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너마이트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 이동고 기자
  • 승인 2018.12.06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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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고병권 초청 강연회

11월 28일 울산 중구 약사고등학교 강당에서 사회적기업 <나비문고>가 기획한 철학자 고병권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니체 연구자로 니체 철학을 쉽게 풀어내는 작가는 과거 <언더그라운드 니체>와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냈다.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니체가 지은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을 풀어 쓴 책이다. 책 제목은 니체가 지금도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을 응축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의미다. 강연의 일부를 소개한다.

약사고등학교 학생과 교사,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고병권 박사가 니체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동고 기자
약사고등학교 학생과 교사,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고병권 박사가 니체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동고 기자

나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나이기에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나에 대해서 가장 멀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이야기도 일부 통한다. 너야말로 너 자신을 가장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나를 기다린다’에서 과연 ‘기다린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래 기다린 사람만이 드디어 때가 온 것을 안다. 기다리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오는 것이 있다. 기차 같은 것.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은 ‘미래’가 아니고 ‘과거의 관성’이다. 아프리카 부족은 아직도 ‘해를 기다리는 춤’을 춘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본 사람에게 해가 뜬다는 것은 다르게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100년 전 1917년 4월, 러시아 핀란드역에는 특별한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바로 레닌이 타고 올 기차였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 임시정부는 계속 전쟁을 외치고 있었고 병사들과 소작농들은 지쳐 있었다. 전쟁을 그만 두고 평화를 외치는 소리가 높아지고 토지개혁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임시정부의 권력을 나누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권력을 나누지 말고, 레닌은 ‘소비에트(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로 넘기자고 했다. 간절한 조건이 모이면서 기다렸기 때문에 큰 사건이 되었다.

이는 ‘광야’ 시를 쓴 이육사도 마찬가지였다. ‘백마를 탄 귀인’에 대한 기다림이 나오는데 ‘간절한 기다림’이 있다. 니체는 ‘기다림은 상점 주인이 손님을 기다리듯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다. 다양한 시도와 물음 속에서 기다렸다. 감을 구하려면 감나무 밑에서 감을 기다리거나, 가지를 흔들거나 감나무가 없으면 나무를 심는다. 우리는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다리는 것은 뭔가 하는 것, 뭔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광야에 나오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야 한다. ‘청포도’에도 지친 손님이 청포를 입고 온다. 모시수건에 은쟁반을 준비한다. ‘다가오면 다가서는 것’이 기다리는 것이다.

‘법의 문’을 닫아 버려야 메시아(자유정신)가 온다

15세기 유대교 경전의 어느 필사본에는 이런 그림이 있다고 한다. 도시의 성문이 보이고 그 위에 문지기가 있다. 저편에는 말을 탄 메시아가 오고 있고 그 앞에 선지가(예언자)로 보이는 청년이 성문을 향해 다가선다. 그림에서 문은 이미 열려 있다. 메시아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문에 다가서는가. 조르조 아감벤은 이런 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문을 닫아버리기 위해서’라고.
아감벤은 선지자가 말을 타고 오는 메시아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해설을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를 통해 소개했다. 소설 내용은 자신에게 열려진 문을 들어가려고 했으나 평생 들어갈 수 없었던 어느 시골사람의 이야기다. 여기서 문은 ‘법의 문’이다. 문지기는 시골사람에게 나중에 들어갈 수 있지만 지금은 허락할 수 없으며, 설령 자신이 뚫고 들어간다 해도 더 강한 문지기가 버티고 있다고 했다. 시골사람은 말도 건네 보고 뭔가를 주며 매수하려고 했지만 문지기는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시골사람은 그렇게 평생을 보냈고 그곳에서 눈을 감는다. 시골사람이 죽자 문지기는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제 닫겠다고. ‘당신만을 위한 문’과 ‘당신을 들여보낼 수 없다’ 사이에 모순이 없다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 것인가. 해결책은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법의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바보와 죽어있는 현자

이는 나사렛 예수의 상과도 연결된다. 그는 로마가 아닌 나사렛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니체가 주목한 것은 구세주가 가진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이다. 예수는 천재나 영웅 같은 비범한 인간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순진한 바보가 “모든 종교, 모든 제의, 모든 역사, 모든 자연과학, 모든 세계 경험, 모든 지식, 모든 심리학, 모든 서적, 모든 예술을 넘어서” 버리는 것이다.
니체는 당시 출간된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를 겨냥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예수에게서 신성을 제거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천재이자 영웅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진정한 철학자의 형상을 이런 ‘바보’에게서 찾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철학자는 영리하고 박식한 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모험과 시도를 감행하는 ‘달갑지 않은 바보’다.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죽어지내는 현자’가 아니라 별 가망 없는 일에 뛰어드는 ‘살아있는 바보’ 말이다.
메시아를 도래하게 하는 것은 말도 교리도 의식도 율법도 심지어 기도도 아니다. 예수는 ‘복음적 실천’만이 신에 이르는 것을 알았다. 예수는 일종의 ‘자유정신’이었다.
그는 ‘법의 문’을 닫아 버렸다. 당대 원칙과 통념과 상식의 효력을 멈추게 했다. 그 때만이 메시아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주체와 도래하는 주체는 서로 수렴한다

나(기다리는 주체)는 나(도래하는 주체)와 동일한 주체다.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은 바로 ‘자기 자신’을 말한다. 니체는 ‘네 자신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자, ‘네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는 자로 소개했다. ‘나’는 ‘나’를 찾아가며,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기다림’은 바로 ‘되어감(생성)’이다.
우리는 좀처럼 우리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자신을 만나기 위한 치열한 물음과 시도를 포기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늙었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었을 존재를 만나지 못한 채 죽는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기다려보았는가. 나는 나를 어디까지 시도해 보았는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철학자 고병권의 <다이너마이트 니체>-천년의 상상-을 통해 물음을 던져보자. 니체를 통해 ‘우리 자신을 제대로 기다리고자’하는 사람은 이 책을 통해 ‘나를 한 번 시도’해보자.

정리=이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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