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기포(古阜起包)로 동학혁명의 서막 올라
고부기포(古阜起包)로 동학혁명의 서막 올라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1.2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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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보은 교조신원운동 이후 70여 개 군현에 접 조직

해월(海月)은 법소(法所)와 도소(都所)를 설치해 공인 이후를 대비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백성들의 바람을 대변하자 동학에 우호적이던 일반 백성들과 양반들도 동학에 입도했다. 법소와 도소가 설치되자 각지에서 동학에 몰려드는 광경이 벌어졌다. 당시 동학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동학혁명에 직접 참여했던 오지영이 쓴 <동학사(東學史, 1924년 초고본)>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현재(現在, 1893년)의 조직(組織)에로는 청주(淸州)에 손천민(孫天民), 서우순(徐虞淳), 손병희(孫秉熙), 이용구(李容九) 등(等)이오. 보은(報恩)에 황하일(黃河一), 김연국(金演局) 등(等)이오. 목천(木川)에 김복용(金福用), 이희인(李熙人)이오. 옥천(沃川)에 정원준(鄭元俊)이오. 공주(公州)에 김○○(金○○), 최○○(崔○○)오. ○○○○○오. 신창(新昌)에 김경삼(金敬三)이오 덕산(德山)에 김명배(金蓂培)오. 당진(唐津)에 박용태(朴瑢台), 김현구(金顯玖)오. 태안(泰安)에 김병두(金秉斗)오. 홍주(洪州)에 김주열(金周烈)이오. 면천(沔川)에 박희인(朴熙寅)이오. 안면도(安眠島)에 주병도(朱炳道)오. 남포(藍浦)에 추용성(秋鏞聲)이오. 전라도(全羅道)로는 정읍(井邑)에 손화중(孫和中)이오. 금구(金溝)에 김덕명(金德明), 김방서(金邦瑞)오. 부안(扶安)에 김석윤(金錫允), 김낙철(金洛喆)이오. 태인(泰仁)에 김개남(金開南), 최경선(崔景善), 김낙삼(金洛三)이오 고창(高敞)에 오시영(吳時泳), 임형로(林亨老)오. 무장(茂長)에 송경찬(宋敬贊), 강경중(姜敬重)이오. 영광(靈光)에 최시철(崔時澈)이오. 고부(古阜)에 송주옥(宋柱玉), 전봉준(全琫準)이오. 김제(金堤)에 김태년(金奉年), 황경삼(黃敬三)이오. 만경(萬頃)에 진우범(陳禹範)이오. 옥구(沃溝)에 장경화(張景化), 허진(許鎭)이오. 고산(高山)에 박치경(朴致景)이오. 전주(全州)에 남계천(南啓天), 윤상오(尹相五), 서영도(徐永道), 허내원(許乃元)이오. 무안(務安)에 배규인(裵圭仁)이오. 임실(任實)에 이용거(李龍擧), 이병춘(李炳春)이오. 남원(南原)에 김홍기(金洪基)오. 순창(淳昌)에 오동호(吳東昊)오. 무주(茂朱)에 이응백(李應白)이오. 장흥(長興)에 이방언(李邦彦)이오. 담양(潭陽)에 김중화(金重華)오. 창평(昌平)에 유형로(柳亨魯)오. 익산(益山)에 오지영(吳知泳), 오경도(吳京道)오. 장성(長城)에 기우선(奇宇善)이오 능주(綾州)에 문장렬(文章烈)이오. 광주(光州)에 박성동(朴成東)이오. 보성(寶城)에 문장형(文章衡)이오. 나주(羅州)에 오중문(吳仲文)이오. 영광(靈巖)에 신정(申檉)이오. 강진(康津)에 김병태(金炳泰)오. 해남(海南)에 김도일(金道一)이오 임피(臨陂)에 홍경식(洪敬植)이오. 장수(長水)에 황학주(黃學柱)오, 진안(鎭安)에 김경여(全叔如)오. 흥양(興陽)에 송년호(宋年浩), 류희도(柳希道)오. 여산(礪山)에 김현순(金顯舜)이오. 진산(珍山)에 조경중(趙敬重)이오. 금산(錦山)에 박능철(朴能哲)이오. 곡성(谷城)에 조석하(趙錫夏)오. 구례(求禮)에 임봉춘(林奉春)이오. 순천(順天)에 박낙양(朴洛陽)이오. 흥덕(興德)에 고영숙(高永叔)이오. 경상도(慶尙道)로는 진주(晉州)에 손은석(孫殷錫)이오 곤양(昆陽)에 김성룡(金成龍)이오. 하동(河東)에 여장협(余章恊)이오. 남해(南海)에 정룡태(鄭龍泰)오. 강원도(江原道)로는 원주(原州)에 임순화(林淳化)오. 횡성(橫城)에 윤면호(尹冕鎬)오. 홍천(洪川)에 심상현(沈相賢)이오. 경기도(京畿道)로는 안성(安城)에 정경수(鄭璟洙)오. 양지(陽智)에 고재상(高在嘗)이오. 여주(驪州)에 임학선(林學善), 홍병기(洪秉箕)오. 광주(廣州)에 이종훈(李鍾勳)이오. 이천(利川)에 김규석(金奎錫)이오. 양근(楊根)에 신재준(辛在俊)이오. 지평(砥平)에 김태열(金泰悅)이오. 황해도(黃海道)로는 해주(海州)에 박종현(朴鍾賢)이오. 송화(松禾)에 방찬두(方燦斗)오. 신천(信川)에 류해순(柳海洵)이오. 재령(載寧)에 원용일(元容馹), 한화석(韓華錫)이오. 문화(文化)에 윤기호(尹基鎬)오. 풍천(豐川)에 손두순(孫斗淳)이오. 장연(長淵)에 정량(鄭樑)이오. 안악(安岳)에 김봉하(金鳳河) 등(等)이 접주(接主)의 임(任)에 당(當)하엿섯다. 당시(當時) 접주(接主)의 임(任)에 잇는 사람들은 포덕(布德)의 인수(人數)와 혹(或)은 인망(人望)으로 하엿스며 접솔(接率)의 수(數)로 말하면 대자(大者)는 삼사만중(三四萬衆)이며 소자(小者)는 일이천명(一二千名) 사람을 관리(管理)하엿섯다.

 

오지영은 1893년에 동학이 충청, 전라,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 등 6개도에 접(接), 즉 도소(都所)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다고 했다. 위의 기록을 세밀히 살펴보면 충청도에는 14개 군현에 20명의 대접주, 전라도에는 41개 군현에 54명의 대접주, 경상도에는 3개 군현에 3명의 대접주, 강원도에는 3개 군현에 3명의 대접주, 경기도에는 7개 군현에 8명의 대접주, 황해도에는 8개 군현에 9명의 대접주가 있었다. 당시 동학의 세력은 전국의 약 1/3에 해당하는 74개 군현에 걸쳐 조직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학혁명이 발발한 전라도에 당시 동학의 접이 가장 잘 되어 있었다는 점은 동학혁명과 관련해 시사하는 점이 크다. 이들 대접주 가운데 손병희, 이종훈, 홍병기 3인은 뒷날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가 되었다.

해월은 늘어나는 도인들은 단속하기 위해 이전보다 훨씬 더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문바위골에 강석(講席)을 마련해 각지의 대접주를 불러 모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지도했다.

 

전봉준, 조병갑의 학정에 고부기포 모의

동학혁명의 기점이었던 1894년 1월 10일의 고부기포는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저항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부기포는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1893년부터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사발통문(沙鉢通文)’을 통해서 밝혀졌다. 1968년 세상에 공개된 ‘사발통문’은 전봉준과 함께 ‘사발통문’에 서명했던 송대화(宋大和)의 후손 송후섭이 보관해온 것을 같은 집안의 송기태가 공개했다. 이 ‘사발통문’ 외에 ‘필사본 사발통문’이 송재섭이 지은 <갑오동학혁명란과 전봉준장군실기>에 실려 있다. ‘필사본 사발통문’을 남긴 송재섭은 ‘사발통문’에 서명한 송주성(宋柱成)의 아들로 천도교 고부교구에서 금융원, 공선원, 교구장, 종무사 등으로 활동했다. 송재섭은 1954년 ‘사발통문’을 필사했는데 부친이 소장한 ‘사발통문’을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에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만들었다. 전봉준, 정종혁, 김도삼, 송두호 등 고부의 동학도들은 농민들의 억울함을 시정해달라고 조병갑에게 소장을 제출했지만 쫓겨났다. 전봉준 등은 물러서지 않고 전라감사 김문현을 찾아가 애소(哀訴)하였으나 역시 내쫓겼다. 이에 전봉준 등 고부의 동학도들은 학정을 일삼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기 위해 송두호의 집에서 기포를 모의하고 결의를 다지기 위해 ‘사발통문’을 만들었다. 사발통문에는 모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열돼 있다.

 

동학혁명을 모의한 사발통문(沙鉢通文). 사발통문에 서명한 사람은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흥오,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홍, 송인호 등 20명으로 이들 중 10명은 동학혁명 때 사망했고 나머지 10명 중 대부분은 천도교 고부교구에서 활동한 동학도들이었다. 즉, 전봉준이 고부기포 때 동학도를 중심으로 기포했음을 사발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동학혁명을 모의한 사발통문(沙鉢通文). 사발통문에 서명한 사람은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흥오,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홍, 송인호 등 20명으로 이들 중 10명은 동학혁명 때 사망했고 나머지 10명 중 대부분은 천도교 고부교구에서 활동한 동학도들이었다. 즉, 전봉준이 고부기포 때 동학도를 중심으로 기포했음을 사발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일(一). 고부성(古阜城)을 격파(擊破)하고 군수조병갑(郡守趙秉甲)을 효수(梟首)할 사(事)

일(一). 군기창(軍器倉)과 화약고(火藥庫)를 점령(占領)할 사(事)

일(一). 군수(郡守)에게 아유(阿諛)하여 인민(人民)을 침어(侵魚)한 탐리(貪吏)를 격징(擊懲)할 사(事)

일(一). 전주성(全州營)을 함락(陷落)하고 경사(京師)로 직향(直向)할 사(事)

 

그러나 고부기포는 곧바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기포 후 첫 실행 과제였던 군수 조병갑이 11월 30일자로 익산군수로 발령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고부기포는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그런데 조병갑을 이어 11월 30일 고부군수로 임명된 이근용(李垠鎔)이 12월 24일에 다시 황해도 안악군수로 전임 발령되었다. 그리고 이날 신좌묵(申佐默)이 고부군수로 임명됐으나 다음날 신병을 이유로 사직했고, 그 이튿날인 26일 이규백(李奎白)이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됐으나 그도 또한 신병을 이유로 다음날인 27일 사직했다. 이후 하긍일(河肯一), 박희성(朴喜聖), 강인철(康寅喆) 등이 고부군수로 임명되었지만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이처럼 12월 한 달 동안 고부군수에 5명이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핑계를 대고 부임하지 않았다.

 

고부기포로 동학혁명의 서막 올라

 

동학혁명모의탑.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산 16번지 주산마을 입구에 동학혁명모의탑이 있다.
동학혁명모의탑.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산 16번지 주산마을 입구에 동학혁명모의탑이 있다.

 

새로 임명된 군수들이 고부에 부임하지 않은 것은 익산군수로 발령난 조병갑이 고부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병갑은 전라감사 김문현의 강력한 천거로 1894년 1월 9일 다시 고부군수로 재발령 받았다.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하자 전봉준 등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동학도들은 1893년 11월에 기획했던 결의 사항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전봉준 등 고부기포의 주모자들은 동학교인과 기포에 참여할 일반 민중들을 1월 10일 새벽 말목장터에 집결토록 했다. 1월 10일 첫 닭이 울기를 기다려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로 진격했다.

 

사발통문을 작성한 송두호의 집. 사발통문을 작성한 송두호의 집은 동학혁명 당시 도소로도 사용됐다. 송두호와 송주옥은 동학혁명 당시 체포돼 나주옥에서 희생당했고, 관군은 동학혁명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이 집을 불 질렀다. 동학혁명이 끝나고 사발통문 서명자였던 송두호의 아들 송대화와 이성하, 송주성 등이 중심이 돼 이 건물을 매입하고 천도교 고부교당으로 사용했다.
사발통문을 작성한 송두호의 집. 사발통문을 작성한 송두호의 집은 동학혁명 당시 도소로도 사용됐다. 송두호와 송주옥은 동학혁명 당시 체포돼 나주옥에서 희생당했고, 관군은 동학혁명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이 집을 불 질렀다. 동학혁명이 끝나고 사발통문 서명자였던 송두호의 아들 송대화와 이성하, 송주성 등이 중심이 돼 이 건물을 매입하고 천도교 고부교당으로 사용했다.

 

전봉준을 위시해 20명의 고부와 인근 동학도들은 1893년 11월 작성한 ‘사발통문’에서 “고부관아를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하여 무장하여 탐관오리를 징치한 후 전주성을 점령, 서울로 직향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고부기포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교조신원운동 이후 동학교인들의 주체적인 혁명성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에서 기획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발통문의 결의로 전개된 고부기포는 동학혁명의 기점이며 서막이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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