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보은의 대도소로 내려온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을 지휘했던 서병학과 손병희 등도 조정의 탄압에 분노했다. 보은까지 올라오기 어려운 전라도의 도인들은 삼례와 금구 원평으로 모여들었다.

3월 10일은 수운의 순도일이었다. 수운의 순도제례를 옥천군 청성면 거포리 갯밭에 있는 김연국의 집에서 거행했다. 이 자리에는 해월을 위시해 손병희, 이관영, 권재조, 권병덕, 임경준, 이원팔, 조재벽 등 10여 명의 두목들이 참여했다. 이날 동학 지도부는 광화문 복합상소 이후 대책을 강구했다. 두목들은 해월에게 “아직 선사(先師)의 신원(伸寃)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각 지방에서 도인들이 모두 도탄(塗炭)에 빠졌으니 보유(保維)할 수 있는 방책(方策)을 지시하소서.”라고 수운의 신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신원운동을 지속할 것을 요청했다. 해월도 같은 마음이었다. “제군들은 각지에 통유(通諭)하여 팔역(八域)의 도인을 장내(帳內)로 일제히 모이게 하라”고 답을 해 전국의 도인들을 집결시켜 실력행사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보은 교조신원운동 광경. 경주 황성공원 해월 최시형 동상에 보은 교조신원운동의 광경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장내리에 빈틈이 없이 동학도인들이 가득차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보은 교조신원운동 광경. 경주 황성공원 해월 최시형 동상에 보은 교조신원운동의 광경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장내리에 빈틈이 없이 동학도인들이 가득차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해월은 비장한 각오를 “통유문”에 담아 전국의 접주들에게 발송했다.

(전략) 우리 모두 사문(師門)의 화에서 살아남았으니, 아 스승님의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그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자애롭고 각기 생업에 충실하면 큰 혜택을 베풀어 소원을 들어주려 했으나 지방 관속들은 임금의 홍은(鴻恩)을 입을 생각은 않고 백방으로 침탈하는 것이 전보다 더해가고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 빠져서 망하게 하려 하니, 비록 편안하게 살려고 하여도 어찌 할 수 있으랴. 생각다 못해 큰소리로 원통한 일을 진정하고자 이체 포유하노니, 각포(各包) 도인들은 일제히 모여라. 하나는 도를 지키고 스승을 받드는 데 있으며, 하나는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계책을 바라는 데 있다.

통유문에서 특히 강조한 것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이었다. 전국의 도인들에게 통유문을 발송한 후 동학 지도부는 충청감사, 경상감사, 전라감사에게 ‘합하(閤下)에게 엎드려 빈다’라는 글을 보냈다. 합하란 지방장관인 감사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보은 취회 결정이 난 직후에 통유문과 지방장관에 보내는 글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동학 지도부에는 신원운동을 계속할 것이라는 지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방장관에 보낸 글을 괘서(掛書)로 만들어 3월 11일 보은의 삼문 밖에 붙였는데 이는 동학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지방장관에게 보낸 글에 “지금 왜놈과 양놈들이 이 나라 중심부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있다. … 우리는 죽기로 서약하고 왜놈과 양놈을 쓸어버리고 나라에 보답하는 의리를 다하고자 일어났다.”라고 하여 반외세를 전면에 내세웠다.

 

동학도 수만 명 보은 장내에 집결

해월의 명이 떨어지자 각지의 접주들은 도인들을 모아 보은 장내리로 향했다. 수운의 순도제례에 참여했던 청주 접주 권병덕은 다음날 청주로 와서 도인들을 이끌고 13일에 장내로 들어왔다고 했는데 그때 이미 많은 도인들이 모여 있었다고 했다. 대도소가 있던 보은 장내리에는 이미 많은 동학도들이 모여 있었다. 해월은 15일에 보은의 대도소에 도착했다. 당시 이 모습에 대해 “각포 도인들이 마치 바람이 일며 조수가 솟구치듯, 구름처럼 메이고 안개처럼 모여들어”라고 기록할 정도로 많이 모여들어 장내리 들판은 동학도들로 넘쳐났다.

3월 13일부터 보은과 가까운 접의 도인들이 집결하기 시작했고 해월이 도착한 15일에는 1만 명이 넘는 인원이 장내로 몰려들었다.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이 충청감사에게 보고한 문건에는 “13일부터 동학인들이 모여들어 낮에는 장내리 뒤쪽 천변에 유진했다가 밤이 되면 본동 민가나 부근 민가에 유숙하였고, 날마다 모여드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라고 하여 13일부터 본격적으로 보은에 동학도인들이 집결했다고 했다. 이중익은 15일부터는 관리를 매일 장내로 보내 상황을 탐지했다. 관리들이 동학도들에게 왜 좁고 피폐한 장내로 모이느냐고 물어보니 “이 마을 앞은 각처로 통하는 길이 있어 각처 동학도들이 모이기가 편하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해월이 애초에 보은 장내에 대도소를 설치한 이유도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보은 장내는 동학도들로 넘쳐났다.

1만 명을 넘어섰지만 동학 지도부는 다시 동학도들의 집결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다. 아마도 1만 명 정도로는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16일 해월의 명의로 보낸 통문에는 반외세에 대한 내용이 더 강력해졌다. “외적들이 틈을 타서 기회만 엿보고 있다. 절박함이 조석에 놓여 있다. … 왜놈들과는 일월을 같이 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표현이 보일 정도로 보은 교조신원운동에서는 반외세의 기운이 농후했다. 동학 지도부는 보은의 신원운동을 단순히 교조신원이라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 조선 민중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던 국권 수호의 차원으로 접근했다. 즉, 동학은 반외세 운동을 통해 민중과 하나이고 국권 수호를 위한 지향을 갖고 있음을 정부에 알려 교조의 신원까지 이끌어내려는 작전을 썼다.

수만의 동학도가 보은에 모였다는 보고를 받은 충청감사는 이를 즉각 조정에 보고했다. 이 시기 보은으로 모이지 못한 전라도의 동학도들은 삼례와 원평으로 집결했다. 조정에서는 광화문에서 해산했던 동학도들이 충청도의 보은과 전라도의 삼례와 원평에 집결했다는 소식에 다급해졌다. 조정에서는 광화문에서의 신원운동에 대해 탄압하자 이에 대항해 동학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했다. 탄압을 하면 동학도들이 수그러들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동학도들은 전국의 도인들을 모아 실력행사에 나섰다.

 

어윤중(魚允中)을 양호도어사(兩湖都御史)로 보은에 내려 보내

3월 16일에 조정에서는 “명에 따르지 않으면 군율에 따라 다스리겠다”고 하면서 강압적으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보은관아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동학인령(동학도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보은읍과 장내리에 내걸었다. 삼례와 원평에도 같은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튿날인 3월 17일 어윤중(魚允中)을 양호도어사(兩湖都御史)로 임명해 보은으로 내려 보냈다. 어윤중은 18일 남대문을 출발해 보은으로 향했다. 어윤중은 남대문을 나서며 자신의 임무를 기록한 칙유문(勅諭文)을 공개했다. 고종이 내린 칙유문에는 “곧바로 취회처로 내려가 효유하여 각기 돌아가도록 하게 하라. 만일 뉘우치지 않으면 이는 항명하는 것이니 경은 즉시 장계를 올려 스스로 처리할 도리를 마련하라. 경에게 마패 하나를 주니 이는 곧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뜻이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고종은 어윤중에게 상황을 파악해서 장계를 올리고 동학도를 해산하라고 전권을 주었다.

 

어윤중 사진(1881년). 고종은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조사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3월 25일 직책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다시 제수하였다.
어윤중 사진(1881년). 고종은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조사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3월 25일 직책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다시 제수하였다.

 

어윤중의 보은 교조신원운동 조사서. 어윤중이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조사하여 올린 장계.
어윤중의 보은 교조신원운동 조사서. 어윤중이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조사하여 올린 장계.

 

어윤중은 3월 25일 보은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보은까지는 4~5일이면 당도할 수 있었지만 그는 바로 보은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중간에 공주에 들어 충청감사에게 지금까지의 동향을 보고받았다. 또한 병영이 있는 청주에 들러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점검하고 보은 장내로 넘어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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