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과 해월의 만남
어윤중과 해월의 만남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0.2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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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서울 장안이 장안이냐 보은 장안이 장안이다

해월은 “척왜양창의”의 정치적인 구호를 내세웠지만 보은 장내리를 동학사상이 구현되는 공간으로 만들려했다. 보은에 모인 전국의 동학도들은 의복을 갖추어 입고 서로에게 맞절을 하면서 존댓말을 썼다. 이곳에서는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귀천의 차별이 없었다. 도인들 간에 서로를 한울님으로 공경하는 개벽 세상이었다. 이를 본 세상 사람들은 동학을 새롭게 인식했다.

또한 보은의 동학도들은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실천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도인이 그렇지 못한 도인들을 돌보았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보은집회에 모인 교도들이 모두 소와 땅을 팔아 식량과 표주박 발낭(鉢囊) 등을 싸서 짊어지고 갔다.”는 것과 부여유생 이복영(李復榮)이 쓴 <남유수록(南遊隨錄)>에는 “부여(扶餘) 근처의 교도들이 모두 전토(田土)를 팔아 양식을 준비하여 갔으며, 처자와 서로 울면서 이별하였다.”를 보면 동학도들이 서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은은 동학사상이 실현되는 공간이 되어 갔다.

해월이 사회적으로는 신분의 차별도 없고 경제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해소되고 정치적으로는 백성의 의견이 반영되는 세상이 동학이 추구하는 신세계라고 보았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학도들이 시천주와 유무상자를 실천해야 한다고 해월은 보았다. 그래서 보은 장내리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자 “서울 장안이 장안이나 보은 장안이 장안이다.”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다. 동학도인들도 보은 장안을 서울 장안과 같이 후천 세상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보은 교조신원운동 기념 장승. 보은 장안 장내리 교조신원운동 안내판 옆에 설치된 장승으로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기념해 세웠다.
보은 교조신원운동 기념 장승. 보은 장안 장내리 교조신원운동 안내판 옆에 설치된 장승으로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기념해 세웠다.

 

관에서 동학지도부를 탐지

관에서는 동학도의 움직임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관에서는 보은 교조신원운동의 지도부의 이름과 인원수까지 조사했다.

보은집회의 주도자는 수령(首領) 최시영(崔時榮), 차좌(次座) 서병학, 이국빈(李國彬), 손병희(孫丙喜), 손사문(孫士文), 강가(姜哥), 신가(申哥), 경강(京江)·충경접장(忠慶接長) 황하일(黃河一)·서일해(徐一海), 그리고 전라도(全羅道) 접장(接長)으로 이름은 알 수 없는 운량도감(運粮都監) 전도사(全都事) 등이었으며, 보은집회에 모인 교도들의 수는 2만여 명에 이르렀다.

최시영은 해월의 이름인 최시형(崔時亨)의 오기이다. 이국빈은 이관영(李觀永)이고, 손병희(孫秉熙)는 한자를 잘못 기록했다. 손사문은 손천민(孫天民), 강가는 강시원(姜時元), 신가는 신택우(申澤雨)를 말한다. 서일해는 서장옥(徐長玉)이고, 전라도 접장으로 운량도감의 직책을 맡고 있는 전도사는 전봉준(全琫準)이다. 특이한 점은 서병학을 차좌(次座)라고 하여 해월 다음의 직위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서병학이 교조신원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몇몇 기록의 오기는 있지만 관에서는 해월을 비롯해 동학 지도부를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관에서는 3월 20일경 전라도 금구원평에 모인 동학도들 중 일부가 보은으로 합류한다는 내용도 탐지하는 등 동학도들의 동향도 상세하게 조사했다.

 

보은군수, 동학군 해산 종용

3월 22일 보은군수는 동학교도들을 만나 해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은 “오로지 척왜양을 위해 창의하였으므로 감영에서 문서로 지시하고 면전에서 타일러도 그만둘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동학은 사술(邪術)이 아니고 설혹 사술이라 하더라도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처지에서 충(忠)을 의롭게 여기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각처의 유생(儒生)들이 같은 마음으로 죽음을 맹세하고 충(忠)을 본받고자 한다”라고 답변하면서 동학도들의 집결은 위기에 처한 나라에 구하려는 충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산을 거부했다. 이날 동학도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는 유생들과 다름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시 한 번 척왜양을 외치는 격문인 “동학인방(東學人榜)”을 붙였다. 이 방에서 동학도들은 “왜양을 물리치자는 선비들은 죄인으로 잡아 가두고 왜양과 화합하려는 매국자는 국왕이 상을 주어야 하는가”하면서 정부의 개화정책에 저항하는 민심을 담았다.

이튿날인 3월 23일에도 보은군수는 동학도들과 대담을 이어 갔다. 동학도들은 “생령(生靈)들은 방백수령의 탐학무도(貪虐無道)와 토호들의 무단무절(武斷無節)로 도탄(塗炭)의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지금 소청(掃淸)하지 않으면 언제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있을 것인가”라고 하여 척왜양을 위한 반외세와 함께 탐학한 지방관과 토호들의 횡포도 소청하면서 국태민안을 위한 집회임을 강조했다

3월 24일 보은읍에서 군대를 이끌고 올 것이라는 첩보가 전해지자 각 지역 접(接)의 교도들 가운데서는 봉장(棒杖)을 준비해 두는 자들도 있었으나 도소에서는 이를 엄금시켰다. 그러나 군대를 동원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동학도들은 옥녀봉(玉女峰)과 구병산(九屛山)에 망루를 세워 보은 장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동학도 어윤중에게 척왜양 등 6개조 요구

양호도어사(兩湖都御史) 어윤중(魚允中)은 3월 25일 보은에 도착했다. 어윤중이 보은에 도착하자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다시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제수했다. 선무사란 국가의 큰 재난을 수습하는 임시직을 말한다. 어윤중은 보은관아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인 3월 26일 보은 장내리로 들어왔다. 어윤중은 보은 장내리로 오자마자 동학 지도부와 만났다. 동학교단에서는 어윤중과 대담하기 위해 허연(許延)·이중창(李重昌)·서병학(徐丙鶴)·이희인(李熙人)·송병희(宋秉熙, 손병희)·조재하(趙在夏)·이근풍(李根豊) 등 7명을 대표로 선정했다.

선무사 어윤중이 공주영장 이승원(李承遠),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 순영군관(巡營軍官) 이주덕(李周德) 등을 거느리고 직접 속리면 장내리의 집회장소로 찾아와 장막을 치고 동학 대표를 만났다. 정부의 대표와 동학의 대표가 회합한 것은 처음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어윤중은 국왕의 효유문을 전하며 명분 없는 집회의 해산을 종용했다. 이에 대해 동학 대표는 “왜양의 침략으로부터 죽기로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들의 거사를 기뻐해야 할 일인데 왜 명분 없는 모임이라고 해산시키려 하는가”하고 해산을 거부했다. 어윤중의 해산 압박에 동학 대표들은 동학도가 80만에 달한다고 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어 모였다고 강조했다.

동학 대표들은 어윤중에게 ‘척왜양을 할 것, 민씨(閔氏)를 축출할 것, 호포제(戶布制)를 혁파할 것, 당오(當五)를 혁파할 것, 각 읍의 세미를 정지(精持)할 것, 무명옷을 입고 외국 물산통상을 하지 말 것’ 등 여섯 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대표들은 어윤중에게 이러한 내용을 담은 ‘문장초건(文狀草件) 동학인방(東學人榜)’을 올렸다. 동학도들의 주장은 단순한 교조 신원에 있지 않았다. 무능과 부패로 국정을 농단하는 민씨 척족을 몰아내고 호포제와 당오의 혁파, 각 읍의 세미 정지 등 정치 경제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어윤중은 일본과 열강이 임금을 위협한다는 내용은 잘못 들은 것이라고 하면서 귀가해 생업에 종사할 것을 주장했다. 어윤중은 동학도와의 문답을 바탕으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문장초건(文狀草件) 동학인방(東學人榜)’. 서병학, 손병희 등 동학 지도부가 양호선무사 어윤중에게 제출한 문서. 동학도들은 척왜양창의 등 6개 항을 요구했다. "취어(聚語)"에 실려 있다.
‘문장초건(文狀草件) 동학인방(東學人榜)’. 서병학, 손병희 등 동학 지도부가 양호선무사 어윤중에게 제출한 문서. 동학도들은 척왜양창의 등 6개 항을 요구했다. "취어(聚語)"에 실려 있다.

 

군대를 동원 무력으로 동학도 해산시켜

3월 27일 어윤중은 다시 사람을 보내 동학도들의 해산을 지시했다. 그러나 교도들은 “해산하는 길에 포교를 풀어 막기 때문에 먼저 귀가하려던 노약자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으니 국왕으로부터 다시 답변이 내려오면 그때 모두 함께 해산하겠다”면서 버텼다. 3월 27일에도 수원·용인·남원 등지에서 동학도들이 장내리로 몰려들었다. 3월 29일 동학 지도부는 다른 모든 깃발을 철거했지만, 오직 척왜양기(斥倭洋旗)만은 남겨두어 자신들의 요구가 척왜양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날 지도부에서는 노약자들을 진중(陣中)으로부터 주변으로 철수시켰으나, 상주·선산·태안·수원·광주·천안(天安)·직산(稷山)·덕산 등지의 교도들은 오히려 장내리로 몰려들었다.

보은 외속리면 봉비리 출신의 어윤중에게 장내리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윤중은 동학도들의 보은 교조신원운동에 대해 비도(匪徒)나 비적(匪賊)이라고 하지 않고 민당(民黨)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이전의 조정 관리들의 인식과는 사뭇 달랐다. 3월 28일 조정은 어윤중의 장계에 대해 “너희들은 모두 양민이다. 각기 스스로 물러나 돌아가면 당연히 헤아려 땅과 가산을 돌려주어 생업에 평안케 할 것이니 의심하거나 겁내지 말라.”는 내용의 윤음(綸音)을 내렸다.

어윤중을 보내 동학도의 해산시키려 했으나 동학도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조정에서는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동학도들을 압박했다. 고종은 장위영(壯衛營) 정령관(正領官) 홍계훈(洪啟薰)에게 병력 6백 명과 구식 기관포 3문을 가지고 청주목으로 내려가도록 명령했다. 홍계훈은 3월 29일 청주에 당도했다. 그리고 청주병영의 병정 1백 명을 보은읍으로 출동시켰다. 청주병정들은 4월 1일 보은에 도착했다.

어윤중은 군대 동원을 배경으로 동학도들의 해산을 밀어붙였다. 동학도들이 5일간의 시간을 달라고 하자 어윤중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당장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3일안에 해산하라고 물러섰다. 그러나 청주감영군은 4월 1일 저녁부터 보은에서 총포를 쏘며 동학도를 위협했다.

 

홍계훈의 글씨.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이 쓴 계룡산 갑사의 현판. 홍계훈은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있던 1887년 가을에 이 현판을 작성했다.
홍계훈의 글씨.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이 쓴 계룡산 갑사의 현판. 홍계훈은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있던 1887년 가을에 이 현판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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