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1)
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1)
  • 이병길 시민기자.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승인 2018.11.1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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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큰 사찰에 가보면 아주 큰 통나무 속을 파놓은 구시(목조, 木槽)가 있다.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큰 사찰의 법회 때 배식용으로 사용되었던 용기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송광사의 구시는 4000 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구시에 밥을 담아 주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구시는 구유(具有)를 일컫는 사투리다. 구유는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을 말한다. 사람이 말, 소, 돼지와 같은 구유의 밥을 나누어 먹었다는 것은 몰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이다. 나는 이 구시가 종이를 만들 때 닥종이의 원료를 풀 때 사용되었던 용기로 추정한다. 즉 가운데를 파서 만든 구유 형태의 지조(紙槽)로 보아야 한다. 구시의 양끝에는 턱받이가 있고 중앙 바닥에는 물 빼는 구멍이 있다. 통도사의 구시는 만세루 좌측에 있다. 석남사의 대웅전 뒤에 있는 구시는 원래 간월사 것이다.

 

통도사 부도원에는 스님의 부도뿐만 아니라 각종 공적비도 같이 있다.
통도사 부도원에는 스님의 부도뿐만 아니라 각종 공적비도 같이 있다.

 

불경을 간행했다 폐사된 운흥사와 간월사

사찰에서는 고려 때부터 자체적으로 종이를 만들어왔다. 사찰에서는 불경을 인쇄하여 책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목판인쇄술과 함께 제지기술이 발달해 왔다. 또 사찰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종이를 만들어 시중에 내다 팔았다. 통도사 인근에 불경을 간행한 사찰로는 운흥사와 간월사가 있었다. 현재는 폐사지이다.

울산 웅촌면 고연리 반계마을, 원적산(현 천성산) 자락에 있는 운흥사는 원효가 창건한 절로, 임란 때 사명대사가 활동하기도 하였다. 운흥사는 통도사의 각종 불경과 서적을 간행하였고 아울러 승려 교육을 담당한 사찰이었다. 운흥사 간행 경판은 대부분 각수(刻手)인 연희(演熙)스님이 새긴 것이다. 우담 정시한(丁時翰)이 전국을 유람하며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 글인 <산중일기(山中日記)>를 남겼는데, 1688년(숙종 14) 5월 22일에 연희 스님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사람 됨됨이 믿음직하고 착실하다. 스스로 발원하여 혼자서 불경(佛經) 수천 판을 11년 동안 하루같이 새겼으니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 운흥사는 1702년(숙종 25)에 승려 138명이 있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나. 1765년(영조 41)에 17명, 1825년(순조 25)에 12명이 될 정도로 사세가 기울어졌다. 폐사된 이후 스님들은 통도사로 간 듯하다. 운흥사 경판은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16종 673점이 남아있다.

영남알프스 자락의 간월사는 통도사를 짓기 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초기에는 대찰이었으나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규모가 축소된 절이다. 현재 보물 제370호인 석조여래좌상과 멋지게 복원이 잘된 삼층석탑이 두 개가 남아있다. 1673년(현종 14)에 여러 종류의 불경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간월사는 1711년(숙종 37) 승려가 22명이 있었으나, 1813년(순종 13)에 3명으로 격감했다. 1836년(헌종 2) 큰 흉년으로 인해 폐사되었다. 실재로 조선왕조실록에 당시 영남, 관동, 관북에 기근이 심했다고 한다(현종 2년 12월 29일).

 

불경 간행을 위해 종이를 생산했던 사찰

조선 전기의 종이생산은 관영제지소인 조지서(造紙署)가 담당하여 사찰은 불전간행(佛典刊行) 등 자급자족을 위해 종이를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종이가 많이 필요한 사찰 본래의 특성 때문에 사찰마다 닥나무를 심어 가꾸는 것은 중요한 절 살림의 조건이기도 했다.

종이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지가 않았다. 1827년(순조 27)에 통도사 승려들이 수군절도사에게 보낸 호소문을 통해 종이 만드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제지공정은 닥의 불필요한 부분이나 표피 등을 제거하여 한지원료인 백저(白楮)로 만드는 과정인 거형(去荊), 백저를 잿물과 섞어 가마솥에 넣고 삶는 과정인 숙정(熟正), 삶은 후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질을 분해하는 과정인 타저(打楮), 분해된 섬유질을 큰 통 속에 물과 함께 넣고 휘저어 발로 종이를 뜨는 과정인 부취(浮取), 종이를 말리는 과정인 건취(乾取), 종이의 티끌, 오물을 제거하는 과정인 택록(擇鹿), 종이를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단단하고 윤택이 나게 만드는 과정인 도침(擣砧) 등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종이 만들기는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일손 또한 여간 많이 필요하였다.

사찰은 승려들의 제지기술과 함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사찰은 닥나무가 생육하기에 적합한 산간지역, 풍부한 물을 확보할 개울, 닥나무를 두드릴 평평한 바위, 그리고 건조할 넓은 공간 혹은 땔감 많은 곳에 있었다.

 

과도한 종이부역은 사찰을 폐사시켰다

불교가 핍박을 받던 조선시대, 사찰에 부과된 부역의 종류만 30~40종류에 이르렀다.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심지어 빨래돌, 다듬잇돌을 비롯한 특정 공납물과 온갖 농작물은 물론 하다못해 산나물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지방의 양반들에게 세금으로 내놓고 또 수탈당했다. 그러나 양란 이후 조지서 혁파와 수취체제의 변화로 인해 승려의 종이 생산과 상납은 본격화되었다.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종이를 청나라 조공품으로 보낸 사실 또한 승려의 지역(紙役)이 가중한 원인이었다. 헌종 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사찰은 국가의 지물(紙物, 종이) 생산소로 전락하거나 각종 공물의 공급처가 되었다. 사찰에 종이 만드는 부역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사찰과 승려에게 닥나무 농사를 짓고 종이를 만들어 바치라는 부역을 부과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워낙 그 폐해가 심해, 한 군이나 현에서 단 한 명의 승려도 남지 않게 되는 경우가 속출했다.

1670년(현종 11) 10월 7일에 보면, “전라 감영에서 전례에 따라 바치는 종이도 적은 양이 아닌데 근래에 또다시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해마다 큰 사찰에서는 60여 권, 작은 사찰에서는 50여 권을 바치게 하니 승려들이 이를 피해 도망하여 사찰이 텅 비고 말았습니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종이 부역을 피해 승려들이 도망가고 결국에는 폐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1727년(영조 3) 양산군수 김성발(金聲發)은 통도사와 같은 천년 명찰(名刹)이 지역(紙役)으로 하루아침에 공허해졌음을 지적하고, 지역을 혁파한다면 흩어진 승도가 다시 환집(還集)할 것이라고 하였다.

현재 운흥사에는 당시 종이를 만들었던 흔적들이 몇 보인다. 운흥사 인근의 저리(楮里)마을은 이름 그대로 닥나무 마을이다. 그만큼 주변에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가 무성했다. 또 닥나무 껍질을 두들겨 벗겼다는 닥돌과 물에 넣어 씻었다는 수조(水槽)가 운흥사지에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만약 종이부역으로 인해 운흥사의 스님이 1702년(숙종 25) 138명이 1765년(영조 41) 17명으로 줄어들고 스님들이 도망을 가서 폐사한 것이라면, 통도사는 더욱 위기감을 가졌고 모종의 조치를 해야만 했다. 특히 1836년 인근 간월사의 폐사는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통도사는 닥나무가 자라지 않아 울산과 경주 등지에서 닥나무를 구입해 종이를 제작하여 납부하였다. 다른 사찰보다 통도사는 과중한 부담과 수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종이부역 면제를 위해 머리를 기르고 한양으로 간 덕암당 스님

 

덕암당 혜경 영정(德巖堂蕙憬影幀) 경남 무형문화재 제450-60호
덕암당 혜경 영정(德巖堂蕙憬影幀) 경남 무형문화재 제450-60호

 

종이부역 면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통도사에 전해오고 있다. 덕암당 혜경스님이 통도사에 있을 때, 그의 고향 친구(?)인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이 영의정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통도사 대중들은 스님에게 권 대감을 만나 지역면제(紙役免除) 요청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도성출입이 스님에게는 금지되었던 시절이라, 스님은 6개월 동안 머리를 기르고 나서 상투를 매고 도포를 입고 한양으로 갔다. 한양에 입성한 스님은 권 대감을 만나기 위해 물장수로 위장하였다. 물장수만이 양반집 최고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권 대감을 만난 스님은 지역면제 요청을 하고, 권 대감은 임금에게 알리었고, 마침내 임금이 교지를 내려 종이 부역이 혁파되었다는 것이다.

 

“덕암당혜경지역혁파유공비(德巖堂蕙璟紙役革罷有功碑)” 1884년(고종 21년)
“덕암당혜경지역혁파유공비(德巖堂蕙璟紙役革罷有功碑)” 1884년(고종 21년)

 

이런 공적을 통도사 부도원에 새겨놓았으니, “덕암당혜경지역혁파유공비(德巖堂蕙璟紙役革罷有功碑, 1884년 고종21)”가 그것이다. 비 앞면에 그의 공적을 칭송한 글이 새겨져 있다.

 

我師之前 累卵之團 (통도사의 형세가) 우리 스승님 이전에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는데,

我師之後 泰山之安 우리 스승님 이후에는 태산같이 안정이 되었네.

千里京洛 單獨往還 천리에 있는 서울을 혼자서 갔다 돌아오시고 나니,

春回覺樹 蔭陰葳蕤 보리수에 봄이 돌아오고 우거진 초목이 무성하였다네.

其儷不億 可止可居 그 수 헤아릴 수 없기에 머물고 거할 만하거늘,

樹此豊功 有寺無之 여기 큰 유공비 세웠는데 절 만 있고 이제 스님은 안 계시네.

 

글. 사진 : 이병길 (영남알프스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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