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2)
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2)
  • 이병길 시민기자.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승인 2018.11.2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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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지역혁파의 주인공 경상감사 권돈인

통도사의 위기는 덕암당이 서울에 다녀온 후 안정이 되었다. 스님이 만난 권돈인의 영세불망비가 역시 통도사 부도원에 있다. 권돈인의 불망비는 백색 화강암으로 높이 175.5㎝이다. 비석의 앞면 중앙에 ‘도순상국권공돈인영세불망비(都巡相國權公敦仁永世不忘碑)’라고 기록되었고, 왼쪽에는 ‘군수오공하철(郡守吳公夏哲)’이, 오른쪽엔 ‘수사윤공영배(水使尹公永培)’가 기록되어 있다. 앞면 아래쪽에 ‘다만 잡다한 부역의 폐해를 일체 감면하고 제거하였으니 그 은혜와 덕은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넓다(祗與雜役 一切蠲除 其恩其德 如山如海)’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이방영리 윤성빈(吏房營吏 尹誠彬), 형방영리 신유정(刑房營吏 申維禎), 좌막 윤협시(佐幕 尹恊時), 지색 서유곤(紙色 徐有坤), 수이방 이인오(水吏房 李仁五), 지창색 김상곤(紙倉色 金相坤), 좌수 최제석(座首 崔齊碩), 이방 정문주(吏房 鄭文周)’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측면에도 비문이 있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른 권돈인의 연보를 보면 “1835년(헌종 1) 2월에 형조판서, 12월에 진하겸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 1836년 10월에 한성판윤, 1837년 7월에 병조판서, 1838년에 5월 경상감사, 1839년 4월 한성판윤, 7월엔 이조판서, 1840년 7월 형조판서, 1841년 1월 이조판서, 7월 공조판서, 1843년 4월 우의정, 10월 좌의정, 1845년(헌종 11) 11월 영의정에 올랐다.”고 돼 있다.

권돈인의 비석을 보면, 권돈인의 직책은 경상남도순찰사이다. 순찰사 권돈인이 양산 통도사를 양산군수와 수군절도사와 함께 방문하여 여러 잡역들을 면제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통도사 성보박물관에는 1838년(헌종 4) 경상도 감영에서 통도사에 잡역을 혁파해 준다고 발급한 문서인 “양산군통도사지역혁파급각양잡역존감절목”이 있다. 통도사에 부과된 지역(紙役)과 각종 잡역(雜役)의 부역이승도(僧徒)가 붕괴되고 절이 폐사될지도 모른다는 어려움을 호소한 통도사에 대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천년고찰임을 감안하여 과도한 부역을 감해주고 일부만 남겨 지속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감면된 내용을 살펴보면, 백지(白紙), 홍장지(紅壯紙), 유지(油紙) 등 다양한 종이와 관모 및 신발 등의 의복류와 쌀과 메주, 산나물 등의 곡식류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1842년에 제작된 “덕암대사잡역혁파유공기현판”이 있다. 양산군수 오하철은 1837~39년까지 2년 동안 부임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통도사의 종이부역 혁파는 1838년 권돈인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일이다.

머리 기르고 덕암장 스님이 서울에 가서 만난 사람은 영의정(1845~1851년)이 아닌 한성판윤이나 판서인 권돈인이었을 것이다. 권돈인을 만나 스님이 하소연을 하고 이것을 들은 권돈인이 직접 경상감사로 약 1년간(1838년 5월~1839년 4월) 있으면서 통도사의 종이부역을 비롯한 각종 잡역을 혁파해준 것이다. 조용헌의 <통도유사>는 자신이 고백했듯이 사기체가 아닌 유사체이다. 유사(遺事)이기에 그는 통도사에 대한 고증이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 단지 구전을 사실로 받아 적은 탓이다. 따라서 덕암장 혜경 스님이 서울에 가서 만난 권돈인은 “훗날 영의정이 된 권돈인”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해장보각 전경, 현판과 주련이 권돈인의 글씨이다.
해장보각 전경, 현판과 주련이 권돈인의 글씨이다.

 

또 통도사에 전해오는 이야기. 통영에 권돈인이 경상감사(관찰사)로 내려오자 초청받은 혜경 스님이 보무도 당당하게 관가의 솟을대문 어간문(중앙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한다. 스님이 어간을 통과했으니 그 소문이 전국으로, 종국에는 조정에까지 퍼졌다. 관찰사를 문책하니 권 대감이 답하기를 “내가 나왔다. 내가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에 누가 따라왔는지 나는 모른다.”는 선문답 같은 답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권돈인과 혜경 스님 모두 대단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권돈인은 불교에는 관용적일지는 몰라도 서학(천주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김대건은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포한 자이니 엄중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해 처형당하게 하였다.

 

영의정 권돈인 해장보각에 글씨를 남기고

훗날 통도사에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은 자신의 필적을 남긴다. 바로 1851년 국화가 만발한 가을에 쓴 해장보각 편액과 주련이다. 1851년에 그가 유배를 가고 귀양지에서 죽으니 그의 마지막 유작일수도 있다. 해장보각은 불경을 보관한 도서관이다. 자장율사는 중국에서 최초로 불경을 가져온 스님이다. 스님의 진영을 모셔놓고 있어 개산조당(開山祖堂)이라고도 한다.

 

寶臧聚玉函軸 보물 같은 경전을 옥함에 두루마리로 모셨으니,

集西域譯東土 서역에서 모아서 동토에서 번역했네.

鬼神護龍天欽 귀신이 지키고 천룡이 흠모하니,

標月指渡海筏 달을 가리키는 지표요, 고해를 건너는 뗏목이라.

 

그런데 권돈인이 당시 통도사에서 만난 사람은 덕암당 혜경 스님만이 아니었다. 성담 의전(聖潭倚琠 ?~1854) 스님도 있었다. <동사열전> 등을 종합해보면, 성담스님은 통도사에 설송 문중의 세거를 형성한 응암 희유(凝庵禧有)의 5세손이자 청담 준일(淸潭俊一)의 제자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불경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까지 두루 읽었다. 영호남의 이름난 강백과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얻어 수행과 학업에 정진한 결과 그의 명성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명대사의 법맥을 이어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과 같은 당대 고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승이 되었다. 그는 여러 스님 진영의 찬문을 지어 문장도 뛰어나 글로써 문인을 감동시킨 대강백이었다. 그는 통도사 지역혁파에 공을 세운 “덕암대사잡역혁파유공기현판”(1842)을 쓰기도 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과 교류하였는데, 그중에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있었다.

 

서화의 친구인 권돈인과 추사 김정희

알다시피 권돈인과 김정희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막역한 친구였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권돈인에 대해 ‘뜻과 생각이 뛰어나다’고 평한 바 있다. 그는 학문뿐 아니라 예술에도 높은 경지를 이루었는데, 예서 글씨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일찍이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극찬을 받았다.

유흥준은 둘 사이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추사의 그림자 같은 벗은 권돈인이었다. 권돈인은 추사보다 세 살 위였지만 가장 막역하게 지낸 벗으로, 무수한 편지와 시.서.화를 주고받으며 화답(和答)하고 합작(合作)하고 합평(合評)했다. 만년에 함께 귀양을 떠나 유배에서 풀린 다음에는 서로 말년의 외로움을 의지했으며 글씨 또한 비슷했다. 학예로 말하면 추사가 항상 권돈인에게 베푸는 입장이었지만, 세상사와 인간적인 일에서는 추사가 권돈인에게 도움을 받으며 감사하는 처지였다. 권돈인과는 중년 이후, 특히 노년에 가까웠고 장년 시절엔 특별한 교유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유흥준, <추사 김정희-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희>, ㈜창비, 2018. 110쪽)

추사 김정희가 초의 선사에게 보낸 편지가 38통이고,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가 35통이니, 이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막역한지를 알만하다. 두 사람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세한도(歲寒圖)’이다. 추사는 이재의 세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문을 썼다.

“그림의 의미가 이 정도는 되어야 형사(形似) 너머에 있는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 할 것이다. 이 뜻은 옛날의 명가(名家)라 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공의 시(詩)만이, 송나라 시인 반랑(潘閬)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림 또한 그렇다. 완당 김정희 쓰다.(畵意如此而後, 爲形似之外, 此意雖, 古名家得之者絶少, 公之詩不拘於閬工畵亦然. 阮堂.)”

 

권돈인의 ‘세한도’. 제목 옆에 찍힌 장무상망(長毋相忘, 서로 오래 잊지 말자)이란 인장을 보면 이재와 추사의 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된다. 추사의 세한도에 비해 아늑하고 평온해 보이는 풍경이다.
권돈인의 ‘세한도’. 제목 옆에 찍힌 장무상망(長毋相忘, 서로 오래 잊지 말자)이란 인장을 보면 이재와 추사의 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된다. 추사의 세한도에 비해 아늑하고 평온해 보이는 풍경이다.

 

성담의전의 진영에 글을 남긴 권돈인과 김정희

권돈인은 성담 의전 스님의 요청에 따라 1852년 초봄에 도암 우신(度庵宇伸, 1801~1823 활동) 선사를 위해 영찬을 짓기도 했다. 성담의전 스님과 권돈인, 김정희의 관계를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이 바로 성담 스님의 찬문이다. 먼저 권돈인은 스님의 입적 후 진영에 다음과 같은 기문과 헌시를 직접 쓰고, 끝에 ‘우랑(又閬)’, ‘이재(彛齋)’라는 자신의 호를 낙관했다. 드문 일이다.

“성담 스님은 나와 세속의 경지에서 함께 노닐었다. 잔잔한 연못처럼 참선에 몰두하는가 하면, 부처님의 뜻을 잘 좇아 내전(內典, 불경)도 명철히 익혔다. 시인들과 잘 어울렸고 나는 불가에 의탁하여 스님과 우의를 쌓았다. 작년 내가 있는 여차석실(如此石室)을 찾아와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올 봄에 다시 만날 것을 서로 약속하였건만 지금 그 스승인 정허(靜虛)로부터 작년 12월 3일에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적하기 며칠 전에 영축산 고개가 사흘 동안 울었고 또 금강계단에는 닷새 동안 방광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학인 스님들은 곧바로 진영을 그려 스님의 도를 전하려 하였고, 이에 나한테 글을 부탁한 것이다. 나 역시 늙었다. 스스로 이제 생사의 번뇌와 함께 모든 허물도 다하였다고 생각하였지만,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보니 새삼 절절히 슬픈 마음이 인다(聖潭師 從余於丹乙廣陵之間 師凝靜淵黙 深契佛指 明習內典 出入詩家 余託以空門友誼 去年委訪於如此石室 留數日泊 約以今春又相逢 今其師靜處書來 去年臘月三日 聖潭示寂 前幾日 寺之山靈鷲三日鳴 戒壇又五日放光 諸學人 卽寫其影 以傳其道 屬余一言 余且老 自請死生煩惱諸漏已盡 特亦有切悲者存).”

또 헌시를 덧붙였다.

 

성담의전 진영, 왼쪽 상단에 권돈인의 글과 낙관이 보인다.
성담의전 진영, 왼쪽 상단에 권돈인의 글과 낙관이 보인다.

 

謂師是影不是宲 스님의 진영은 참모습이 아니다.

三十二相皆空相 삼십이상이 모두 공한 모습이다.

而謂非空卽是宲 그렇다고 공이 곧 진실인 것은 아니다.

師何不演經說典 스님은 어찌 경전을 강연하지 않으시는가?

如丹乙邦廣陵口 단을의 변방과 광릉의 입구에서와 같이

揚眉吐古露兩肘 눈썹을 올리고 숨을 토해내며 양 팔꿈치를 걷고서는

無量無數說方便 한량없는 방편을 말하고

眎我無上正等覺 우리에게 무상법문을 보이셨는데.

是相不相影不影 이 모습은 모습이 아니요 진영은 진영이 아니다

是師平等宲相印 이는 스님의 평등실상인이고

放戒壇光鷲山鳴 계단이 광명을 놓고 영취산이 우는 것은

是師無餘涅槃時 스님의 무여열반인 때이다.

潭空水定了常寂 연못은 공하여 물이 잔잔해 항상 고요하니

師如是又出三昧 스님은 이렇게 또 삼매에 들었다 나온다.

 

추사는 이재가 소개해준 성담 스님을 만난 후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낸다. “일전에 영남의 승려 성담이 그대의 소개를 받고 나를 찾아와 무료하고 우울한 일상에서 다행히 며칠을 그와 함께 보냈소. 그대의 주위에서 온 사람이라 그런지 확실히 남보다 뛰어난 데가 있더군요.” 추사도 성담 스님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추사 70세 때 헌시를 짓는다. 통도사에 현판(懸板)으로만 전해져온 ‘성담상게(聖潭像偈)’, 곧 ‘성담 스님의 상(진영)에 대한 게송’이다.

“얼굴엔 달이 가득하고 머리엔 꽃이 피었네. 아아! 성담 스님이 바로 이 그림 속에 있으니 이로써 내 슬픈 마음 달래리. 대비의 모습이 바로 이러할지니, 문자와 반야가 서로 당겨 빛을 뿜는구나!(面門月滿 頂輪花現 噫嘻 聖師 宛其在茲 可以塞 老淸之悲歟 是大悲相歟 文字般若 互攝發光)”

 

통도사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통도사 역사를 간직한 통도사 부도원에는 지역혁파로 인해 통도사를 부흥하게 한 덕암당 혜경 스님, 지역혁파를 한 이재 권돈인의 불망비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공유한 성담의전 스님과 김정희의 흔적이 있다. 통도사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몇 점 있다. 통도사의 “탑광실(塔光室)”, “노곡소축(老谷小築)”, “산호벽수(珊瑚碧樹)”, “일로향각(一爐香閣)” 등과 극락암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호쾌대활(好快大活)”, 사명암의 “대몽각(大夢覺)”, “일화오엽루(一花五葉樓)” 등이 그것이다.

 

추사의 ‘성담상게(聖覃像偈)’. 1855년 2월, 추사 나이 70세 때인 과천 시절 글씨이다.
추사의 ‘성담상게(聖覃像偈)’. 1855년 2월, 추사 나이 70세 때인 과천 시절 글씨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나무는 죽어서 종이를 남긴다고 하였다. 종이 부역으로 인해 사찰의 닥나무는 뿌리 채 뽑히고 종이 뜨는 기술은 단절되고 말았다. 과도한 부역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것이다.

 

통도사 부도원에 있는 이재 권돈인의 불망비
통도사 부도원에 있는 이재 권돈인의 불망비

 

글. 사진 : 이병길 (영남알프스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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