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제국의 창시자 한무제 유철
중화제국의 창시자 한무제 유철
  • 박종범 자유여행가
  • 승인 2018.11.0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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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위대한 민족만이 흩어진 나라들을 통합하여 더 찬란한 문명을 창조할 수 있다”

 

진시황의 무덤은 평지에다 흙을 날라 봉분을 쌓았다. 진시황 이전까지 제후나 왕들은 평지에 묻었고, 진시황 이후부터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이릉위산’이라고 한다. ‘무덤을 산처럼 쌓았다’는 뜻이다.


당나라 때부터는 아예 산을 무덤으로 만들었다. 무덤 입구는 도굴을 막기 위해 철저하게 극비 사항이었다. ‘이산위릉’이라 하는데 ‘산을 무덤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시안에는 진시황릉 외에도 많은 황제들의 무덤이 시안을 둘러싸고 있는 관중평원에 흩어져 있다. 시안 기차역에 있는 여행 사무소를 찾아가서 중국인들이 즐겨 이용하는 ‘시센 요우란(서부 여행)’ 단체 여행 티켓을 끊으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여행 코스에는 당 태종 이세민의 묘 ‘소릉’이 빠져 있었다. 할 수 없이 ‘성서 버스터미널’로 가서 무릉행 버스표를 끊었다.

 

 

시안 북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무릉’은 한나라 황제 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던 ‘한무제 유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고깔 모양의 봉분은 그 높이가 47미터에 이르며 한나라 황제의 능 가운데 가장 크다.


원래는 무덤 주변을 에둘러 벽이 쌓여 있었지만 지금은 동쪽, 서쪽, 북쪽의 벽만 일부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옥으로 만들고 금실로 꿰맨 수의를 입혔고, 입에는 옥으로 만든 매미를 문 채 관에 뉘어졌다고 한다. 또 살아 있는 동물들과 보석, 부장품등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나중에 농민 봉기가 일어나 도굴 당했는데 한 달 동안 유물을 운반해도 다 가져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 무제는 16세에 제위에 올랐고 향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은 54년이다. 역대 중국 황제들의 무덤은 제위와 동시에 조성하기 시작했다. 한 무제의 경우 즉위하여 70세까지 재위했으니 55년 동안 무덤을 만들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무덤 축조를 위해서는 먼저 무덤 주위로 신도시부터 조성해야 한다. 재력을 가진 부호들을 우선 이주시켜 경제를 활성화하고, 순차적으로 도시 건설과 무덤 축조에 필요한 각종 자재를 공급하며, 또한 이를 다루는 장인과 인부들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하는 부대시설이 생겨야 한다. 한 무제는 자신의 능을 조성하는 ‘무릉’지역에 무려 300만 명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사마천’은 아버지를 따라 장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무릉으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진시황이 중국역사 최초로 통일 국가를 세웠다면 한 무제는 최초로 중국을 제국의 반열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한 무제 시대에 한나라는 역사가들의 평가처럼 ‘진솔하고 용감했으며 질박하고 강직했다. 한나라는 기개가 웅대하고 분방하며 무게감이 있었다’.


흉노는 한나라의 최대 우환이었다. 한 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10년 만에 20만 명에 이르는 흉노의 목을 베었다. 흉노의 제압은 한나라에 뜻하지 않은 큰 선물을 안겨 준다. 실크로드 동방 개척의 문이 열린 것이다.


누군가 ‘외로운 별은 운명을 따른다’고 했던가. 신생 한나라를 제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각 제후들과 공신, 왕족들의 힘을 빼고 국가 운영을 중앙집중화시켜야 했다. 모든 대신들과 신하들의 권한을 회수해야 한다. 권력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오로지 황제 한 명에게 집중시켜야 했다. 한 무제에게는 질기고 고독한 싸움이 남아 있었다. 한 무제는 ‘대사마’ 제도의 도입을 통해 승상을 이겼고, ‘찰거제도’를 통해 ‘관료제’를 정착시킨다. 그리하여 한 제국에는 100개의 군과 1300개 현, 12만여 명의 등용된 관리가 활약하게 된다.


한 무제가 다스리는 동안 한나라는 정치, 경제, 군사와 문화가 전성기에 달했다. 수많은 문인과 음악가, 각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모두 이 시대에 등장했다. 특히 ‘동중서’를 기용하여 ‘유가 사상’을 한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세운다. 동중서는 ‘현랑대책’을 기술하여 한 무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과 책략을 제시하고 한 무제의 집권 통치를 옹호한다. 당시 신유가 사상에 따르면 ‘천인감응’, 한 무제의 통치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며 천명을 반영하는 ‘정치질서와 정치사상이 통일되어야 한다’. 동중서는 ‘백가를 폐지하고 유가만을 숭상하자’는 주장을 체계적으로 제기했다.


한 무제의 영토와 세력 범위는 동쪽은 한반도, 서쪽 신강, 남쪽 베트남, 북쪽 몽골까지 뻗어나갔다. 그는 18만 기병과 1천리에 이어진 깃발을 이끌고 태산에 올라 ‘봉선제’를 올렸다. 중국 역대 황제 중 봉선제를 올린 인물은 몇 명 되지 않았는데 그는 진시황에 이어 두 번째였다.
무릉의 주변 사방에는 비빈과 공신, 궁녀의 배장묘가 분포돼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곽거병’의 무덤이다. 18살에 부대장, 20살에 장군, 22살에 장관, 24살에 사망. 한나라 때 곽거병 이야기다.

 


기원전 121년, 표기장군 곽거병이 첫 출격할 당시 흉노의 주력군은 활쏘기에 능한 병사만 30만이었다. 곽거병은 첫 전투에서 몽골고원의 흉노를 격파했고, 스무 살에 감숙과 영하, 섬서 일대의 흉노를 공격하여 눈부신 전공을 세운다. 흉노의 다섯 왕국을 거치고 ‘언지산’을 넘어 ‘기련산’까지 공격해 혼야왕과 휴도왕을 투항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신라 김해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흉노의 왕자 김일제는 14살로 장안으로 끌려와 노비가 된다. 마침내 22살, 곽거병은 고비사막을 건너 흉노의 본진을 공격해 전공을 세운 후 대장군 ‘위청’과 더불어 ‘대사마’, 국방부장관에 오르게 되었다.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도 이룰 수 없는 공적을 너무도 젊은 나이에 성취한 곽거병은 죽어서도 남다르다. 거대한 석상 16개가 그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유명한 ‘마답흉노’ 석상이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있어야 할 흉노가 말 아래 깔린 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이 화강암 석상은 흉노와 한나라의 뒤바뀐 관계를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실크로드의 동방기점 미앙궁>

‘미앙궁’이 세워진 시기는 한고조 8년, 기원전 199년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등극한지 3년 후, ‘소하’가 수도 장안에 미앙궁을 지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유방이 이를 못마땅히 여기며 말했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는데 어찌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가.”
소하가 대답했다. “천하가 어지럽기 때문에 무엇보다 웅장한 궁전이 필요하고 천자의 존엄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쁘게 답한 소하의 말을 듣고 유방은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기원전 141년, 무제는 흉노의 숙적들과 연합해 흉노에 대적하고자 한다. 마침 흉노가 ‘월지’의 왕을 죽이고 그 두개골을 술잔으로 쓴다는 말이 전해지자 월지를 동맹 상대로 삼는다. 하지만 서쪽으로 쫓겨간 월지의 행방은 묘연했고 그래서 첫 단계는 바로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때 월지와의 동맹을 성사시키겠다고 나선 사람이 ‘장건’이다. 기원전 139년, 장건의 서역행은 험난했다. 장건 일행은 ‘하서주랑’을 건너다가 맥없이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 흉노 지역에서 10년간 머물러야 했다. 장건은 나중에 도망쳐 나와 ‘아무다라야 강’ 유역에서 월지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월지가 이미 복수할 뜻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실익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귀국길에 다시 흉노에게 잡혀 기회를 엿보다가 탈출에 성공, 장장 13년만에 미앙궁으로 돌아왔다. 이때 장건이 한 무제에게 전한 갖가지 따끈따끈한 정보를 통해 중국은 서역에 처음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한 무제는 이후 지속적으로 서역에 사신단을 파견한다.


역사적으로는 장건의 서역 원정을 실크로드 개통의 출발점으로 본다. 장건이 서역으로 출발했던 미앙궁은 ‘실크로드 동방기점’으로 중요시하게 되었고, 현재 ‘미앙궁 유적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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