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하나였던 그 시절
모든 것이 하나였던 그 시절
  • 이동고 기자
  • 승인 2018.11.28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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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쓰는 자연 이야기
고향을 찾을 때마다 개울은 폭이 좁아지고 얕아지는 듯하다. 중태기 등 물고기 풍성한 개울이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동고 기자
고향을 찾을 때마다 개울은 폭이 좁아지고 얕아지는 듯하다. 중태기 등 물고기 풍성한 개울이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동고 기자

고향을 가는 것은 1년에 딱 두 번이다. 벌초와 시제를 모시는 날이 그 날이다. 이제 사람 만나기는 먼 조상들 오랜 죽음이 맺어주는 기회가 더 많다. 살아있는 어르신들보다 죽은 조상들이, 더 뿌리 깊은 유교문화로 친족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삼형제에 둘째 형님이 세상을 뜨니, 대가족이긴 하지만 형제 두 사람이 다다. 두 날은 모든 일의 우선 행사로 그냥 고향마을에 간다. 이런 일 아니면 고향마을에 갈 일도 별로 없다. 고향마을은 유년의 기억들이 많은 곳이다. 어느 곳 하나 발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살가운 기억이 많다. 하지만 예전 풍경들은 그냥 그대로 있지 않다.

마을 재실 앞 도랑은 동네잔치가 있으면 돼지를 끌어다 잡았다. 꽥꽥 하는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붉은 피가 양동이에 줄줄 흘러내리면 펄펄 끓어오르는 뜨거운 물을 부어 털을 뽑았다. 배를 가르면 그 추운 날에 서린 김들이 주변에 피어오르고 특이한 냄새가 났다. 도랑 다리 위에 앉은 수염 허연 어르신이 에헴에헴거리면 돼지를 잡던 젊은이는 김이 나던 간과 염통을 왕소금에 찍어 어르신에게 갖다 드렸다. 이빨마저 부실한지 입을 한창이나 우물거렸다. 대장을 뒤집어 씻어내고 소장에 칼집을 잡아 도랑물에 씻고 소금으로 또 씻는 과정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았다.  

밤이면 동네 아이들은 재실에 모였다. 집들이 옹기종기 있는 동네에선 시끄러운 우리를 감당할 공간이 없었고 밤이면 마을 바깥에 있던 재실로 모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외진 곳에 있어 무서웠지만, 재실은 해방구였다. 가로등이 멀어 어두웠던 숨바꼭질은 술래가 둘이었다. 그 진을 담당하던 큰 석류나무가 마당에 두 그루 있었다. 도시에서 온 아이들은 볏단 속이든, 마루 밑이든 으슥한 어둠 속으로 숨으러 가는 것이 두려웠고 술래가 되면 구석 전통 화장실에서 촌놈들이 호기롭게 “나 여기 있다”를 외쳐도 찾으러 가기가 더 무서웠다.  

밭을 하나 두고 건너편에는 큰고모네가 그 근방 마을 딱 하나인 방앗간이었던지라 겨울방학은 호기심 넘치는 일들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은 탈곡하고 명절이 다가오면 떡가래를 뽑고 인절미를 쪘다. 큰 솥 위에 큰 시루를 두 개나 포개 떡을 찌던 생각이 또렷하다. 아궁이에 불 조절을 해가면 떡이 익는 냄새가 진동했고 떡 시루 하나 받아먹으려고 아궁이 근처를 멀리 떠나지 못했다. 시루 사이에 발라놓은 찹쌀반죽 사이로 픽픽 김이 새고 그 틈새를 여러 번 바르면 이내 떡이 익었다. 시루를 내리면 세상에서 가장 큰 케이크 같은 콩고물, 팥고물 인절미에서 김이 향기롭게 모락모락 올랐다.

고모댁은 그 방앗간을 고치는 공구창고가 따로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다 탐내는 보물창고였다. 제기를 만드는 와셔부터, 작은 쇠구슬은 팽이 끝에 끼우는 심으로 요긴하고, 다 망가진 우산대도 요긴하게 썰매를 만들던 때였다.
동네 친구들은 필요한 도구를 언제나 나를 꾀어 가져오게 만들었는데 개울에 흙도랑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기 위한 삽이며 돼지 구유용 고무 바가지며 물고기를 뜨는 낡은 바구니며 얼마나 고모 눈치를 보며 가져갔는지 그 물건을 잃어버려 또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아득하다. 마을 동무들과 어울리는 놀이가 주는 즐거움은 또 다시 바늘도둑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고모네는 알지 못할 사람이 살고 있고 그 웅장하던 방앗간 기계와 기계 돌아가던 소리하며 그 기계에 넓은 벨트를 작대기로 탁 걸어 영웅처럼 보였던 고모부도 이제 다 사라졌다.

저곳은 호박덩굴 무성할 때 황구렁이가 뭘 잡아먹었는지 뚱뚱한 몸을 하고 똬리를 틀고 햇볕을 쬐던 자리, 그걸 보려고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약으로 쓴다고 어른이 작대기로 잡던 자리다. 그리고 저기 저 자리가 동네 우물이 있던 자리다. 까치발하며 우물을 들여다보면 쌓인 돌에 이끼가 끼어 있기도 했다. 그 차디찬 우물은 이제 메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 집터가 예전에 살던 우리 집터고 저 마당 축담 아래로 멀리 오줌을 누기도 했다.
그 앞 개울가에는 대나무밭이 있었는데 밤에 자다가 깨어 윗집 안채로 엄마 찾아가는 길이 너무나 무섭기도 했다. 이제 그 대나무밭은 다 사라졌고 그 음습하고 깊던 길은 시멘트로 확 드러났다. 

발목이 다 시린 날씨에, 그때 우글쭈글하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돌아가신 집에서 이제 할아버지가 다 된 아제가 제를 모신다. 제가 끝나자 그 방앗간에서나 보았던 길고 맛 좋았던 콩고물 가래떡을 꽈배기 틀 듯 끊어 입에 넣어본다. 아니겠지만 그 재실 앞에서 잡았을 법한 살코기 묵직한 돼지고기를, 왕소금에 찍어 먹었다. 할머니가 나를 준다고 장롱 속에 모아두었던 그 곰곰한 문어는 아니지만, 문어 다리도 한 번 씹어 본다.

저기에는 돼지막과 같이 쓰던 이층 변소가 있었고, 작은 사랑방에 그득하던 동네 어르신들 니코틴 진내 가득하던 그 뜨뜻한 구들방과 화로. 그 구들방에서 잠 한 숨 못자고 온 것이 아쉽다. 모든 것이 하나였던 시절들. 그 시절 그 사람들은 벌써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이동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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