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장내에 모인 도인들, 동학사상을 실천하다
보은 장내에 모인 도인들, 동학사상을 실천하다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0.17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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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장기적인 신원운동을 위해 진영 갖추어

보은 장내에 모인 동학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1893년 3월 17일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려 동학도들은 민가에서 머물렀다. 동학 지도부는 장내리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논의를 거듭했다. 이튿날인 3월 18일 날이 개자 동학도들은 옥녀봉 남쪽 기슭에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돌담을 쌓은 위치는 장내리의 ‘윗말’에서 서원 쪽으로 약간 올라간 왼쪽 기슭이었다.

동학도들은 장내리 들판에 돌로 성을 만들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동학도들을 수용했다. 성 안에서는 포접별로 구획을 정해 활동했다. 3월 19일 보은군수가 충청감사에 보낸 글에 동학도들의 만들었던 돌성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산 아래 평지에 석성(石城)을 쌓았다. 길이는 백여 보(步)였고 넓이도 백여 보였고 높이는 반길 정도였다. 사방으로 출입문을 두었고 돌담에 따라 깃발도 내걸었다. 낮에는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내걸은 깃발은 정연히 줄지어 있었다. 저녁이 되면 나와서 인근 각 동리에 가서 숙식하였다. 언제 물러가게 될지 알 수 없으며 매우 이상해서 보고한다.

동학도들이 쌓은 돌담은 마치 성벽처럼 보였다. 돌성의 높이는 반길 정도라고 하였는데 환산하면 대략 80~90cm 높이다. 돌성의 길이는 백여 보라고 했는데 한 보가 약 50cm정도라고 하면 약 50m로 볼 수 있다. 돌담을 쌓은 이유는 3월이면 바람이 많이 부는 시기였기 때문에 바람과 먼지를 막는 역할을 했다. 또한 동학도들을 한 곳에 집결해 행동 통일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동학도들은 이 안에서 주문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동학이 추구하는 세상에 대해 논의했다.

1993년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와 보은군에서 장내리 동학유적을 조사해 돌담의 흔적을 확인했다. 보고서에서 “장내리 동학도 집결지의 성터 유적은 동-서로는 강돌이 쌓여진 곳이 90여m 남아 있으나 성벽으로 보이는 곳은 70m정도이고 나머지 부분은 폭이 매우 좁고 낮은 논둑에 강돌이 흩어져 있다. 남-북으로는 거의 파괴되고 일부만이 강돌로 쌓여진 성터흔적이 있으나 원래 성터는 북쪽에 있는 농업용수로의 둑이 있는 곳까지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 약 36~42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은 되나 정확한 규모는 정밀조사가 실시되어야만 그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라고 해 동학도들이 성벽을 만든 성벽과 성터 유적을 확인했다.

 

보은 장내리에 남아있는 돌담. 옥녀봉과 논이 맞닿은 곳에 보은 교조신원운동 당시 동학도들이 쌓은 돌담 일부가 남아 있다.
보은 장내리에 남아있는 돌담. 옥녀봉과 논이 맞닿은 곳에 보은 교조신원운동 당시 동학도들이 쌓은 돌담 일부가 남아 있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깃발 내걸어

동학은 접을 중심으로 운영됐는데 1884년부터 포라는 단위를 사용했고 1890년대 동학 세력이 성장하면서 포를 중심으로 한 조직이 보편화되었다. 포는 접의 상위 개념으로 몇 개의 접이 하나의 포를 형성했는데 포의 이름을 정해주지 않았을 때에는 대접주의 이름을 따서 손병희포, 김덕명포와 같이 대접주의 이름을 포의 이름으로 불렀다. 해월은 보은 취회를 전개하면서 포명을 지어주었다.

3월 18일 대도소에서는 대접주와 포의 이름을 정해주었고 20일 보은에 집결한 포에서는 포명을 깃발에 써서 돌담에 내걸었다. 3월 20일 동학도들은 본격적으로 교조신원과 반외세 활동에 들어갔다. 동학도들은 척왜양창의라는 깃발을 높이 내걸어 집회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이날 보은관아에서는 포 이름을 적은 깃발이 나부끼는 장내리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제각기 이름을 적은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큰 깃발에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오색 깃발은 다섯 방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보다 기폭이 작은 중기에는 충의(忠義), 선의(善義), 상공(尙功), 청의(淸義), 수의(水義), 광의(廣義), 홍경(洪慶), 청의(靑義), 광의(光義), 경의(慶義), 함의(咸義), 죽경(竹慶), 진의(振義), 옥의(沃義), 무경(茂慶), 용의(龍義), 양의(楊義), 황풍(黃豊), 금의(金義), 충암(忠岩), 강경(江慶), 그 나머지의 작은 깃발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보은관아에서 충청감사에 보고한 글에 나오는 중간 크기의 깃발의 글이 바로 포의 이름이다. <동학사>와 관변자료, 천도교단측 기록을 살펴보면 이때 보은에 집결한 대접주는 40명이 넘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확한 포명과 대접주의 이름은 모두 다 밝혀지고 있지 않다. 현재까지 보은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했음이 밝혀진 대접주는 28명이다. 포와 대접주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충의포대접주 손병희, 충경포대접주 임규호, 청의포대접주 손천민, 문청포대접주 임정준, 옥의포대접주 박석규, 관동포대접주 이원팔, 호남포대접주 남계천, 상공포대접주 이관영, 금구포대접주 김덕명, 무장포대접주 손화중, 부안포대접주 김낙철, 태인포대접주 김개남, 시산포대접주 김낙삼, 부풍포대접주 김석윤, 봉성포대접주 김방서, 옥구포대접주 장경화, 완산포대접주 서영도, 공주포대접주 김지택, 고산포대접주 박치경, 청풍포대접주 성두한, 내면포대접주 차기석, 홍천포대접주 심상훈, 인제포대접주 김치운, 예산포대접주 박희인, 정선포대접주 유시헌, 대흥포대접주 이인환, 덕산포대접주 손은석, 장흥포대접주 이방언, 아산포대접주 안교선, 보은포대접주 김연국, 서호포대접주 서장옥, 덕의포대접주 박인호

전봉준은 대접주는 아니었지만 고부접주로 보은취회에 참석했다. 이러한 사실은 <동학사>를 지은 오지영이 직접 밝혔다. 해월 최시형의 손자 최익환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10월에 오지영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했던 강의에서 “전봉준 장군이 보은집회에 참석했다.”라고 들었다고 했다. 당시 전봉준은 무장포대접주 손화중과 함께 보은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했다.

동학도들은 보은 장내에 집결해 당당히 포명을 내걸고 주문을 외우며 교조신원과 반외세를 외쳤다. 동학도들이 척왜양 구호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당시 백성들이 외세의 사회경제적 침탈로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서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또한 동학이 백성들의 고충을 대변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대안세력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측면도 강하게 작용했다.

보은 장내리에 모인 동학도들의 인원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편차가 많이 난다. 황현은 <오하기문>에는 보은에 모인 동학도들이 8만 명이라고 했다. 어윤중의 선무사(宣撫使) 장계에는 수만 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일본 외교문서에는 2만3000명, <속음청사>와 청나라의 북양대신인 이홍장에 보낸 전보에는 2만7000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보은군수가 3월 21일에 보낸 보고에는 2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학도의 수치에 관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기록은 보은관아의 기록이다. 보은관아의 보고에는 동학도들이 “매 1인당 돈 1푼씩을 거두었는데 모두 모인 금액이 230여 냥이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보은에 모인 동학도들은 2만3000명이다. 이를 근거로 보은에 모인 동학도들은 2만5000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황현의 8만 명이라는 주장은 허무맹랑하다.

 

"취어(聚語"의 보은관아 3월 20일 탐지 보고문. 문서의 오른쪽 두 번째 줄부터 충의, 선의 등 포명이 나타난다.
"취어(聚語"의 보은관아 3월 20일 탐지 보고문. 문서의 오른쪽 두 번째 줄부터 충의, 선의 등 포명이 나타난다.

 

동학의 정신을 오롯이 실행했던 동학도인

보은에 모인 동학도들은 동학사상을 현실 생활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동학도들 수만 명이 모여 있다는 소식에 장사치들도 보은 장내리로 모여들었다. 떡장수들과 엿장수들은 광주리와 지게를 이고지고 동학군의 돌담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때가 되면 수백 명의 도인들이 엿판이나 떡광주리에 모여들자 장사치들은 한꺼번에 몰린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학도들이 순식간에 떡과 엿을 집어가서 계산을 할 틈조차 없었다. 동학도들이 떠나고 상인들은 엿판과 광주리에 담긴 돈을 세면서 깜짝 놀랐다. 동학도들이 광주리와 엿판에 던져 놓은 돈은 한 푼도 모자라지 않고 정확히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동학도들이 물건 값을 정확하게 지불하자 그 다음날부터는 상인들이 떡광주리와 엿판을 돌담에 놓아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동학도들이 광주리채 들고간 후 돌아온 빈 광주리에는 떡값과 엿값이 정확하게 놓여있었다. 이러한 동학도들의 경제 관념은 수운이 강조한 “물욕교폐(物慾交蔽, 물욕에 빠져버림) 되게 되면 이는 역시 비루자(鄙陋者, 어리석고 천박한 사람)라”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장포대접주 손화중의 도소가 있었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괴치마을의 전경. 손화중은 이곳에서 농민을 수탈하던 최부자집을 도소로 만들어 동학혁명기까지 사용했다.장기적인 신원운동을 위해 진영 갖추어 보은 장내에 모인 동학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1893년 3월 17일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려 동학도들은 민가에서 머물렀다. 동학 지도부는 장내리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논의를 거듭했다. 이튿날인 3월 18일 날이 개자 동학도들은 옥녀봉 남쪽 기슭에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돌담을 쌓은 위치는 장내리의 ‘윗말’에서 서원 쪽으로 약간 올라간 왼쪽 기슭이었다.
무장포대접주 손화중의 도소가 있었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괴치마을의 전경. 손화중은 이곳에서 농민을 수탈하던 최부자집을 도소로 만들어 동학혁명기까지 사용했다.장기적인 신원운동을 위해 진영 갖추어 보은 장내에 모인 동학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1893년 3월 17일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려 동학도들은 민가에서 머물렀다. 동학 지도부는 장내리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논의를 거듭했다. 이튿날인 3월 18일 날이 개자 동학도들은 옥녀봉 남쪽 기슭에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돌담을 쌓은 위치는 장내리의 ‘윗말’에서 서원 쪽으로 약간 올라간 왼쪽 기슭이었다.

 

수만 명의 동학도가 운집해 있었지만 위생적으로 생활했다. 장내리에서는 대소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동학도들은 공주와 삼례, 그리고 서울의 광화문에서도 구덩이를 파서 용변을 처리하고 반드시 흙으로 덮었다. 그러니 수만 명이 모여 생활해도 대소변의 흔적이 남을 리가 없었다. 이는 해월이 집회에서 대소변의 처리 등 위생에 대해 엄격히 타일러 도인들의 몸에 배었기 때문이었다. 대소변뿐만 아니라 침과 코도 함부로 뱉지 못하게 했다. 해월은 <내수도문>에서 “가래침을 멀리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 말며, 침과 코가 땅에 떨어지거든 닦아 없이 하고”라고 하면서 침과 땅에 뱉는 것은 천지부모(天地父母)님 얼굴에 하는 불경한 행위라고 하면서 단속을 시켰다. 이렇게 위생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수만 명이 모여 있어도 큰 탈 없이 집회를 지속할 수 있었다. 위생적이고 질서정연한 동학도들의 모습에 반감을 갖던 백성들도 마음을 바꾸었다.

이러한 동학도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동학은 쌍놈의 도라고 들었는데 하는 행실은 양반보다 뛰어나다.’고 동학을 칭찬했다. 해월의 지도 아래 동학은 백성들과 더욱 친밀해졌고 나아가 새로운 세상을 펼칠 수 있을 희망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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