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소년회 불온문서 사건의 주인공, 이동계
언양소년회 불온문서 사건의 주인공, 이동계
  • 이병길 시민기자.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승인 2018.10.1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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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기행

오영수 문학관에 가면 오영수와 관련한 사진이 전시되어있다. 그중에 1941년 이동계의 결혼식 사진이 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 왼쪽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팔짱을 끼고 안경을 쓰고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결혼식 참석한 사람치고 좀 특이한 자세이다. 신간회 울산지회 1주년 기념사진에도 그랬다. 그가 바로 신학업이다. 이 세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그것은 언양소년단이다.

 

이동계의 결혼식 사진. 왼쪽 앞줄 첫 번째가 신학업, 세 번째가 오영수, 신랑은 이동계이다.
이동계의 결혼식 사진. 왼쪽 앞줄 첫 번째가 신학업, 세 번째가 오영수, 신랑은 이동계이다.

 

소년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언양

1920년 전후로 언양청년회가 결성되었고, 김기오와 신학업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강연회, 연예와 체육활동, 야학회 개설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다. 1923년 10월 언양 소년단이 결성된다. 당시 천도교인으로 활동한 김기오의 역할이 컸다. 단장은 김기오였고, 임원은 신말찬(신고송), 이명돌 등이었으며, 창립식은 일본 동경 유학을 하고 상해 임시정부 조사원(調査員)을 했던 신주극(신학업)이 주관하였다.

울산지역에서 소년운동은 언양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고송은 언양조기회를 조직하여 청년회관에 모여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며 체력단련을 하고 장거리 경주도 하였다. 모일 때마다 학교 운동장의 잡풀을 조금씩 뽑은 것이 나중에 정구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신학업, 신영업 형제가 언양에 등장하면서 어린이 운동은 점차 사회변혁 운동으로 변화되어간다. 당시 영화루 근처에 살았던 신고송(1907~?), 오영수(1909~1979), 이동계(1910~1955)는 서로 어울릴 나이였다. 하지만 김기오(1900~1955)와 신학업(1901~1975)은 나이 차이가 있어 삶의 스승 혹은 사회운동의 지도자였다. 훗날의 삶에 비추어보면 오영수는 김기오에, 신고송은 신학업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동계는 신고송이나 신학업 형제에 가까웠다.

 

김동하의 언양소년회 불온문서 사건

1928년 12월 12일 언양소년단의 김동하(金東河, 언양보통학교 6학년, 17세)가 언양순사 주재소 게시판에 “조선독립만세”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부착한 사건이 발생했다. “언양소년회 불온문사건(언양만세문사건)”이다. 언양청년동맹 회원이자 언양소년단 지도자 이동계(19세)와 언양농민조합간부 오문영, 언양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신주극(신학업), 신영업이 검속되었다. 소년들에게 조선독립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을 선동, 교사한 혐의였지만 3명은 석방되었다. 학교는 취조실로 변했고 형사들은 살기가 등등하였고 소년단원들은 가택수색을 당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매일 4~5명씩 울산경찰서로 호출하여 조사했다.

김동하는 1926년 3월 언양소년단에 입회하여 신영업과 이동계 등으로부터 조선독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화지도를 받고 1928년 12월 8일 자기 집에서 “조선독립만세” 광고지를 작성하여 11일 언양주재소 앞 게시판에 붙인 혐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만국기를 그려오라고 하자, 대한태극기를 그려 제출했다는 것이다. 검사는 “나이는 어리지만, 의식은 장래 무엇을 목적하는 확실한 신념을 세워있기에 처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동계의 혐의는 민족의식 고취와 일본상품 불매운동 취지의 발언 때문이었다. 1929년 3월 20일 이동계와 김동하는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는 징역 1년을 구형하였으나, 3월 28일 부산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김동하는 1심을 받아들여 복역하였다. 이동계는 재심 청구를 하였으나, 1929년 5월 21일에 8개월(원심미결구류일수 중 30일 본형 산입)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9년 12월 15일 이동계가 출옥하자 언양청소년회원 외에 동지 100여 명이 비를 무릅쓰고 소년회가를 높이 부르면서 소년회관까지 진행하는 출옥 환영행사를 하였다.

 

언양소년회 불온문서사건 보도(동아일보. 1929.03.23.)
언양소년회 불온문서사건 보도(동아일보. 1929.03.23.)

 

오영수의 동생, 오호근의 언양격문사건

언양은 1923년 언양보통학생들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1927년의 일본인 가리아의 등억 숯 장사꾼 김경도 치사사건, 1928년의 소년회불온문서 사건 그리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시국이 긴장된 상태였다. 1930년 1월 28일 아침 언양주재소 부근에 격문이 산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언양격문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울산 경찰서는 소년회 간부와 회원 8명을 형사대를 급파해 검거하고 자택과 단체 회관을 수색한다. 주모자는 언양소년회원 오호근(吳浩根, 18세)이었다. 오호근은 울산 본서로 송치되고 다른 사람들은 풀려난다. 오호근은 이동계의 ‘언양소년회 불온문서 사건’의 증인으로 신문조서를 받았었다. 그는 소년회원으로 “조선이 거듭 회복해야 하는 물품은 조선인 상점에서 사고 일본인에게 사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들었다고 진술했었다.

오호근은 소설가 오영수의 셋째 동생이다. 현재 사건의 자세한 경위를 밝혀줄 판결문은 남아있지 않고, 형사사건부와 집행원부만 남아있다. 오호근은 보안법 위반으로 1930년 3월 1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1심 징역 10월을 구형받았으나, 1930년 4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5년(법정 미결 구류 통산 20일 이유 있음)을 받았다. 당시 오영수는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던 시절이다. 동생의 사건에 오영수가 어떤 입장을 보였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당시는 끼니를 굶기까지 하는 궁색한 시절이었다.

 

이동계의 어린이 운동과 청년운동

이동계(李東桂, 이동개 李同介‧李東介, 1910~1955)의 집은 언양면 서부리 31번이다. 정인섭과 신고송의 생가 바로 앞집이다. 오영수 집과는 100미터도 안 된다. 오영수, 이동계, 오호근은 각 1~2살 차이니, 서로 알고 지냈으며, 언양보통학교에 다니며 언양소년단에서 같이 활동했다. 이동계의 결혼식에 오영수가 들러리 서기까지 했으니 대단히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동계는 7세 이상 18세 미만을 회원으로 하는 언양소년단에 1925년 4월 입회하여 1928년 8월 탈회할 때까지 소년단의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신고송의 언양조기회 운동 이후 언양소년단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어린무리들아! 모여오라! 소년군(少年軍)의 깃발 밑으로!” 구호 아래 1926년 5월 30일 언양소년연맹 제1차 정기대회가 열렸다. “건전한 청년 양성, 정의와 성실로 사회봉사, 소년단체 통일”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김기오는 검사위원, 이동계는 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언양소년회 불온문서 사건으로 출소한 후 이동계는 굴하지 않고 청년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 6월 29일 울산소년동맹 설치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언양청년동맹원이었던 이동계(22세)는 1931년 4월 15일 양산농민조합 소년부원들이 지주 배영복의 사위 최지태 등과 충돌한 ‘양산읍내분규사건’ 때 소년부원 이영건(李永健)에게 격려편지를 보냈다. 이 일로 경찰법 위반으로 구류 15일을 받았다. 사람들은 너무 가혹하다며 일경을 비난하였다. 당시 언양의 신영업은 양산농민조합, 신간회 양산지회와 양산청년동맹에 활동하고 있었다.

1932년 5월초 “언양격문사건”이 다시 발생하여 경찰은 신주극(신학업), 박성우, 이동개(李東介)를 검거 취조하였으나 진범인 홍정수(洪正守)가 검거되어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어떻게 종결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일련의 사건을 보면 언양소년단은 단순한 어린이운동을 넘어 조선독립과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는 조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의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 이후인, 11월 1일 이동계는 신영업과 함께 동아일보 양산지국 기자가 되었다. 1933년 3월 조선중앙일보 언양지국 기자로 발령을 받아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중앙일보는 1933년 여운형이 운영한 사회주의적 진보 신문으로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사건과 연관되어 자진 휴간 후 1937년 폐간되었다.

 

울산적색독서회 사건

이동계는 이미동, 이규문 등과 함께 서생면 입암리에서 1933년 8월부터 무산 아동 30여 명에게 야학을 하며 소비에트 국기를 자기 국기처럼 인식하도록 교육한 ‘서생적화교육’사건으로 치안유지법 등으로 1934년 4월 검거되었지만 석방되었다. 이미동은 울주군 서생면 평동마을 출신으로 동래고보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펼쳐 왜경을 피하려 폐결핵 환자로 연기까지 한 항일운동가였다. 1934년 11월에는 소비에트혁명기념일 대구격문 사건으로 이동계는 가택수색을 당하였다.

그 후 이동계는 울산 서생의 이미동과 연관된 울산적색독서회 사건에 연루된다. 1934년 9월 경주에서 거행된 ‘신라제’ 때 거리에 세워둔 등롱(燈籠)을 파괴한 데서 단서가 되어 “경주적색비밀결사사건”이 드러난다. 적색운동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경주경찰서는 100여 명을 검거하고 경주 인근 경찰 40여 명을 동원하여 8개월 동안 조사를 하였다. 경주, 포항, 감포 지역에 적색 독서회를 조직하고, 적색농민조합 조직을 준비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경주적색비사건은 울산까지 확대되었다. 1935년 3월에 “울산독서회 적색비밀결사사건”으로 전개되어 울산의 이미동(28세), 이동개(李同介, 27), 박상선(25세), 이봉술(30세), 김임출(25세) 등 5명이 경주 경찰에 검거된다.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사회 수립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한 혐의로 그들은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으로 부산법원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러다 1935년 5월 울산의 김영활이 사망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울산사회운동선상에서 열렬한 투사로서 경주적색사건에 연루되어 조사 받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치료하던 중 사망하였다. 그때 나이 27세였다.

“울산적농사건”, “울산적색노조사건”, “울산독서회적비사건”. 사건명은 달라도 검거되어 조사받는 사람들은 동일하였다. 울산 방어진 메이데이 격문 사건과 연관되어 방어진과 정관면의 청년 총 30여명이 조사받는데 적색사상 선전과 관련 있었다.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부산 검사국은 1935년 9월 27일 이미동, 박상선, 이동계, 이봉술, 김임출을 기소하였고 박학규와 최도준을 불기소 석방하였다.

1936년 6월 26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고, 1937년 3월 30일 판결이 나왔다. 이동계는 징역 2년이었다. 이 사건 이후 언양 울산의 독립 민족운동가들은 잠복에 빠진다. 당시 ‘독서회’는 단순히 책을 읽는 모임이 아니고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벌였던 모임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사기간이 길었음에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관련 판결문이 없기 때문이다. 출옥한 후 1941년 11월 17일 이동계는 교사인 김소화와 결혼을 한다.

 

울산적색노조사건 보도(조선중앙일보. 1935.06.09.)
울산적색노조사건 보도(조선중앙일보. 1935.06.09.)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산다는 것

이동계의 아들 이건욱 씨는 “두 살 이후 아버지란 세 글자를 마음 놓고 입 밖에 소리 내어 불러본 적 없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들의 자료 조사 결과, 이동계는 2005년 광복 60년을 맞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고, 아들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대신 받았다. 하지만 언양소년단의 김동하, 오호근, 홍정수는 그렇지 않다.

이동계의 평생 직업은 기자가 유일했다. 언양에서 신문지국도 운영하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작천정에서 ‘내 피리를 내 마음대로 불게 해다오’란 제목의 노래를 직접 지어 불렀다. 집에서 악보를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정구를 상당히 잘 해서 집에는 영남연식정구대회 우승기나 트로피가 있었다고 한다. 1938년 8월 양산 통도사 불교전수학교에서 주최한 제2회 남조선개인정구대회에 참가하여 당시 통도팀과 언양팀의 복식 경기에서 12번의 듀스어게인을 하는 치열한 경기에서 이동계가 속한 언양팀이 3대 4로 이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복원된 언양읍성 남쪽부분의 앞쪽에 언양면소, 성벽 끝쪽에 정인섭과 신고송의 생가, 그리고 그 앞 2층집과 단층집이 이동계가 살았던 집이다. 성벽 너머에 오영수가 살았다.
복원된 언양읍성 남쪽부분의 앞쪽에 언양면소, 성벽 끝쪽에 정인섭과 신고송의 생가, 그리고 그 앞 2층집과 단층집이 이동계가 살았던 집이다. 성벽 너머에 오영수가 살았다.

 

이동계는 광복절을 울산경찰서에서 맞이하였다. 당시 서장이 오늘 중대 발표가 있으니 같이 듣자고 하여 알았다고 한다. 광복의 기쁨을 울산상사주식회사 차용규에게 트럭을 빌려서 울산공립농업학교(현 울산공고) 학생들을 차에 태우고 방어진, 언양 방면으로 4대를 빌려 만세를 불렀다. 또 건준위 활동으로 언양 남천에서 일본 경찰의 무기를 회수하는 일을 하였다. 언양 보도연맹 요직으로 활동하다가 우익의 핍박이 심해 울산 병영의 처가로 이사를 했다. 이동계의 부인은 자식이 피해를 입을까봐 이동계와 관련된 자료를 깡그리 없앴다.

아직도 많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가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좌익 활동가들의 후손은 지금도 과거를 밝히기를 꺼려하기도 한다. 어떤 독립운동가는 단지 감옥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48년 이후 남한 사회는 많은 역사적 변동이 있었다. 누가 정권을 잡는가에 따라 좌우익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일관성 없는 역사적 평가로 인해 그 후손들은 여전히 역사적 증언을 주저하고 있다. 일제에 부역한 사람에 대한 명확한 평가와 처벌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대에 진실하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활했던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또 국가 유공자의 기준이 형벌을 받은 유무에 좌우되는 현실도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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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길 시민기자.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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