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청산 문바위골에서 교단 정비 구상
해월, 청산 문바위골에서 교단 정비 구상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1.0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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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해산 이후에도 곳곳에서 동학도 활동

보은에서 해산한 이후에도 일부 동학도들은 귀가하지 않고 집단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보은취회 이후 동학도들이 모였던 곳으로 경상북도 지례가 대표적이다. 지례(知禮)의 삼도봉(三道峰) 아래에서 동학도들이 모여 치성(熾盛)을 드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례의 삼도봉(三道峰, 1248.7m)은 한자로 알 수 있듯이 경상북도 김천과 전라북도 무주, 그리고 경상남도 거창의 삼도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은거와 기도에 용이해 동학도들이 집결했다. 지례는 수운 최제우가 드나들 정도로 일찍 동학이 전파된 곳이었다. 1889년 해월이 <내칙>과 <내수도문>을 반포한 김산(金山) 복호동 김창준의 집도 지례 삼도봉에서 멀지 않았다.

또 진주(晉州)의 덕산(德山)에서도 동학도들이 모여 있었다. 실제로 진주접에서 보은까지 올라간 동학도가 60명이나 되었다. 진주의 덕산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로 지리산 천왕봉 아래 깊은 골짜기다. 이곳에는 보은 임규호의 포덕으로 동학이 전해졌다. 덕산의 동학도를 이끌었던 인물은 백도홍(白道弘, 일명 백낙도)이었다. 백도홍이 이끌던 진주 덕산의 동학도들은 1894년 3월 전라도에서 동학혁명 1차 기포가 일어나자 이에 호응해 경상도에서 최초로 봉기했다. 백도홍이 봉기하자 진주 영장 박희방이 덕산에 들이닥쳐 백도홍을 체포한 후 4월 초에 진주에서 참형했다. 이에 대항해 진주 일대의 동학도들이 총기포해 진주부를 점령하기도 했다.

충청도의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근처에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모인다는 소문도 무성했는데 이 지역은 손병희(孫秉熙)와 손천민(孫天民), 서우순(徐虞淳), 신택우(申澤雨) 등 동학의 대두목들이 많이 있었다. 일본에서 발행하는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는 ‘보은에서 물러난 동학교도들이 4월 중순경 다른 지방의 교도들과 합세한 후 경상도 언양(彦陽) 근처에 모여 정부 요직에 있던 간신(佞臣) 28명을 쓸어 없애고 이국안민(利國安民)하자는 기치를 들고 집회를 개최하였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처럼 보은에서의 집회가 끝난 후에도 동학도들은 삼남 지방의 곳곳에서 모여 집단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를 거쳐 부산항으로 향하던 프랑스 선교사는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동학도들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곳곳에 수백 명 내지 천여 명에 이르는 동학당원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었음을 눈으로 보았다고 하다. 이들 당원들은 거의가 거지와 같은 빈민이었다. 뒤에서 누가 교사(敎唆)하는지 모르나 무리들 속에는 통수자(統帥者, 접주)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 그들은 지방 관리에게 인민의 부담을 덜어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자 지방 관리들은 간절히 설유(說諭)하여 해산시키는 데 힘을 다하고 있었다. 혹은 이미 해산했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가서 모이기도 했다.

위의 글을 통해 동학도들은 보은 교조신원운동이후 관에 당당히 자신들의 주장을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동학도들은 어윤중이 자신들의 의견을 들어주어 해산했다고 하면서 지방의 관아를 찾아 ‘인민의 부담을 덜어 줄’ 방안을 강력히 요구했다. 지방관아에서도 수백 명의 동학도들이 몰려들자 이들을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산청 동학혁명기념비.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동학도들이 웅거했던 진주 덕산에 세웠다. 진주 덕산은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로 이곳의 동학도들은 1894년 전라도에서 1차 기포가 일어나자 경상도에서 가장 먼저 혁명의 깃발을 올렸다. 2015년 동학혁명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한다.
산청 동학혁명기념비.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동학도들이 웅거했던 진주 덕산에 세웠다. 진주 덕산은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로 이곳의 동학도들은 1894년 전라도에서 1차 기포가 일어나자 경상도에서 가장 먼저 혁명의 깃발을 올렸다. 2015년 동학혁명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한다.

 

조정, 보은 교조신원운동 주동자 체포 명령

어윤중은 동학도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큰소리를 쳤고 동학도들은 어윤중의 말을 믿고 해산했다. 어윤중의 말을 믿고 고향에 돌아온 동학도들은 관아에 조세 경감 등을 요구했다. 진주의 한약우(韓若愚)가 지은 <백곡지>에도 당시 동학도들의 기세등등한 움직임이 상세히 적혀 있다.

계사(癸巳, 1893년) 3월에 동학도들이 호서 보은에서 크게 모였는데 무리는 수십만이었다. 복술(福述, 大神師)의 억울함을 신원하려고 임금에게 글을 올리자 조정에서는 난리로 이어질까 두려워 어윤중(魚允中)으로 하여금 안무사로 삼아 동학을 효유하게 하여 흩어지게 하였다. 이로부터 동학은 조정도 어찌하지 못함을 알게 되자 기세가 더욱 올라 성해져서 관장을 욕보이며 마을을 횡행하였다.

동학도들이 지방관아를 상대로 조세 감면 등 민생의 안정을 요구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는 관리를 욕보일 정도로 세력이 강화됐다. 또한 이제 동학교도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활동할 정도로 보은 교조신원운동의 효과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보은에서 동학도들이 해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에서는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지도부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학도들이 해산된 지 일주일만인 4월 10일이었다. 정부는 동학도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호서의 서병학(徐丙鶴), 호남의 김봉집(金鳳集)과 서장옥(徐長玉)” 3인을 체포하여 조사해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관에서 지목한 3인 중에 호남의 김봉집은 전봉준(全琫準)으로 보인다. 이는 김윤식이 지은 <속음청사(續陰晴史)>를 보면 알 수 있다. <속음청사>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서병학과 전가(全哥)를 칙령으로 체포해 죄상의 사실을 심문하도록 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김봉집은 전씨 성을 가진 인물, 즉 전봉준임을 알 수 있다. 서병학은 어윤중과의 면담에서 전봉준을 비하했는데 이는 전봉준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됐다.

체포령은 세 사람에게 국한되었지만 지방관들은 정부가 보은에서 모인 동학도들을 난당(亂黨)의 무리라고 규정해 다시 탄압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어윤중이 큰소리로 장담했던 동학도의 종교적인 자유 획득과 신분 보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동학도들은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져 갔고 다시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키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7월 중순 해월이 김천시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 편사언(片士彦)의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서병학과 이해관, 이국빈 등이 찾아와 신원운동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조정을 대표한 어윤중과 동학도와의 약속을 조정이 지키지 않고 동학도를 탄압하자 다시 집단으로 실력행사를 전개해 조정으로부터 교조신원과 신분 보장, 반외세를 확약 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백곡지”의 동학에 관한 부분. “백곡지”는 진주의 유생 한약우가 지운 백곡리 마을의 기록이다. 진주목 관할 아래 75개 리(里)중에서 백곡리 동안(洞案) 관련의 문서와 동학혁명 당시의 여러 대책을 모은 책이다. 책의 말미인 병황삼지사(兵荒三之四)에 동학과 동학혁명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 중 ‘당우갑오(當于甲午)’의 첫줄에 최제우를 뜻하는 경주인 최복술(崔福述)이 보인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백곡지”의 동학에 관한 부분. “백곡지”는 진주의 유생 한약우가 지운 백곡리 마을의 기록이다. 진주목 관할 아래 75개 리(里)중에서 백곡리 동안(洞案) 관련의 문서와 동학혁명 당시의 여러 대책을 모은 책이다. 책의 말미인 병황삼지사(兵荒三之四)에 동학과 동학혁명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 중 ‘당우갑오(當于甲午)’의 첫줄에 최제우를 뜻하는 경주인 최복술(崔福述)이 보인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해월, 청산 문바위골로 이주

보은 취회를 해산한 해월은 인동(仁同), 왜관(倭館), 금산(金山) 등지를 순회하며 경상도 지역의 도인들을 다독이다 7월말에 상주 공성면 효곡리 왕실마을의 집으로 돌아왔다. 8월에 접어들자 조재벽(趙在壁)이 왕실을 찾아 청산군 문암리 김성원(金聖元)의 집으로 이사하기를 권했다. 왕실마을은 해월이 1892년 5월부터 은거해 동학도들이 드나들어 이미 관에서 주목을 하고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으로 인해 해월에 대한 관의 지목이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에 오래 머물기가 마땅치 않았다.

청산의 문바위골을 소개한 조재벽은 황간 사람으로 일찍부터 영동, 청산, 진산, 고산 지역에 많은 포덕을 한 대접주였다. 조재벽은 해월과 동학 교리에 대해 문답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독실한 제자였고 교조신원운동기 내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해월은 조재벽의 권유를 받아들여 청산의 문바위골로 이주했다. 김성원의 집 뒤뜰에는 동학혁명 당시 관군들이 이곳을 불질렀을 때 타다 남은 나무가 남아있다. 문바위골은 현재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다.

문바위골에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월에게 비통한 일이 생겼다. 아들 덕기의 병세가 악화되더니 급기야 10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덕기의 나이 19세였다. 덕기는 아버지인 해월을 따라 여러 곳을 숨어 다녔는데 항상 숨어 지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심장병이 생겨 결국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해월은 아들 덕기를 골짜기 안쪽 문암리 저수지 위 산기슭에 묻었다. 해월은 자신 때문에 덕기가 세상을 떠났다고 애통해 했다.

 

충청북도 청산군 한곡리 문바위골의 문바위. 해월은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이곳 문바위골로 들어와 교조신원운동에 호응해 동학에 입도한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를 구상했다.
충청북도 청산군 한곡리 문바위골의 문바위. 해월은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이곳 문바위골로 들어와 교조신원운동에 호응해 동학에 입도한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를 구상했다.

 

도소(都所)와 법소(法所)의 설치

문바위골로 들어온 해월은 동학교단이 팽창하자 교단을 새롭게 정비하고 교도들을 신앙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교단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본격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교조신원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교조신원운동 기간에 동학이 반외세와 국정 쇄신을 요구하자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해 동학의 교세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들을 관리할 필요가 생겼다. 어윤중과의 대담에서 동학 지도부는 당당하게 전국의 동학교도가 80만 명이 넘다고 주장할 정도로 동학 세력은 급증했다.

해월은 일련의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부 동학교도들이 시천주의 인격을 갖추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해월은 이 시기에 입도한 많은 도인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동학 이념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양적으로 팽창한 교단을 질적으로 도약시키려고 구상했다. 동학교도들이 신분제의 해체와 유무상자를 실천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세간의 동학에 대한 인정은 물론 조정으로부터의 교조 신원도 빨리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해월은 생각했다.

11월 들어 해월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각 포(浦)에 도소(都所)와 법소(法所)를 두어 교단 조직의 역할을 나누었다. 각 포에는 법소를 두고 본포 소재지에는 도소를 두었다. 법소는 포의 제일 어른이 있는 곳으로 장석(丈席)이라고도 했다. 즉, 도소는 종교적인 공간으로 각포의 도인을 신앙적으로 교육하는 곳을 의미한다. 도소는 대접주의 소재지에 두었다는 것으로 보아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해월은 교단의 규모가 커지자 행정 업무와 종교 업무를 분리해 보다 체계적으로 교단을 운영하려고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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