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의 군림천하
측천무후의 군림천하
  • 박종범 자유여행가
  • 승인 2018.11.2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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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글자가 없는 석주 ‘무자비’에는 무엇을 새길 것인가

 

하늘에는 태양만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달도 함께 떠 있다. 측천무후를 능력 있는 여성으로만 보는 관점은 잘못됐다. ‘여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잔혹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측천무후는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출발했다. 뛰어난 미모에 반해 마음속 깊이 점 찍어놓고 있었던 이세민의 아들 고종은, 훗날 이세민이 죽자 머리 깎고 승려가 되어있던 측천무후를 환속시켜 안방에 앉힌다. 원래 북방의 유목민과 혼혈이었던 당나라 황실은 한족의 예법에 크게 구애받지 않은 듯하다.

후궁의 자리에 만족할 수 없었던 측천무후는 갓난아기인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이고 황후에게 죄를 덮어씌운 후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꿰차고 앉는다. 황후가 된 뒤로는 원래 황태자를 폐하고 자신의 맏아들을 황태자로 세운다.

 

 

건강이 나빴던 고종과 함께 정치의 전면에 나서 국사를 운영하던 그녀는 맏아들을 견제하다가 결국에는 독살한다. 첫째, 둘째 아들은 어머니에게 독살 당했고, 셋째, 넷째 아들은 어머니의 입맛에 따라 황제가 되기도 하고 폐위되기도 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두 달 후 그의 아들이었던 중종에게서 제위를 빼앗았고, 690년에는 직접 황제가 된다. 그녀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심지어 나라 이름까지 바꿔 ‘주나라(무주)’로 개국되었음을 선포한다. 이때부터 705년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한다.

시안에서 북서쪽으로 8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양산이 있다.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묘인 ‘첸링(건릉)’이 있는 곳이다. 건릉은 당나라 황제 18개의 능 가운데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았으며 그 규모도 대단하다.

이 능은 세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남쪽에 있는 두 개는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지만 북쪽에 있는 가장 큰 봉우리는 자연적인 것으로 능의 중심부다. 원래는 능 주위로 성벽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고 한다. 황제의 능 아래에는 동물과 황제의 친위대 모양을 한 석인상들이 죽은 황제를 보필하듯 늘어서 있다. 이 석인상은 ‘61번 왕상’ 혹은 ‘61번 신상’으로 불리는데 당나라 변방, 오랑캐 국가의 왕과 신하들이다.

 

 

그런데 61개 석인상 가운데 둘을 제외하곤 모두 머리가 없어졌다. 모든 석인상의 등에는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마모되어 그나마 이름이 남아있는 6개 석인상조차 그 얼굴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석인상이 밤마다 요괴로 변해 민가로 내려와 양식을 축내자 백성들이 부숴버렸다는 이야기와 명나라 때 이 일대에 지진이 일어나 머리가 떨어졌다는 등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라진 머리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동쪽 석인상들 가운데 제일 뒷줄에 홀로 서 있는 석인상은 한반도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고 한다. 다른 석인상과 달리 옷소매가 넓고 옷이 세 겹으로 드리워져 있다. 게다가 왼손에는 활까지 쥐고 있다. 군림천하를 했던 제국의 위상을 돋보이게 하고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는 극동의 강국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1개 석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명단 중 36명은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 ‘토욕혼’의 마지막 왕, ‘모욕낙갈발’이 포함되어 있다. 토욕혼은 오늘날 중국 ‘청해성’으로, ‘강’이라는 유목민족이 대대로 독립국을 이루며 수백 년 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던 땅이다. 하지만 이웃한 토번(티베트)에 일세를 풍미했던 영웅이 나타난다. ‘손챈감뽀’는 순식간에 설역고원을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토욕혼을 집어삼키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사실 토번과 당나라는 오래전부터 청해호의 초원지대를 놓고 갈등을 빚어 왔었다. 이는 당시의 전쟁이 주로 기마병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우수한 말을 양성할 초원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토번이 팽창하면서 위협을 느낀 토욕혼의 모용낙갈발은 당나라와 사돈을 맺고 나라를 보존하려 했지만 끝내는 토번에게 나라를 잃고 만다. 그후 당에 투항해 이렇게 고종 앞에 공손한 신하의 모습으로 서 있게 된 것이다. 글자가 사라진 탓에 어떤 게 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구려의 패망과 겹쳐져 씁쓸했다.

 

 

건릉 남쪽 17개의 배장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의덕태자묘’와 ‘영태공주묘’가 있다. 의덕태자 이중윤과 영태공주 이선혜는 할머니인 측천무후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의덕태자 이중윤은 682년, 아버지 중종이 아직 황태자 신분일 때 태어났다. 고종은 기뻐하며 이 손자를 황태손으로 정했다. 이듬해 고종이 병사하고 중종이 즉위하지만 두 달도 못돼 어머니 측천무후에게 폐위되었고 장안에서 쫓겨난다. 시간이 흘러 699년, 측천무후가 중종을 다시 불러들여 황태자로 세운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황태손 이종윤과 이선혜가 할머니 측천무후의 남성편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화근이 되었다.

불행히도 이 소식은 측천무후에게 알려졌고, “이것들이 감히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분개한 측천무후는 의덕태자 이중윤을 장으로 쳐서 죽인다. 당시 임신 중이던 영태공주는 충격에 휩싸여 다음날 조산으로 죽는다. 이때 이들의 나이가 각각 열아홉, 열일곱 꽃다운 청춘이었다.

배장묘 가운데는 중종의 아들 딸 뿐 아니라 형 장희태자의 묘도 있다. 어머니 측천무후가 장희태자를 모반죄로 몰아 폐서인시키고 유배 보낸 것도 모자라 자진할 것을 명한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705년, 재상 장간지가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들어가 측천무후의 연인 장역지 형제를 죽였다. 측천무후는 황위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중종이 복위한 이 해 겨울 측천무후는 여든두 살로 세상을 떠났다.

장의태자, 의덕태자, 영태공주 등 이들에게 측천무후란 인물은 할머니, 어머니가 아니라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을 것이다. 건릉에 우뚝 세워진 6미터 높이의 묘비명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측천무후의 유언에 따라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명이 ‘무자비’다. 자신이 저지른 잔혹한 일들을 떠올려서 아무것도 적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일까. 아니면 비문에 다 적기에는 너무 많은 공적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당,송,원,명,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남은 것은 역사적 평가다.

무자비에 어떤 내용을 새겨 넣을 것인가.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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