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태의 만행과 무장포고
이용태의 만행과 무장포고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2.0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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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전봉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백산에 주둔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 1월 10일 고부관아를 점령했다. 이들은 감옥을 부수어 죄인을 풀어주는 한편 창곡을 풀어 빈민을 구휼했다. 그리고 군기창과 화약고를 격파하고 무기를 확보한 후 1월 17일경에 말목장터로 이동했다. 말목장터에 김문현이 보낸 암살대가 나타나자 이들을 제거한 후 2월 25일 본진을 백산으로 옮겼다. 전봉준이 말목장터로 오자마자 태인접주 최경선을 백산으로 보내 성을 쌓게 해 본진의 주둔에 대비했다. 이로써 약 40일 동안 말목장터에 있던 동학농민군의 지휘소는 백산성으로 이동했다.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백산으로 이동한 목적은 우선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생기는 민폐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말목장터에 40일 가까이 머물자 말목장터 주변의 농민들은 동학농민군의 숙박과 식사 등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다음으로는 관군의 내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말목장터는 사방이 탁 터진 곳으로 사방으로 길이나 있어 관군이 출동하면 동학농민군들이 이들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는 사람과 집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말목장터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이 지역의 사람과 집들이 피해를 많이 입을 것은 자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전봉준이 백산으로의 이주를 주장하자 모든 장령들이 동의했다.

백산은 해발 47미터에 불과했지만 동진강이 백산을 3면으로 두르고 있는 배들평야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따라서 백산은 관군의 내습과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곳이기도 했다. 백산으로 진주한 동학농민군은 장막을 설치하고 진지를 축조해 관군의 공격을 대비했다. 전봉준 등 동학지도부가 백산에 주둔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다.

 

백산 전경,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은 두 차례에 걸쳐 백산성에 진을 쳤다. 첫 번째는 고부기포 시기의 2월 25일부터 3월 13일, 두 번째는 혁명이 본격화된 3월 26일부터 3월 말까지 3~4일간 머물렀다.
백산 전경,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은 두 차례에 걸쳐 백산성에 진을 쳤다. 첫 번째는 고부기포 시기의 2월 25일부터 3월 13일, 두 번째는 혁명이 본격화된 3월 26일부터 3월 말까지 3~4일간 머물렀다.

 

고부백산(古阜白山)은 가활만민(可活萬民)

예부터 이 지역에 ‘고부 백산은 가히 많은 사람을 살릴만한 곳이다’라는 뜻을 지닌 ‘고부백산(古阜白山)은 가활만민(可活萬民)’이라는 비결이 전해져왔다. 고부 백산은 백성들의 새 시대의 염원을 담은 곳이었다. 따라서 백산 주둔은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했다는 현실적인 측면과 비결의 현장인 백산에서 혁명의 성공을 다짐하는 정신적 측면도 있었다. 즉, 동학농민군의 백산 주둔은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는 민중의 희망을 담았다.

백산에 주둔한 동학농민군은 조병갑과 더불어 고부기포의 동기를 제공한 탐관인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 조필영(趙弼永)을 처단하려고 했다. 전운사 조필영은 함열(현 전북 익산시 함열읍)의 전운영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전라도 각 군의 세미(稅米)를 거두어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실어 보내는 일을 담당했다. 그런데 그는 세미 유실에 대비해 부가세를 거두었음에도 서울로 올려보낸 세미가 부족하면 이를 백성들에게 다시 거두는 등의 학정을 일삼았다. 전봉준은 함열 조창까지 진출해 전운영을 격파하고 전운사 조필영을 징치하고자 했으나 일부 지도자들이 반대해 성사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고부를 벗어나 월경하면 반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부에서 함열까지는 50km가 넘는 거리였고 중간에 김제와 익산을 거쳐 가야 했기 때문에 당시의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백산성의 동학혁명백산창의비. 1989년 11월에 동학농민군의 백산대회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자 건립했다. 전봉준은 고부기포 이후 말목장터에서 백산성으로 옮겨 약 20일간 주둔했고, 일시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기포 후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3월 26일 백산성으로 진주했다. 이곳에서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4대 강령과 12조의 군율을 정하고 격문을 반포해 동학혁명이 본격화했다.
백산성의 동학혁명백산창의비. 1989년 11월에 동학농민군의 백산대회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자 건립했다. 전봉준은 고부기포 이후 말목장터에서 백산성으로 옮겨 약 20일간 주둔했고, 일시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기포 후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3월 26일 백산성으로 진주했다. 이곳에서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4대 강령과 12조의 군율을 정하고 격문을 반포해 동학혁명이 본격화했다.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

고부기포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용현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해 고부를 안정시키게 했고,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새로 부임한 박원명은 동학농민군이 해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유화책을 썼는 데 반해 안핵사 이용태는 사건 조사를 빌미로 800명의 병졸을 동원해 고부군민과 동학도들을 위협하고 재물을 빼앗는 등의 학정을 자행했다. <동학사>에는 이용태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전라각군(全羅各郡)의 민란소문(民亂所聞)이 훤자(喧藉, 소문이 퍼짐)함을 따라 정부(政府)에서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명(命)하여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의 직(職)을 맡겨 관폐(官弊)를 잘 살피고 민막(民瘼, 백성의 고충)을 구(救)하라 하였다. 그러나 소위(所謂) 안렴(按廉)은 안렴(按廉)의 직(職)을 불고(不顧)하고 도로혀 민재박탈(民財剝奪)하기를 무렴(無廉)히도 한 일이 있었다. 속담(俗談)에 이르기를 가재는 게 편이라 함과 같이 관리(官吏)는 관리(官吏)의 편이라 백성의 편을 돌아다볼 마음이 없었다. 도로혀 전운사(轉運使)나, 균전사(均田使)나, 고부군수(古阜郡守)나, 익산군수(益山郡守)나, 전라감사(全羅監司)나, 금구현령(金溝縣令)의 편이 되어 백성의 편을 지우려 하였다. 이용태는 고부(古阜) 부안(扶安) 무장(茂長) 고창(高敞) 등지(等地)로 돌아다니며 백성의 재물을 노략한 일이 많었었다.

이용태의 만행은 고부기포에 담긴 백성들의 마음과는 상반됐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속담처럼 이용태는 관리들의 편을 들었고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재산을 빼앗은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이용태는 특히 동학도에 대한 탄압에 열을 올렸는데 “동학군(東學軍)들의 눈에는 왕사(王使)도 없다는 등, 고부(古阜) 전주(全州) 익산(益山) 등(等) 군(郡)의 민란군(民亂軍)도 모두가 동학군(東學軍)들이라고 하며, 전라도(全羅道) 놈들은 모두 동학군(東學軍)이며 전라도(全羅道) 놈들은 얼는 하면 민란(民亂)을 잘 일으킨다고 하며, 옳은 일이고 그른 일이고를 막론(莫論)하고 동학당(東學黨) 놈들은 모조리 때려잡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동학도들을 극심하게 탄압했다.

이용태는 전라도 사람들이 모두 동학군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의 민란이 모두 동학도들이 일으켰다고 보았고 이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동학도를 탄압해 없애버려야 한다는 편벽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용태는 기포 주동자와 동학교도의 집을 불태우고 부녀자를 능욕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동학농민군의 해산과 무장포고군 반포

고부군수 박명원의 유화책에 동조했던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에 긴장했다. 고부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동학농민군은 3월 1일에는 부안 줄포로 진출해 세곡창고를 습격하기도 했다. 백산에서 20여 일 주둔했던 동학농민군은 3월 13일에 이르러 일단 해산했다. 고부군민과 동학도들에 대한 이용태의 탄압이 극에 달하자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동학지도부는 본진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동학지도부는 해산하지 않고 무장으로 피신했다. 이들 지도부들이 해산하지 않고 무장으로 잠입한 이유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무장은 대접주 손화중(孫華仲)이 관할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무장으로 잠입한 이유는 우선 고부접주 전봉준은 무장대접주 손화중의 관내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무장대접주로 있는 손화중의 동학 세력이 호남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무장이 지리적으로 고부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전봉준과 손화중은 단순한 연비(聯臂)의 관계뿐만 아니라 동지적 결합관계였다. 즉, 전봉준은 손화중의 도움을 받고자 무장으로 달려갔다.

무장에서 전봉준은 손화중과 고부기포의 상황과 관의 동향, 그리고 사후 대책 등을 논의했다. 이를 위해 우선 손화중의 집에 도소를 설치했다. 당시 동학교단은 해월 최시형이 머물고 있던 충청도 보은에 대도소를 두었는데, 전봉준과 손화중이 도소를 설치한 것은 대도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사시 호남지역의 동학 조직을 통괄하기 위함이었다. 전봉준이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을 기회로 본격적인 기포를 주장했지만 손화중은 아직 시기상조라 하여 전봉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손화중은 호남 최대의 접주로 동학교단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전봉준이 3월 13일 해산한 이후 무장기포가 일어나는 3월 20일까지의 기간에 손화중은 동학교단과 기포에 관한 긴밀한 논의를 진행했을 거라고 추정된다. 또한 호남지역의 대접주인 김개남, 김덕명 등과 기포에 대해 협의했다. 결국 3월 20일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등 호남의 대접주들과 함께 “동학(東學)이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려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우리는 살상과 약탈을 하지 않을 것이나 오직 탐관오리만은 처벌할 것”을 기치로 한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본격적인 혁명 장도에 나섰다.

무장포고문이 발표된 이후 전라도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이 기포하기 시작했다. 3월 21일 고창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23일 12시경에 줄포에 도착했고 고부에 이른 것은 오후 8시경이었다. 23일 늦은 저녁에 고부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은 우선 향교와 관아를 차지하고 읍내의 서리와 민가에서 저녁을 조달했다. 24일의 동향에 대해서는 보고가 없어 자세한 활동은 알 수 없지만, 억울하게 투옥됐던 원민과 동학교인 등을 석방하는 한편 군량미를 비축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안핵사 이용태에게 부화뇌동한 관리들을 색출 처리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했다. 동학농민군은 이러한 일을 하면서 25일까지 3일간 고부에 머물렀다.

 

전봉준의 단묘. 참형돼 시신을 찾지 못한 동도대장(東徒大將) 전봉준을 위해 해방 이후 1954년 11월 15일에 전씨 문중에서 전봉준의 생가가 있던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 입구의 언덕에 단묘를 마련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보강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갑오민주창의통수 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는 단비의 이름은 "동학과 동학란"의 저자 김상기가 지었다.
전봉준의 단묘. 참형돼 시신을 찾지 못한 동도대장(東徒大將) 전봉준을 위해 해방 이후 1954년 11월 15일에 전씨 문중에서 전봉준의 생가가 있던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 입구의 언덕에 단묘를 마련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보강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갑오민주창의통수 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는 단비의 이름은 "동학과 동학란"의 저자 김상기가 지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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