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가을이 정차한 역, 사방역
쓸쓸한 가을이 정차한 역, 사방역
  • 황주경 시민기자. 시인
  • 승인 2018.11.0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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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간이역답지 않게 승강장이 넓고 가로등이 많은 사방역
간이역답지 않게 승강장이 넓고 가로등이 많은 사방역
사방역 전경. 노란판자로 출입문과 창을 다 막았다.
사방역 전경. 노란판자로 출입문과 창을 다 막았다.

 

기찻길 옆 수많은 간이역은 저마다의 내력으로 찾는 이에게 각기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운산역은 권정생 선생의 작품 몽실언니를, 모량역은 박동규 선생의 수필 속 한 소녀를, 좌천역은 구리광산에 얽힌 일제의 자원 수탈을 연상하게 했다. 이번에 찾은 사방역은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 벤치에 소복한 내려앉은 나뭇잎이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노래하게 했다. 

 

역 구내 사철나무
역 구내 사철나무


사방역은 찾는 이에게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울타리로 심은 측백나무가 숲을 이뤄 역사를 완전히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서 기차선로 쪽으로 숨은그림찾기 하듯 자세히 살펴보면 역으로 오르는 계단과 진입로가 보인다.

 

숲에 감춰진 사방역 진입 계단
숲에 감춰진 사방역 진입 계단


역은 동해남부선 청령역과 안강역 사이에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형산강과 강 건너 남경주의 옥토를 내려다보는 위치다. 1918년 11월 1일 영업을 시작했으며, 2004년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고, 2007년 영업이 중단되고 폐역 조치됐다. 포항역과 부산진역을 운행하는 열차와 대구선을 경유하는 열차가 하루 네댓 번 이 역을 스쳐 지난다.

 

나무와 넝쿨이 우거진 폐역 구내
나무와 넝쿨이 우거진 폐역 구내


노란판자로 창이며 출입문을 봉쇄한 역사는 195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해방이 한참 지난 후임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동해남부선 역들의 박공지붕 형태를 그대로 취하고 있다. 일제라는 시대적 관성을 해방이 되어서도 비틀지 못한 모습이다. 착 달라붙은 한시대의 거죽을 벗겨내기란 이렇게 어려웠다.


간이역답지 않게 넓고 긴 승강장에는 현대식 가로등이 줄 서 있는데 바람만 맴도는 폐역을 그나마 달래는 모습이다. 역사 담벼락 밑 의자 위에는 솔가리가 소복이 내려 앉아있었는데, 한때 수많은 얼굴들이 앉았다 떠나기를 반복했을 빈 의자를 바라보자니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 내 입가에서 절로 새어나왔다. 쓸쓸한 가을이 정차하고 있는 역이 사방역이었다.

 

솔가리가 내려앉은 사방역 벤치
솔가리가 내려앉은 사방역 벤치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사방리 교회 앞에서 운동 중이던 구정조(82세) 어르신을 우연히 만났다. 어르신은 사방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연유로 형산강에서 범람하는 홍수를 막는다는 뜻과 선비가 많이 사는 마을이라는 두 개의 설이 있다고 했다. 뒤에는 칠보산, 앞에는 형산강이 흐르는 배산임수 형국으로 풍수가들 사이에선 사방리가 예사롭지 않은 지세로 알려져 있다.

 

사방리 경로당 앞에 선 두 노인. 왼쪽이 구정조 씨. 82세.
사방리 경로당 앞에 선 두 노인. 왼쪽이 구정조 씨. 82세.


마을은 일명 ‘사방리지석묘군’이라 불리는 청동기시대 고인돌도 남아있는데 사방리가 선사시대부터 살기 좋은 지역이었음을 증명한다. 199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총 9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이장님에게 묻고 또 물어 사방초등학교 서남쪽 과수원에서 2기의 고인돌을 찾아 볼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아는 이가 없었다.

 

사방리 곳곳에 분포한 고인돌
사방리 곳곳에 분포한 고인돌


포근하고 비옥한 땅을 가진 마을은 예부터 풍요로웠다. 비록 소농들이었지만 배곯는 사람이 없었고, 형산강에서 잡히는 은어, 꺽지, 잉어는 주민들의 단백질공급원이었다. 예전에는 사과 농사가 많았지만, 지금은 방울토마토 시설농사, 단감농사 등을 많이 짓는다.


구씨 어르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6·25 때 사방리 일대는 접전지였다. 유엔군이 밀고 올라가기 전까지 마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주민들은 전쟁의 화마를 피해 강 건너 까마득히 보이는 동대봉산까지 피난을 갔다. 산위에서 바라본 전쟁은 비현실적이었다. 동해에서는 유엔군의 함포 사격이, 하늘에서는 전투기와 폭격기에서 쏟아지는 폭탄과 기관총 세례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밤이면 기관총에서 발사된 예광탄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피난민들은 처지도 잊은 채 전쟁 상황이 빚어낸 별천지를 불꽃놀이 지켜보듯 구경했다.


전선이 북상한 뒤 산능선마다 주검이 즐비했다. 인근의 주민들이 차출되어 밀어 넣기 좋은 골짜기로 주검들을 모아 흙으로 덮었다.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 주고 싶어도 몇 살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구씨 어르신에 의하면, 최근 나라에서 발굴작업을 위해 주민들에게 당시의 매장지를 조사했다고 한다. 어르신은 지금이라도 가엾은 넋들을 수습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금곡사지원광법사 부도탑. 신라시대 같으면 금곡사지는 사방리에서 골짜기를 타고 산을 넘어 갔을 것이다. 지금은 자동차로 안강읍 하곡지 옆으로 돌아 간 길을 따라 두류리로 20여분 더 들어가야 한다. 금곡사지 가는 길은 알려지지 않은 긴 협곡과 호수, 아름다운 비경이 숨겨져있다.

 

원광법사 부도탑에 새겨진 부처님
원광법사 부도탑에 새겨진 부처님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 산사는 깊고 조용했다. 원광법사 부도탑 앞에 서서 합장했다. 부도는 부서진 채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3층 석탑 형식으로 1층 몸돌 및 3층 지붕돌만이 원래의 것이고 나머지는 현대 석재로 보완했다. 1층 몸돌을 살짝 파내어 부처님을 새겼는데 그 모습이 우리네 범인을 닮았다.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에 내려앉은 가을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에 내려앉은 가을
금곡사지 가는 길에 만난 가을 호수
금곡사지 가는 길에 만난 가을 호수

 

원광법사(~630년)는 화랑의 실천덕목 세속오계를 만든 분이다. 지평왕 52년(630년) 황룡사에서 입적해 명활산에서 다비를 한 후 이곳에 모셨다. 세속오계는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라는 불교이념에 배치되는 규율이 존재하지만, 국난이 있을 때마다 칼을 든 한반도 호국 불교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성하지 못하면 중생은 도탄에 빠졌다. 3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세속오계는 신라사회의 필요불가결한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했다. 1388년이 지난 지금, 형체가 희미하지만 너무나 선량해 보이는 저 부처님이 혹여 원광법사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가 밥이고, 평화가 있어야 낙엽 밟는 낭만도 즐길 수 있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감산사 오솔길을 걷는데 추억의 포탄처럼 떨어지는 낙엽이 사방역에서부터 따라다닌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또다시 부르게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황주경 시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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