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의 발발로 좌절된 해월의 문바위골 구상
동학혁명의 발발로 좌절된 해월의 문바위골 구상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1.1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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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법소(法所)와 도소(都所) 설치는 공인 이후를 대비한 포석

해월이 각 지역에 법소를 설치한 목적은 정부로부터 동학의 공인을 대비한 것이었다. 법소와 도소는 동학교단의 지역 거점이었다. 동학의 조직은 개인에서 개인으로 연결되는 연원제로 이루어졌는데 교조신원운동을 전후해 교세가 확장하자 연원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역의 책임자를 선정하고 법소와 도소를 설치해 지역을 관장하고자 했다. 즉 법소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동학 조직을 일원화하고 교화의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임명된 법소와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이때 교문을 활짝 열었다. 어른이 계신 곳을 법소라고 하며 또는 법헌(法獻)이라고 하였다. 김연국은 법소를 문암리에 정했으며 손병희와 이용구는 충주군 외서촌 황산리(음성군 삼성면 능산1리)에 정했으며 손천민은 청주 송산리에 정했다. 그 나머지 박석규(朴錫奎)는 옥천에, 임규호(任奎鎬)는 보은에, 박희인(朴熙寅)은 예산에, 박인호는 홍성에, 임정준(任貞準)은 문의에, 박원칠(朴元七)은 청산에, 김낙철은 부안에, 손화중(孫華仲)은 무장에, 김개남(金開南)은 남원에, 성두한(成斗漢)은 청풍에, 차기석(車基錫)은 홍천에, 김치운(金致雲)은 인제 등에 법소를 정하였다. 각자 해군(該郡)에 조직한 본포에는 도소를 두었다. 전봉준은 교도를 모아 전라도 금구군 원평에 주재했다.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초기에 설치된 법소는 충청도에 11개소, 전라도에 4개소, 강원도 2개소 총 17곳을 두어 충청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는 해월이 있었던 청산을 중심으로 충청도에 우선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학교단에서 어른을 뜻하는 장석(丈席)이나 법헌(法獻)은 오직 해월에게만 사용된 일종의 높임말이었다. 일반적으로 법소의 대표자는 어른을 뜻하는 한자인 장(丈)을 이름 뒤에 “○○장(丈)”이라고 불렀다. 도호(道號)가 생긴 후에는 도호 뒤에 장을 붙여 불렀다.

법소가 지역 거점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권병덕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곳곳에 각 지역의 포소(包所, 법소)가 설립되어 교무를 집행하며 동학을 선전하니 바람을 따라 날로 전도가 되었다. 장소가 좁아서 집밖에 차일을 치고 30명씩 입도하는 예식을 행하고 남녀노소 귀천을 물론하고 들어와 참여하며 향촌에 양반이 입도하지 않으면 억지로 들어오게 시키었다.” 법소가 설치됨으로써 동학 조직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게 되어 동학에 입도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권병덕은 당시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어 30명이 한꺼번에 입도를 하는 이른바 ‘마당포덕’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이처럼 법소와 도소는 동학 공인 이후를 준비한 해월의 포석이었다.

 

동학 세력의 확대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교단과 동학도들은 교조의 신원, 즉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2만 명 이상의 동학도들이 실력행사를 벌이자 관리들이 함부로 동학도를 탄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동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설혹 탄압이 있더라도 동학도들은 이전과는 달리 당하지 않고 관에 당당하게 탄압 중지와 재산 환원을 요구했다.

보은 교조신원운동이 해산한 이후 조정에서 동학 지도부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9월 들어 충청도에서 다시 동학교도들이 500~600명씩 혹은 천여 명씩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때 체포된 동학도 간부는 국가가 동학도와 백성을 속이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재집결했고 다시는 해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고 했다. 11월에는 경기도 이천군 신둔면 남정리에 사는 김봉규(金鳳奎)라는 토호가 밀고해 도인이 체포되고 재산이 강탈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용구가 수천 명의 도인을 이천읍에 불러 모아 이를 강력히 항의하자 이천 관아에서는 도인을 석방시키고 빼앗은 재산을 돌려주었다. 이처럼 교조신원운동 이후 동학도들은 이전과 달리 관의 탄압에 적극 대항했다.

보은 교조신원운동으로 동학도들은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갔다. 특히 호남지역에서 교세 확대가 크게 일어났다. 1893년 7월부터 전봉준과 김개남은 관내의 도인들을 가끔씩 불러 모아 조직을 강화시키고 포덕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호남 지역의 교세 확장은 이듬해인 1894년 동학혁명이 전개될 때까지 지속됐다. 호남 지역에서는 김개남, 손화중, 전봉준을 중심으로 적극 교세 확장에 나섰다.

 

문암리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강론 자리 마련

해월은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장내리에 있는 대도소(大都所)를 폐쇄했다. 그 이유는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조정에서 동학 지도부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장내리가 가장 큰 지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해월은 임시로 청산 문암리에 대도소를 설치했다. 문암리의 대도소를 정점으로 그 아래 법소와 도소의 설치가 마무리된 것은 12월에 들어서였다. 조직이 정비되자 해월은 12월 중순경부터 새로 입도하는 도인들을 지도할 대접주에 대한 교육 활동을 준비했다.

 

문바위골 대도소 자리. 해월은 문암리 김성원의 집으로 와서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를 폐쇄하고 이곳에 대도소를 설치했다. 해월은 이곳에서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팽창한 교단을 정비하기 위해 각지에 법소와 도소를 설치해 공인 이후를 대비했다.
문바위골 대도소 자리. 해월은 문암리 김성원의 집으로 와서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를 폐쇄하고 이곳에 대도소를 설치했다. 해월은 이곳에서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팽창한 교단을 정비하기 위해 각지에 법소와 도소를 설치해 공인 이후를 대비했다.

 

1894년에 들어서자마자 해월은 자신의 구상을 실천했다. 1월 5일에 해월은 문암리에 강석(講席)을 열었다. 강석이란 지도자를 불러 동학의 교리에 대한 강론을 펴는 것을 말한다. 해월은 각 법소의 대접주를 문암리로 불러들여 각지에서 물어오는 동학 교리에 대한 난해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해월은 법소의 대접주들에게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해월은 대접주들에게 문암리와 같은 강석을 각 법소에 설치해 새로 입도한 도인들을 지도하도록 했다. 법소에서 대접주를 도강장(都講長)으로 삼고 수접주(首接主)를 부강장(副講長)으로 삼아 매달 1회 이상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강의하고 의심스럽고 난해한 문제에 답해주라고 했다. 이러한 해월의 동학 교단의 질적 향상을 위한 구상은 동학혁명의 발발로 시행하자마자 접어야 했다. 동학혁명은 해월의 구상과 다르게 동학교단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문바위골 동학공원의 동학농민혁명기념탑. 해월이 은거했던 문암리에서 1894년 9월 18일 동학군의 총기포령이 내려져 제2차 기포가 시작됐다. 문암리 일대에는 수만의 동학도들이 집결해 훈련했던 훈련장도 인근에 있다.
문바위골 동학공원의 동학농민혁명기념탑. 해월이 은거했던 문암리에서 1894년 9월 18일 동학군의 총기포령이 내려져 제2차 기포가 시작됐다. 문암리 일대에는 수만의 동학도들이 집결해 훈련했던 훈련장도 인근에 있다.

 

전봉준,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사발통문 작성

1890년대 들어 전라도 관리의 수탈은 극심했다. 보은 교조신원운동이 끝난 11월에 전라도 고부와 익산, 전주 등지에서 백성들이 봉기했다. 탐관오리의 횡포는 매관매직의 성행과 관리의 탐학에서 비롯됐다. 당시 일본에서 발행하는 <일본>이라는 신문에는 조선관직의 매매 가격이 실릴 정도였다.

평안도 감사 80만 냥, 경상도 감사 70만 냥, 함경도감사 32만 냥, 충청도 감사 30만 냥, 경기도 감사 15만 냥, 강원도 감사 15만 냥, 황해도 감사 15만 냥, 전라도 감사 15만 냥, 유수 8만 냥 내지 10만 냥, 병사 10만 냥 내지 20만 냥, 목사・부사 15만 냥 내지 17만 냥.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내용이 외국의 신문에 실릴 정도로 매관매직이 만연했음은 틀림없다. 흥선대원군도 “현재 전라감사 김문현 같은 자는 광주 유수로 있을 때 20만 냥을 바치고 전임한 자이므로 얼마나 가렴중세를 하였겠는가 생각할 수 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매관매직이 관직 사회에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령의 수탈은 아전들의 수탈로 이어졌다. 당시 아전들은 봉급이 없었기 때문에 세미를 거둘 때 자신의 급여를 얹어서 걷었다. 이들은 갖가지 농간을 부려 세미(稅米)에 부가세를 덧붙여 수령의 수탈 못지않은 축재를 하였다. 농민 봉기가 일어나면 수령과 함께 아전들도 많이 죽음을 당했는데 이는 아전들도 수령 못지않게 백성들의 수탈했기 때문이었다. 매관매직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나타났는데 그중에서 환곡(還穀)이 가장 심했다.

당시 탐관오리 가운데 손꼽히는 인물이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었다. 1892년(고종 29) 4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고부에서 학정을 일삼았다. <전봉준공초>에서 밝힌 조병갑의 학정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하나, 민보 아래에 보를 새로 쌓고는 가혹하게 민간에게 명령하여 상등 논에는 1두락(斗落)에 2말을 거두고 하등 논에는 1두락에 1말을 거두니 도합 세금이 700여 석이었고,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주어 경작해 먹는 것을 허락하면서 관에서 문서로 증빙하여 징세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정작 가을 추수기가 되자 강제로 거두었다. 하나, 부민(富民)에게 강제로 빼앗은 돈이 엽전 2만여 냥이다. 하나, 그 아비가 일찍이 태인 군수를 한 적이 있으므로 그 아비를 위하여 비각(碑閣)을 세운다 말하고 강제로 거둔 돈은 1천여 냥이다. 하나, 대동미(大同米)를 민간에서 징수할 때는 고운 백미(白米)로 16말에 해당하는 값을 정하여 거두어들이고 상납할 때는 거친 쌀로 바꾸어 그 차액을 착복한 일이다. 그 외에도 허다한 내용은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의 영세불망비. "전봉준공초"에 따르면 조병갑은 부친 조규순의 선정비 비각을 세우기 위해 고부군민으로부터 1천 냥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비석의 비각을 세우려고 고부군민에게 돈을 거두었던 것 같다. 이 비는 태인의 피항정 뜰에 있다.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의 영세불망비. "전봉준공초"에 따르면 조병갑은 부친 조규순의 선정비 비각을 세우기 위해 고부군민으로부터 1천 냥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비석의 비각을 세우려고 고부군민에게 돈을 거두었던 것 같다. 이 비는 태인의 피항정 뜰에 있다.

 

위의 새로 만든 보가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들이 없애버린 만석보(萬石湺)다. 조병갑의 수탈 때문에 동진강 하류 서남쪽 유역의 고부 군민들은 풍년이 들어도 달갑지 않았다. 풍년이 들어도 조병갑이 뜯어가는 세목이 많아 흉년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조병갑의 학정이 지속되자 농민들은 1893년 11월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동학접주인 전봉준(全琫準)을 찾아가 소장을 부탁했다. 11월 15일 전봉준이 농민 40여 명과 함께 조병갑에게 진정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들을 구금했다. 며칠간 곤욕을 치른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하고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근명령을 받음으로써 이 봉기는 일단 보류됐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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