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대회(白山大會)를 통해 본격적인 동학혁명으로 전환
백산대회(白山大會)를 통해 본격적인 동학혁명으로 전환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12.13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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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

3월 20일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다음날인 21일 고창을 점령했다. 23일 12시경에는 줄포(茁浦)를 경유해 저녁 8시경에 고부군에 당도했다. 고부기포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던 안핵사 이용태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용태는 이미 동학농민군의 기포 소문을 듣고 고부를 떠났다. 23일 늦은 저녁에 고부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은 우선 향교와 관아를 차지하고 읍내의 서리(胥吏)와 민가(民家)에서 저녁을 조달했다. 다음날인 24일에는 억울하게 투옥됐던 동학도인과 백성들을 석방하는 한편 군량미를 비축했다. 또한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을 도왔던 관리들을 색출해 벌을 내렸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25일까지 3일간 고부에 머물면서 고부의 적폐를 청산했다.

당시 고부에 머물렀던 동학농민군은 3000여 명으로 대부분 동학교도들이었다. 3월 25일에는 고부관아의 무기고를 열다가 실수로 화약고에 불이 붙어 수십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있었다.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약을 다룰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해 발생한 사고였다. 사고를 처리한 동학농민군은 오후 2시경에 고부를 빠져나왔다. 동학농민군은 고부의 서북쪽을 나와서 태인에서 점심을 먹고 원평에서 하루를 유숙한 후 3월 26일 백산에 당도했다. 백산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은 화호의 신덕정에서 총을 쏘고 함성을 지르는 등 훈련을 하면서 군세를 보여주었다.

무장포고문이 발표된 이후 전라도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이 기포하기 시작했다. 전봉준은 전라도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무장포고문을 보내 동학혁명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다. 전봉준의 기포에 동의한 자들은 전봉준이 도착한 26일에 대부분 백산으로 집결했다. 당시 백산에 모인 동학의 지도급 인사는 전라도 34개 군현의 약 180명에 달했다. 이는 전라도 군현의 약 63%의 지역이 참여할 정도로 전봉준의 기포를 동학 조직과 농민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부, 무안, 임실, 남원, 금구 등에서는 10여 명 이상의 지도급 인물들이 참여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흰옷과 죽창을 든 동학농민군으로 뒤덮인 백산은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 되었다.

 

무장기포 기념비. 전봉준이 이용태의 만행으로 일시 해산한 후 이곳 무장으로 와서 손화중과 협의해 3월 20일 이곳 무장의 구시내(九水) 혹은 당산에서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기포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이다.(사진: 고창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 기념비. 전봉준이 이용태의 만행으로 일시 해산한 후 이곳 무장으로 와서 손화중과 협의해 3월 20일 이곳 무장의 구시내(九水) 혹은 당산에서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기포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이다.(사진: 고창동학농민혁명)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을 이날 저녁 대회를 열고 동학농민혁명을 이끌 지도부를 구성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서 백산대회에 대해 “중망(衆望)을 모아서”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여망을 모아서 지도부를 결성했다. 이때 결성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는 다음과 같다.

 

대장(大將) 전봉준

총관령(總管領)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總參謀) 김덕명, 오시영

영솔장(領率長) 최경선

비서(祕書) 송희옥, 정백현

 

고부기포 당시 1장두(狀頭)였던 전봉준이 동학농민군의 우두머리인 대장으로 추대됐다. 전봉준은 전체 동학농민군의 대장, 즉 동도대장(東徒大將)이 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 가장 큰 동학 세력을 갖고 있었던 무장대접주 손화중과 가장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던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삼아 동학농민군을 관장하게 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여유가 있었던 금구대접주 김덕명과 고창접주 오시영(吳時泳)을 참모로 두어 동학농민군을 지원했다. 오시영은 <동학사>를 쓴 오지영의 동생이다. 오시영은 ‘선운사 마애불비기 탈취사건(禪雲寺磨崖佛秘記奪取事件)’ 때부터 전봉준(全琫準), 손화중(孫華仲)과 친분을 맺고 있었다. 고부기포 당시 백산성을 축성했던 태인접주 최경선이 영솔장이 돼 동학농민군을 훈련시켰다. 비서였던 송희옥(宋喜玉)은 전주 출신으로 전봉준의 처족이었고, 정백현(鄭伯賢)은 고창 출신으로 사발통문(沙鉢通文)과 창의문(倡義文), 사대명의(四大名義) 등 농민군의 주요 격문을 작성한 인물로 동학혁명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지도자였다. 그리고 대장기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네 글자를 써서 우국(憂國)과 위민(爲民)이라는 동학혁명의 뜻을 담았다.

백산대회에서 비로소 동학농민군들은 중앙의 지휘소가 설치되고 본격적인 군대의 대오를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백산대회를 입증한 기행현(奇行鉉)의 <홍재일기(鴻齋日記)>에도 백산대회 이전은 동학농민군을 동학인(東學人)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백산대회 이후에는 동학군(東學軍)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백산대회를 통해 동학농민군이 편성돼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기행현의 <홍재일기>는 오지영의 <동학사>에만 기술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에 의해 부정되던 백산대회의 실재를 입증한 중요한 사료다.

 

무장대접주 손화중의 도소. 전북 고창군 성송면 괴치2길 15(괴치리 276-1)에 손화중의 도소가 있었다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정동환 등이 증언했다. 손화중은 3월 13일 전봉준이 오자 이곳에 도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혁명을 준비했다.(사진: 고창동학농민혁명)
무장대접주 손화중의 도소. 전북 고창군 성송면 괴치2길 15(괴치리 276-1)에 손화중의 도소가 있었다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정동환 등이 증언했다. 손화중은 3월 13일 전봉준이 오자 이곳에 도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혁명을 준비했다.(사진: 고창동학농민혁명)

 

강령과 군율도 정해

백산대회에서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한 동학농민군은 혁명의 이념을 담은 4대 명의, 즉 강령을 발표하고 군대로서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 군율을 정했다. 먼저 4대 명의는 다음과 같다.

 

1. 不殺人 不殺物(불살인 불살물,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2. 忠孝雙全 濟世安民(충효쌍전 제세안민, 충효를 함께 갖추어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3. 逐滅倭夷 澄淸聖道(축멸왜이 징청성도, 일본 오랑캐를 구축하고 성인의 도리를 맑고 깨끗하게 한다)

4. 驅兵入京 盡滅權貴 大振紀綱 立定名分 以從聖訓(구병입경 진멸권귀 대진기강 입정명분 이종성훈,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가서 권귀를 없애며, 기강을 크게 떨치고 명분을 바로 세워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다)

 

4대 명의는 동학농민군의 강령으로 동학의 생명존중 사상과 인간본연의 윤리, 그리고 반봉건과 반외세의 뜻을 담은 동학혁명의 당위성을 밝힌 것이었다. 이어서 동학농민군은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동학농민군은 12개조의 기율(紀律), 즉 군율(軍律)을 만들었다.

 

1. 항복하는 자는 따뜻하게 대한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4. 순종하는 자에게는 경복한다.

5. 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6. 굶주린 자는 먹인다.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없앤다.

8.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11.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12. 불효자는 형벌한다.

 

이 12개조 기율은 4대 명의를 구체화한 것이다. 즉, 혁명의 과정에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 악행을 일삼는 무리들은 벌해 향촌 사회의 질서를 새로 구축하겠다는 의미도 담았다. 이는 전봉준이 각 부대장에게 당부한 약속에도 잘 드러난다. 전봉준은 “언제나 적을 대할 때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장 큰 공으로 삼겠다. 비록 부득이 싸우더라도 절대 인명을 상하지 않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다. 그러므로 행군할 때는 절대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효제충신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으면 그 주위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처럼 12개조의 기율은 당시 부패한 관군과는 명확하게 차별성을 두고 백성들과 위한 혁명을 지향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고부초등학교의 고부군관아지(古阜郡官衙址) 비. 고부관아는 1765년(영조 14년)부터 1914년 부군제 실시에 따라 정읍군에 병합될 때까지 고부군의 관아가 있었다. 일제는 고부관아를 헐고 학교를 지었다. 2005년 전라북도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고부초등학교의 고부군관아지(古阜郡官衙址) 비. 고부관아는 1765년(영조 14년)부터 1914년 부군제 실시에 따라 정읍군에 병합될 때까지 고부군의 관아가 있었다. 일제는 고부관아를 헐고 학교를 지었다. 2005년 전라북도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격문(檄文)을 돌려 혁명에 동참하길 권고

동학농민군은 백성들이 동학혁명에 참여하기를 권고하는 격문을 돌렸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차(此)에 지(至)함은 그 본의(本意)가 단단타(斷斷他)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蒼生)을 도탄(塗炭)의 중(中)에서 건지고 국가(國家)를 반석(磐石) 위에다 두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貪虐)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橫暴)한 강적(强敵)의 무리들을 구축(驅逐)하자 함이다. 양반(兩班)과 부호(富豪)의 앞에 고통(苦痛)을 받는 민중(民衆)들과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寃恨)이 깊은 자(者)라. 조금도 주저(躊躇)치 말고 이 시각(時刻)으로 일어서라. 만일(萬一) 기회(機會)를 잃으면 후회(後悔)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갑오정월일(甲午正月日)

호남창의대장소재백산(湖南倡儀大將所在白山)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들은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4대명의, 12개조 기율, 격문을 반포해 “보국안민” 즉, 반봉건과 반외세를 기치로 내걸고 동학혁명의 본격화를 선언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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