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기포와 만석보 파괴
고부기포와 만석보 파괴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1.2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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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세미 추징의 효율성을 명분으로 조병갑 다시 고부군수로

동학혁명의 서막이 된 1894년 1월의 고부기포는 1892년 4월 29일 임명돼 학정을 일삼던 조병갑의 재임용이 도화선이 되었다. 조병갑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 났지만 한 달 후인 1894년 1월 10일 고부군수로 재발령됐다. 곡창지대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고부군에 조병갑이 재임명될 수 있었던 이유는 든든한 배후였다. 조병갑의 친형인 병섭(秉燮)은 영의정을 역임한 큰아버지 조두순(趙斗淳)의 양자가 되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조병세(趙秉世), 전라감찰사 조병호(趙秉鎬), 동학탄압에 앞장섰던 충청감찰사를 지낸 조병식(趙秉式) 등은 조병갑과 같은 집안이었다. 이러한 조씨 세력의 정점에 조대비(趙大妃)가 있었다.

양주(楊州) 조(趙)씨 집안의 막강한 권력이 있었기에 전라감사 김문현은 조병갑의 재임명을 적극 추천했다. 1월 9일 조정에서는 “이조(吏曹)의 제본에 덧붙인 전라감사 김문현의 장계를 보니 전 고부군수 조병갑은 미납 세미(歲米)가 꽤 많아 이를 거두는 데 지금 부지런히 서두르고 있다. 나머지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이제 그를 다른 고을로 옮기면 새 수령이 손을 써야 하므로 자칫 잘못될까 마음에 걸린다 하였으므로 도신(道臣)의 장사(狀辭)가 이러하니 장계의 청대로 특별이 잉임(仍任, 재임명)함이 어떠하옵니까”라는 전라감사 김문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병갑을 다시 고부군수에 임명하였다. 조병갑이 거두던 세금을 새 군수가 부임해 맡으면 번잡하니 조병갑으로 마무리 지으라는 명분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도와 농민, 고부관아 습격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보고자 2차에 걸친 소장을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봉준은 뜻을 함께하는 동학접주들과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해 결의를 다졌다. 사발통문에서 전봉준 등은 고부성 격파→전주영 함락→서울 직행의 3단계 거사 계획을 세웠다. 고부기포의 청사진이며 동학혁명의 전체적 구상이 담긴 사발통문의 거사 계획은 조병갑의 익산군수 발령으로 유보됐지만, 그가 다시 부임하자 사발통문의 거사 계획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익산으로 발령 난 조병갑이 고부를 떠나지 않자 전봉준 등은 고부군수 재임명을 감지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결국 고부 백성들의 뜻과 전혀 다르게 조정이 답을 하자 기포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1894년 1월 8일 장이 섰던 말목[馬項]이 있는 배들평[梨坪] 일대에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자는 통문(通文)이 나돌았다. 전봉준은 미리 금구 원평의 대도소를 찾아 대접주 김덕명의 협조를 요청해 태인 주산접주 최경선도 동참하기로 했다. 이날 저녁에 동학교도와 농민 수천 명이 말목장터에 집결해 전봉준을 대표로 추대하고 탐관오리 조병갑을 죽이자는 결의를 다졌다. 다음날인 9일 저녁 동학도와 농민군은 이평면 예동(禮洞)에 집결해 대오를 갖추었다. 예동에 모인 동학도와 농민들 앞에서 전봉준은 조병갑의 학정을 낱낱이 성토하고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외치며 혁명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고부기포를 주도한 인물은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최경선 등 7명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동학도와 농민들은 10일 새벽 고부관아로 돌진했다. 예동에서 고부로 향하는 길은 천치(天峙)로 넘어가는 길과 영원면 운학동 뒤에 있는 재를 넘어가는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두 길이 다 고부관아까지 20리 거리였다. 동학도와 농민들은 두 갈래 길로 나누어 고부로 향했다. 동학도와 농민들은 고부관아로 향하던 중 대나무 밭을 지나면서 죽창을 만들었다. 동학농민군 가운데는 총포로 무장한 인원도 상당수 있었다.

두 갈래 길을 타고 고부읍성의 북성문(北城門) 밖에 합류한 동학농민군은 성을 포위하고 새벽 4시경에 고부읍성에 돌입했다. 당시의 상황을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부 북성(北城) 안에 들어가며 일제히 총을 쏘니, 고부읍 사면팔방으로 총소리와 함성소리가 한꺼번에 어울려 일어나며 고부읍을 에워싸고 성을 함락하였다.

고부읍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동헌을 습격했으나 조병갑은 없었다. <갑오동학혁명사>를 쓴 최현식은 조병갑이 영원면(永元面) 앵성리(鶯成理) 조모(曺某)의 기별로 급히 고부읍 동쪽 5리에 있는 입석(立石) 진선(眞仙)마을 정참봉의 집으로 숨어 여기에서 변장을 하고 밤중에 정읍 쪽으로 도망쳐 순창을 지나 전주감영으로 갔다고 했다. 사전에 기포를 감지한 조병갑은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간악한 무리들이 석기(席旗)를 높이 들고 죽창(竹槍)을 갖고서 부문(府門)을 덮쳤다.”고 하였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전봉준은 정참봉을 잡아 벌을 주었다.

 

만석보혁파선정비. 1894년 1월 9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도와 농민들은 이곳 예동에 모여 고부관아로 출발했다. 만석보는 1월 17일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이 말목장터로 옮긴 후 일부만 파괴했다. 1898년 고부군수로 임명된 안길수가 조병갑의 학정을 상징하는 만석보를 모두 허물고 선정을 다짐하자 군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만석보혁파선정비. 1894년 1월 9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도와 농민들은 이곳 예동에 모여 고부관아로 출발했다. 만석보는 1월 17일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이 말목장터로 옮긴 후 일부만 파괴했다. 1898년 고부군수로 임명된 안길수가 조병갑의 학정을 상징하는 만석보를 모두 허물고 선정을 다짐하자 군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말목장터로 본진 이동, 만석보(萬石堡) 파괴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군기고를 부수고 총창을 탈취하여 무장한 다음 억울하게 체포된 농민들을 풀어주었다. 날이 밝자 전봉준은 그동안 조병갑에 빌붙어 농민 수탈의 전면에 나섰던 오리(汚吏)들을 잡아 조사한 후 벌을 내렸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읍성 안팎에 장막을 치고 고부읍성에 머물렀다. 그리고 곧 통문을 띄워 고부군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고부군민들도 기포에 호응했는데 11일부터 모여든 군민들이 14일에는 18개 마을에서 1만 명이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노인과 어린 소년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장정들만 남게 했다. 전봉준은 고부군 창고에서 진황세로 강제 징수한 벼를 해당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전봉준 등 지도부는 사후 대책을 논의한 후 17일에는 식량 문제와 감영군의 출동을 예상하고 본진을 말목장터로 옮기기로 했다. 전봉준은 말목장터로 와서 조병갑 학정의 상징인 만석보(萬石堡)를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주력을 제외한 백성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고 각 마을마다 대표 5명을 선정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돌아가는 농민들이 거의 없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해산하면 결국 장두인 전봉준이 잡혀 죽기 때문에 전봉준을 지키기 위해 말목장터를 떠나지 않았다.

고부기포 후에 전봉준을 죽이기 위해 관에서는 암살대를 운영했다. <전봉준실기>에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0일 후(1월 20일경) 전주진영 군위 정석진(鄭錫珍)이 부하 수삼 인을 대동하고 봉준을 면회한 후 해산을 권유하였다. 때마침 수상한 상인 10여 명이 연초포(煙草包)를 부재(負載)하고 시장으로 입내함을 견(見)한 봉준은 그들을 다 결박하고 연초포를 피견(披見)하니 전율(戰慄)할 군기가 입(入)하였으니 이는 틀림없는 정군위의 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정씨는 도주하다 난민의 죽창 아래 참혹히 죽었다.

이 외에도 전봉준을 암살하기 위한 관의 활동에 대해 <박씨정기역사(朴氏定基歷事)>, <전라도고부민요일기(全羅道古阜民擾日記)> 등에 나타난다. 이런 일을 당하자 동학농민군은 본진을 호위하기 위해 날랜 장정 13명을 뽑아 더 보강했다. 이렇게 관에서 전봉준 등 지도부를 암살하려 하자 동학농민군들은 고부군으로 들어오는 사방의 출입을 엄하게 하여 동진강 나루를 건너지 못하게 했다. 또 군내의 요처는 동학농민군들이 장악했다. 전봉준의 암살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라감영에서는 병력을 동원하려고 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말목장터 전경. 전봉준 등이 돌린 통문에 1월 8일 저녁에 고부군민들이 모여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했던 곳이며 1월 17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고부읍성을 물러나와 진을 쳤던 곳이다. 사진 오른쪽의 감나무는 전봉준이 연설할 때 기댔던 감나무가 2003년 태풍으로 넘어져 죽은 후 다시 심었다. 전봉준이 기댔던 감나무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말목장터 전경. 전봉준 등이 돌린 통문에 1월 8일 저녁에 고부군민들이 모여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했던 곳이며 1월 17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고부읍성을 물러나와 진을 쳤던 곳이다. 사진 오른쪽의 감나무는 전봉준이 연설할 때 기댔던 감나무가 2003년 태풍으로 넘어져 죽은 후 다시 심었다. 전봉준이 기댔던 감나무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장기전을 대비해 백산에 성 축조

전라감영군의 진입에 대비하기 위해 동학농민군은 말목장터의 경비를 강화시킬 방안을 마련했다. 각 면 장정들로 하여금 교대로 차출해 숙직을 서게 했다. 이들은 3일간 숙직을 서고 교대했다. 전봉준은 말목장터로 와서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 최경선을 백산으로 보내 성을 축조하도록 했다. 말목장터는 사방이 탁 터진 곳이어서 관군이 공격해오면 수세에 몰리기 때문에 오래 유숙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또한 전봉준은 사발통문에서 계획한 대로 전주성과 서울로 향할 구상을 준비하기 위해 백산에 웅거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고부기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되도록 안핵사의 파견과 새 군수가 임명되지 않았다. 이는 전라감사 김문현이 고부기포의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익산군수로 발령 난 조병갑을 다시 고부로 불러들인 장본인이 자신이어서 조병갑이 탐관오리로 몰려 농민들에게 쫓겨 났다고 보고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암살대를 조직해 장두 전봉준을 제거해 고부기포를 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암살대가 체포돼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고 동학농민군이 더욱 강성해지자 자신이 해결할 수 없게 돼 상부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부기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2월 10일에야 김문현은 고부기포의 내용을 조정에 보고했다. 2월 15일 조정에서는 김문현에게 월봉삼등(越俸三等, 3등급의 봉급을 줄이는 가벼운 징계)을 내리고 고부군수 조병갑을 잡아 문초해 벌을 주기로 결정했다. 정부에서는 이날 새로운 군수로 박원명(朴源明)을 차출했다. 군수 임명을 문서가 아닌 구두로 먼저 했다는 것을 보면 그때서야 조정에서는 고부기포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안핵사로 임명해 사건을 조사하도록 시켰다.

용안현감(龍安縣監, 현 정읍시 용안면)으로 있던 박원명은 다음날인 16일 저녁에 구전명령을 받고 18일 정안을 출발해 19일에 고부로 도착해 부임했다.

 

전봉준 고가. 사적 제293호로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다. 1878년 지어진 이 집에서 전봉준은 농사일과 동네 서당의 훈장으로 일하며 고부접주로 활동했다.
전봉준 고가. 사적 제293호로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다. 1878년 지어진 이 집에서 전봉준은 농사일과 동네 서당의 훈장으로 일하며 고부접주로 활동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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