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과 양귀비의 못다한 사랑 ‘흥경궁’
현종과 양귀비의 못다한 사랑 ‘흥경궁’
  • 박종범 자유여행가
  • 승인 2018.12.0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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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정치인들은 사랑을 최우선 순위에 놓지 않는다. 사랑은 인생의 짧은 순간, 잠시 스쳐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중국 역사에 단 하나 예외적인 황제가 있었다. ‘개원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끈 당나라 제6대 황제 ‘현종’은 그의 치세 말기에 찾아온 로맨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끝내는 당나라를 내리막길로 내몬 장본인이 되었다.

확실히 당 황실은 ‘개 족보’다. 현종의 할머니 측천무후는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었다가 아들 고종의 여인이 되었다. 현종은 그 반대로 며느리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남편과 아내로 맞아들이는 과정도 똑 같았다. 측천무후는 승려로, ‘양귀비’는 도사로 도교사원에 잠시 머물렀다가 황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현종의 나이 60세, 양귀비는 25살이었다. 양귀비는 현종의 열여덟째 아들 이모의 아내였었다.

 

 

손녀뻘 밖에 안 되는 양귀비를 맞아들인 현종은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깊숙이 빠져든다. 황궁에는 미모의 후궁이 3천 명에 달했지만, 모든 총애는 오직 양귀비 한 몸에 쏠리게 된다. 총기를 잃어버린 현종은 정치를 등한시하기 시작했고 양귀비는 정치에 적극 개입한다. 결국 황제의 인사권조차 양귀비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 되었다.

고종 이후의 황제 가운데 단 한 명, 대명궁이 아닌 ‘흥경궁’에서 지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현종이다. 흥경궁은 726년부터 ‘안록산의 난’으로 현종이 장안을 버리고 도망치기 전(756)까지 양귀비와 사랑을 나눈 밀월의 장소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된 이후 흥경궁은 정치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상실했고 퇴위한 황제가 머무는 곳이 되었다.

‘흥경궁 공원’은 시안 교통대학 바로 맞은편에 있다. 흥경궁 공원을 찾아갔다. 시안의 날씨는 초가을인데도 뙤약볕이 아직 따가웠다. 이곳에서 화려한 봄날을 보내며 정원을 거닐거나 모란꽃을 감상했을 현종과 양귀비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공원을 입장하여 200미터쯤 가다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면 ‘침향정’이 나온다. 침향정은 당 현종 시절에 하루에도 여러 번 빛깔과 향기가 변했다는 목작약이 심어져 있던 장소다. 어느 날 침향정에서 양귀비와 함께 술을 마시며 모란을 감상하던 현종이 갑자기 ‘한림학사 이백’을 불러들인다. 당대의 명창 이귀년은 이백을 찾아 헤매다가 번화가 주점에서 흠뻑 술에 취해있는 이백을 발견한다. 이귀년은 이백을 등에 업고 주점을 나와 침향정으로 돌아왔다.

황제를 알현한 이백은 아직도 술이 깨지 않아 침을 흘린 채 고주망태 상태였다. 현종은 이백을 가까이 곁으로 올라오라 명하고 술에 취한 이백은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환관 고역사에게 신발을 벗기라고 한다. 고역사는 무릎을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줄 수밖에 없었다. 황제 앞에서 술이 깨지 않아 횡설수설하는 이백에게 현종은 “좋은 꽃을 감상하고 어여쁜 왕비가 곁에 있는데, 어이 낡은 풍악을 울리겠는가. 마땅히 새 노래를 지어 부르리라”하며 시를 짓게 했다. 붓을 집어든 이백은 거리낌 없이 일필휘지의 솜씨로 시를 지어 바친다. 이 시가 바로 ‘청평조사’ 3수다.

 

청평조사

 

구름 같은 옷자락 꽃다운 자태로다

봄바람은 난간 스치고 이슬 함초름한데

군옥산 위에서 만날 수 없다면

요대산 아래서나 만날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붉은 꽃이 이슬 맺혀 향기롭다

무산의 선녀 공연히 애끓는다

묻노니 한궁의 누구와 닮았는가

가녀린 비연이가 누구와 닮았는가

이름난 꽃과 미인 모두 다 즐거우니

군왕께선 흐뭇이 웃음 띠고 보시누나

봄바람의 끝없는 한을 풀어버려

침향전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섰어라

 

이백은 양귀비를 선녀에 비유한 뒤, 하고 많은 미인 중에서 성총을 어지럽히고 결국에는 나라를 망친 조비연 왕후에 그 미모를 비교했다. 한나라 성제의 황후였던 조비연은 후궁이 낳은 아이를 모두 죽였고 황실의 후사를 끊어지게 만든 악녀였다. 게다가 ‘경국’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경국이란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를 말하며 양귀비의 사치스럽고 방탕한 행각에 대한 우려를 담아냈던 것이다.

당시에는 현종과 양귀비를 만족시킨 이 시가 결국에는 이백의 정치적 생명을 단축시켰다. 무릎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기는 수모를 격어야 했던 환관 고역사가 이백의 싯구절을 문제 삼아 양귀비에게 참소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현종은 이백을 내치게 된다. 궁을 떠날 것을 하달한다.

755년, 안록산이 거병하여 파죽지세로 낙양을 무너뜨리고 장안 외곽의 동관조차 돌파한다. 장안이 함락되기 직전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허겁지겁 도망을 치는데 호위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병사들은 양귀비의 오라버니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의 처분을 요구했다.

 

 

“깊은 궁궐에 있는 귀비가 어찌 양국충의 모반을 알겠느냐.” 현종이 결사적으로 말렸지만 허사였다. 결국 양귀비는 환관 고역사의 손에 이끌려 어느 불당 앞 배나무에 비단 천을 매달아 목이 졸려 죽게 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분명하다. 그때 그녀의 나이 38살이었다.

훗날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그의 연작시 ‘장한가’에서 현종의 비통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군주는 구하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돌리는 얼굴에 피눈물이 흐르네.”

따지고 보면 양귀비에게는 죄가 없다. 외길 사랑에 눈이 멀어 백성을 돌보지 못하고 국사를 멀리한 현종이 잘못이다. 위징이 태종에게 올린 ‘태종께 열 가지 생각을 간하는 상소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입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서안에 온지 7일이 지났다. 문득 양수경의 노래가 생각난다. “사랑은 창 밖에 흐르는 빗물 같아요.”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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