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헌과 윤치오의 사람들
김교헌과 윤치오의 사람들
  • 이병길 시민기자.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승인 2018.12.1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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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인간의 삶은 늘 변화무쌍하다. 역사적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인간의 삶을 마냥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순간마다 선택을 강요하고 그의 신념을 때론 뿌리째 흔든다. 흔들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세월을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삶은 끊임없는 인간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관계는 때로는 의도적이고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상황과 연결된다. 우연히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한다. 그것이 역사적 인간의 삶의 평가를 좌우한다.

 

통도사 무풍한송길 주변에는 많은 이름 바위들이 있다.
통도사 무풍한송길 주변에는 많은 이름 바위들이 있다.

 

역사는 인간관계의 산물이다

영남알프스 하천에는 이름을 새긴 바위들이 많다. 천전리 각석에는 화랑들이, 통도사 바위에는 전국적 인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 바위는 역사의 방명록이다. 통도사 이름 바위에 ‘김교헌.윤치오 이름 바위’가 있다.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대종교(大倧敎) 2대 교주로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개화파로 활동하다 친일인사가 된 사람이다. 이 둘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삶의 길이 달라졌다. 1906년 김교헌은 동래부사였으며, 1908년 11월 윤치오는 양산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통도사 명신학교 교장이었다. 당시 부교장은 서해담, 학감은 김천보(김구하) 스님이었다. 생도는 103명에 달했다. 그런데 기독교 집안인 윤치오가 어떻게 교장으로 양산 통도사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일과 친일 이전의 순간을 바위에서 만난다. 이름 새긴 날 이후, 그 삶의 길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순간이 지나야 평가가 시작된다. 순간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 순간에 결단적 행동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 결단에는 책임과 평가가 뒤따른다.

 

김교헌 윤치오 이름 바위
김교헌 윤치오 이름 바위

 

민족의 고대사에 관심 깊었던 정통 관료 김교헌

김교헌(1868년~1923년)은 대종교의 제2대 교주이며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무원(茂園)이다. 공조판서의 아들로 그는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1910년까지 한림 옥당, 병조참의, 예조참의,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한 조선 및 대한제국 정통 관료였다. 관료 생활을 통해 외교, 군사, 문학, 사법, 학술 편찬 등 다양한 학문과 경험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관계했다. 1903년 <문헌비고> 편집(찬집) 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사상과 제도 변천, 외교관계, 역사에 대한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지식을 넓힐 기회를 가졌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그의 저술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6년 동래 감리 겸 부산항 재판소 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와 동래부사로 재직했다. 부산지역의 통상 행정 사법 업무를 통괄했던 시절이다, 그는 통감부 비호 아래 자행된 일본인들의 경제침략에 맞섰다. 이 일로 1907년 송병준의 모함으로 파면되었다가 복권됐다. 동래부사 시절 그가 통도사를 방문한 듯하다.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

 

김교헌과 동행한 사람들

통도사에 그와 같이 왔지만 김교헌보다 좀 작게 이름을 새긴 서상하, 정철영, 김기환이 있다. 경재(敬齋) 서상하(徐相夏, 1864~1949)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군자금 746원50전을 지원하였고, 1906년에는 대구광문회를 조직 신교육운동을 하였으며, 1907년 서상돈과 함께 대구에서 일본의 경제침략에서 벗어나려는 항일 애국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김기환(金基煥, 1879~?)은 일제강점기의 관료로 1908년 한성 재판소에서 주사와 서기로 근무한 기록이 있다. 경기도 적성 군수, 가평군수, 파주 군수 등을 지냈다. 정철영(鄭喆永, 1881~? )은 1905년 동래감리서 주사로 근무했으며, 국권침탈 후 1911년 9월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의 직원으로 임명돼 1939년 3월까지 재직하면서 식민지 지배정책과 이념을 홍보하는 역할을 했다. 1906년 당시 부산 동래에서 같이 근무했던 인연으로 통도사를 방문한 후 방명록 새기듯 한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각기 역사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독립운동가와 친일 협력자가 그것이다.

그 뒤 김교헌은 1910년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입회하여 현채(玄采),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 간행 사업에 참가했다. 1909년에는 규장각 부제학으로 <국조보감> 감인 위원(監印委員)을 겸직했고, 1910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항일, 반일운동의 대종교인 된 김교헌

나철(羅喆, 1863~1916)에 의해 단군교가 대종교(大倧敎)로 1909년 중광(重光, 부활)됐다. 대종교는 ‘한얼교’로 한얼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단군 한배검을 교조로 받드는 우리 고유의 민족 신앙이다. 옛(古) 조선에서 시작하니 그 뿌리가 깊다. 대종교는 단군정신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의 단결과 부흥 및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0년 대종교인이 된 김교헌은 만주에 있는 나철을 대신하여 국내 대종교 활동을 총괄하고 포교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그는 민족의식 고양이 조선 민족의 살 길임을 자각하고 민족교육을 위한 역사저술 작업을 했다. 1914년 <신단실기(神檀實記)>를 통해 대종교의 역사적 연원을 밝혔다.

1920년 사회주의가 들어오기 전에 대종교는 종교를 넘어서 학술 계몽 활동뿐만 아니라 반일, 항일 민족운동의 구심적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는 대부분 대종 교인이었다. 대종교의 항일운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일제에 대한 총체적 저항이었다. 그 중심에 나철과 김교헌이 있었다.

대종교가 교세를 확장해 가자, 일제는 ‘종교 통제안’을 통해 대종교를 ‘종교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해 탄압을 했다. 1916년 8월 15일 나철은 단식 수도 끝에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목숨을 끊었다. 김교헌은 1916년 9월 나철의 뒤를 이어서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 敎主)에 취임했다.

 

만주에 있는 서일, 나철, 김교헌의 묘역
만주에 있는 서일, 나철, 김교헌의 묘역

 

무장독립투쟁의 구심점이 된 만주로 간 대종교

김교헌은 1917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東滿洲和龍縣)으로 옮겼다. 숙종의 계비였던 인원왕후의 아버지인 경성 부원군 김주신(1661~1722)의 후손이었던 김교헌은 김주신이 숙종에게 받았던 말죽거리의 50여만 평과 박동의 340칸에 이르는 저택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갔다. 1918년 11월 무장독립전쟁과 민주 공화제 수립을 강조하는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 발의하고 김규식, 박은식, 김동삼, 이승만, 이시영, 김좌진, 이동녕, 이동휘, 신채호, 조소앙, 안창호 등 독립운동 대표 39명의 동의를 얻어, 대종교 총본사에서 11월에 선언식을 거행했다. 이 선언서는 중국, 노령, 미국, 일본 그리고 국내로 발송되었고,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1919년 12월 김교헌은 대종교 교인만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총재에 교단(敎團)의 지도자인 서일(徐一)을 담당하게 했다. 1920년 9월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金佐鎭)은 대승리를 하게 된다. 그 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여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겨 선도 포교 사업(宣道布敎事業)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했다.

만주에서 김교헌은 1922~23년까지 총 46개의 시교당을 설치해 신앙공동체, 생활공동체, 경제공동체를 통해 생활 안정과 민족의식 성장을 도모했다. 그는 시교당(종교)과 학교(교육) 그리고 독립군 기지(항일투쟁)가 삼위일체 된 대종교의 특성을 확립했다. 당시 일요일마다 애국지사들이 대종교당에 모여 ‘한얼노래’를 드높이 노래하면서 단군 영정 앞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배달민족의 역사와 대종교 교리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민족 독립과 조국 광복을 맹세했다고 한다. 당시 신도가 30~40만 명이 되었다. 교세 확장을 통한 독립운동의 강화를 꾀하는 한편, 동포들에 대한 독립정신교육에 전념했다. 대종교인들의 활동은 종교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말과 역사 등 문화부터 정치까지 폭이 넓었다. 우리 역사와 우리말 교육은 대종교의 중심축이었다. ‘주체의 자각’을 강조한 것이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서 <신단민사(神檀民史)> 저술

김교헌은 만주지역의 무장 항일운동, 한글 상용화를 통한 국어 중흥 운동, 일제 식민지 사관에 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 역사관 수립 등을 실천했다. 대종교의 지도자로서 김교헌은 교세 확장뿐만이 아니라 민족의식과 국가 의식 앙양과 더불어 유구한 우리 역사를 통하여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923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했다.

김교헌은 최남선과 박은식, 신채호 등의 스승으로 민족사관 확립에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 한국사를 체계화하여, 단군과 동아시아 우리 민족사를 저술한 <신단민사>는 교과서 형식으로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사 교과서다. 이 책은 만주의 민족학교와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활용되었다. 배달민족의 역사 무대를 한반도에서 만주로 확장시켜 국가사가 아닌 민족사 중심으로 편찬하고, 사화와 전설을 수용하고, 문화사를 통한 민족 고유성 발견에 주력하고, 국난 극복사를 강조하고, 근대적 역사용어 등을 사용한 저작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사를 말살하려 한 일제의 문화 침략에 맞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함으로써,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는 의미를 지닌,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의미를 가졌던 책이다. 하지만 김교헌의 목표는 민족적 에너지를 총동원한 조국 광복 구현이라는 소아(小我)적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배달국의 건설이 궁극 목표였다.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대종교 신자로는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박은식, 최현배, 정인보, 지석영, 안희제, 안호상 등이 있다.

1920년대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붕괴하자, 김교헌은 병을 얻어 1923년 영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병사한 후 이듬해 1월 안장됐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지식, 능력 모두를 항일운동에 헌신한 사람이었다.

 

민족주체성을 강조한 대종교인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힌샘 주시경, 백연 김두봉, 고루 이극로, 외솔 최현배,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무원 김교헌의 모습이다. 이들은 대종교의 단군정신을 토대로 언어민족주의와 역사민족주의를 개척하며, 일제강점기 문화투쟁의 선봉에 섰다.
민족주체성을 강조한 대종교인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힌샘 주시경, 백연 김두봉, 고루 이극로, 외솔 최현배,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무원 김교헌의 모습이다. 이들은 대종교의 단군정신을 토대로 언어민족주의와 역사민족주의를 개척하며, 일제강점기 문화투쟁의 선봉에 섰다.

 

윤치오, 빛나는 영욕의 가문

김교헌 이름 아래 끝자락에 작은 글씨로 동암(東菴) 윤치오(尹致旿, 1869~1950) 가족 이름이 일렬로 적혀있다. 윤치오의 가문에는 역사적 인물이 많다. 조선총독부 참의를 지냈고 일제에 항공기를 바친 윤치소(尹致昭, 1871~1944)와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냈고 한국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동산 윤치영(東山 尹致暎, 1898~1996)이 그의 동생들이다. 윤치소는 1960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 1897~ 1990)의 아버지다. 개화파 정치인으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과 중추원 고문을 지낸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845)는 백부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윤영렬(尹英烈, 1854~1939)은 충남의 동학 농민군을 토벌한 대한제국 시절 육군 참장과 자헌대부를 지냈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았다. 윤치오 집안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가장 명망 있는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여러 평가가 엇갈린 사람들의 집안이다.

 

해평 윤씨의 사람들
해평 윤씨의 사람들

 

통도사 명신학교 교장을 지낸 윤치오

윤치오는 갑신정변 당시 백부 윤웅렬과 사촌 형 윤치호가 개화파로 지목되자, 1894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동경의 후쿠자와 유키치 문하생으로 있다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孰, 1895~1896)에 다녔다. 그때 일본 특파대사로 임명됐다. 동경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머물다가 1897년 귀국했다. 그 후 일본 유학생 감독을 지냈고 1907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과 학부 학무국장을 지냈다.

윤치오 바위에는 부인 이숙경(李淑卿), 자(子) 일선(日善), 시선(時善), 명선(明善), 왕선(旺善), 승선(勝善)이 출생 순으로 새겨져 있다. 이숙경은 그의 첫째 부인으로 넷째 아들 승선은 1904년생이고 둘째 딸 정선(晶善)은 1908년 7월 8일생이다. 무풍한송길 솔숲에 서있기조차 위태로운 지점에 윤치오 이름 바위가 또 있다. 순종 3년(1909) 일본 관광단원의 일원으로 도쿄와 나가사키를 갔다가 통도사를 방문한 백부 윤웅렬(尹雄烈)을 배웅한 사실이 적혀있다. 통도사 명신학교는 1906년 4월 성해스님이 화엄전에 개설했고, 1908년 11월 윤치오는 교장으로 있었다. 그의 연보에는 이 사실이 없다.

그는 1910년 이후부터 1915년 3월까지 4년 6개월간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1915년 빚으로 피소되면서 서예와 고미술품, 골동품 수집에 전념했다. 1937년 8월 조선 총독이 주최하는 시국 간담회에 출석했으며, 1939년 11월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 유도 연합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 총독 미나미, 사이토 마코토, 정무총감 오노 등을 찬양하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윤치오의 사촌 형, 좌옹 윤치호

1898년 윤치호가 하와이에서 가져온 자전거를 윤치오가 타다가 도난 맞은 사건이 당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근대 한국 인물 중에서 좌옹 윤치호만큼 화려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자 세계인이었고,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 회장을 지낸 개화.자강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105인 사건에 연루돼 감옥살이를 하였고, 한일합방 후 남작 작위를 받은 아버지 윤웅렬 사후에 그가 작위를 물려받았다. 한국 최초의 미국 남감리회 신자이자 YMCA 운동의 지도자로서 일제시기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였다. 애국가를 작사한 사람, 자전거를 처음 가져온 사람, 최초로 영어를 배웠던 사람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간 일기를 썼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비밀스럽게 영문으로 당시의 인물, 사회, 그리고 개인 생각 등 생생하게 기록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며 삼일독립만세운동도 비난했던 그는 총독부에는 반대했지만, 독립보다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는 약육강식론의 입장에 있었다. “인종 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라고 한 그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일제강점기를 보냈다. 1890년 5월 18일 일기에 쓴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을 그는 죽을 때까지 가졌다. 그는 우매한 민중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일본 지배 아래에서의 실력 양성, 민족성 개조를 중시했다. 그는 국가보다 민족을 더 중시했다. 일본에 협력한 그의 삶에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친일 매국노를 긍정하는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친일적 행각과 달리 참 냉철한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는 복잡한 평가를 받을 만큼의 인생 역정을 살았다.

 

공개구혼으로 최초의 양장을 입은 윤고려와 재혼한 윤치오

윤치오는 바위에 부인 이숙경의 이름을 새겼다. 이를 통해 그의 여성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개화기 정부에서 처음 설치했던 한글 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의 위원장이었다. 학무국장이었던 그는 한국 최초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해 여성지 <여자지남(女子指南)>에도 관여했다. 1908년 4월 여자에게도 남자와 같은 중등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고등여학교령을 진언, 제정하여 이를 공포하게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여성에게는 학문이 필요 없다고 인식되던 시기였다.

1907년 첫 부인이 죽은 지 3년 후 신문에 윤치오는 구혼 광고를 냈다. 그는 광고를 본 신여성들 중에 김윤정의 딸 김고려(김고리아 Kim korea 고라高羅 고려高麗, 1891~1913)를 선택했다. 그녀는 외교관인 아버지 덕에 일본과 미국에서 여학교를 마친 신여성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0살이 넘었다. 아펜셀러 목사의 주례로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1899년 우리나라 최초로 양장을 한 신여성답게 결혼 후 서양식으로 성을 김(金)씨에서 남편 성인 윤(尹)씨로 바꿨다. 우리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며, 신여성들은 예속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자기의 성씨 대신 남편의 성씨를 따랐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을 찾아오는 외국인이 있으면 꼭 자기 이름을 윤코리아라고 소개했다.

윤고려는 결혼 후 여성교육 운동에 적극적으로 양원 여학교 영어교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녀는 경성에 있는 양심, 양원 두 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불행히 22살로 요절했다. 그녀가 입은 최초의 양장은 S자 형으로 굴곡을 이룬 롱 드레스에 가슴엔 레이스가 다양하게 꾸며져 있으며 새의 깃털과 리본으로 장식된 차양 넓은 모자를 쓴 차림이었고, 거기에 굽 낮은 구두와 비단 양말, 양산을 들고 있는 당시 유럽의 최신 패션이었다. 성까지 바꾸고 서양 옷으로 갈아입은 윤고려의 대담한 행동은 분명 시대에 대한 반동이자 거역이었다. 많은 반발의 소리가 있었지만 점차 여성 의복은 서양식, 일본 의복이 유행화 되었다. 드라마 <미스터션사인>의 옷이 결코 과장은 아닌 셈이다.

 

윤치오와 그의 부인들. 윤치오, 이숙경, 윤고려, 현송자
윤치오와 그의 부인들. 윤치오, 이숙경, 윤고려, 현송자

 

윤치오의 장모, 배정자와 그 일족

서양 양장을 입고 경성 거리를 활보한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 한때 통도사 여승으로 있다가 일본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 된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 배정자(裵貞子, 1870~1952)다. 그녀는 이토의 밀정으로, 일제의 첩자로, 철저한 일제의 충견으로 활동한 최고 악질 반민족 친일녀다.

배정자의 딸 현송자(玄松子, 1899~1978)가 바로 윤치오의 두 번째 부인이다. 배정자는 윤치오의 장모인 셈이다. 1919년 5월, 50살과 20살의 남녀가 재혼을 했다. 그녀의 이버지 현영운보다 윤치오는 한 살 적으며, 게이오의숙 후배다. 30살 나이 차이로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현송자는 같은 교회에 다니던 연하의 연희전문대 학생 이철(李哲, 1903~1944)과 사랑에 빠진다. 결국 윤치오와는 이혼하고 술집 ‘트로이카’를 운영하다가 1934년 이철과 혼인신고를 한다. 이철은 현송자의 인맥으로 한국 최초의 음반회사인 오케(OK)레코드사를 만들고, 1935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그룹 ‘저고리 시스터즈’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쇼 흥행사였던 ‘조선악극단’을 만든다. 조선악극단은 무대공연을 위한 오케스윙악단과 노래, 춤에 능한 60여 명의 단원으로 구성됐는데, 일본과 북경, 상해 등 해외 공연을 했다. 일제강점기 유명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는 이철이 발굴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조선 가요계를 풍미한 미다스의 손이었다. 한국의 대중문화를 세계에 알린 한류의 원류였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말기 친일의 길로 들어서고, 이때 언양의 극작가 신고송도 같이 활동했다.

한편 배정자의 조카 배구자(裵龜子, 1905~2003)는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 무용을 배워 한국에서 공연한 무용가이자 한국 최초의 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또 최초의 연극 전문 극장인 ‘동양극장’을 남편 홍순언과 함께 만들어 조선 춤을 무대화하여 공연했다. 배정자는 친일의 충견이었지만, 그의 일족은 일제강점 시절 한국 대중문화의 기틀을 세운 사람들이다. 물론 친일의 꼬리가 붙은 경우도 있지만, 역사는 늘 한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는다.(이하 ‘배정자와 그 일족’의 자세한 이야기는 <울산저널> “망각의 역사를 깨우는 것은 산 사람의 몫이다.”(2015년 8월 21일)를 보시라. https://hoy.kr/uKqW)

 

조선악극단의 마스코트 "저고리시스터즈". 왼쪽부터 이준희, 김능자, 이난영, 장세정, 서봉희.
조선악극단의 마스코트 "저고리시스터즈". 왼쪽부터 이준희, 김능자, 이난영, 장세정, 서봉희.

 

윤치오의 사돈 공주 갑부 김갑순

윤치오는 이숙경과 4남 2녀, 윤고려와 2남 1녀, 현송자와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윤일선(尹日善, 1896~1987)은 의사로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 해부학 교수다. 1956년 교수 직선제로 선출된 첫 번째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그는 울산의 한글학자 최현배와 동경제대 다닐 때 같이 자취 생활을 했다. 둘째 윤명선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만주 간도성 차장을 지냈으며 충남 공주의 갑부로 친일 기업가인 김갑순의 장녀 정자와 결혼해 그의 사위가 되었다.

김갑순((金甲淳, 1872~1961)은 서울 갈 때 절반은 자기 땅을, 절반은 남의 땅을 밟을 정도로 많은 조선 제일의 땅 투기꾼 부자였다. 공주 장터의 주막집 주모(酒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천민 출신이었다.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몰살당한 것을 보고 친일본해야 살 수 있음을 알고 행동했다. 공주군청의 관노로 잔심부름을 하다가 충남 관찰사의 첩을 구한 인연으로 의남매를 맺게 돼 아전 관료 생활을 시작으로 부를 축적했다. 1900년 초에 경부선이 대전을 통과하게 된다는 정보를 일본으로부터 미리 입수한 김갑순은 논밭과 구릉지대였던 대전의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이후 대전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땅값이 수백 배로 뛰었고, 김갑순은 떼부자가 된 것이다. 김갑순의 투기 수준은 오늘날 부동산 투기꾼을 기죽이는 수준이다. 1938년 당시 그가 공주.대전지역에 소유한 토지는 3371정보(1정보는 3천 평)로, 평(坪)으로 환산하면 무려 1011만여 평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대전 땅만 총 22만 평으로 당시 대전 시내 전체 토지의 40%가 그의 소유였다. 이는 여의도의 4배 규모다.

유성온천, 조선신문사, 공주읍 시장, 승합차 회사 등 여러 기업을 소유한 갑부였다. 노비로 태어나 90세까지 장수했는데, 그의 조부 묘가 명당이라서 큰 부자가 됐다고 풍수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가 땅 부자가 된 이유는 바로 탐관오리와 땅투기, 그리고 권력자와의 정략결혼이었다. 윤명선이 김갑순의 사위가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정략결혼은 내장원경을 지낸 김윤환, 박영효의 심복으로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 등 이름난 친일파 인물들과 두루 사돈 관계를 맺었다.

셋째 윤왕선은 유학했으나 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넷째 윤승선은 서울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시설감, 해병대 공병감을 지냈다. 현송자와 낳은 윤영선(尹暎善)은 의학박사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미국에서 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했다.

 

공주갑부 김갑순, 그는 해방 이후 농지개혁과 화폐개혁으로 몰락했다.
공주갑부 김갑순, 그는 해방 이후 농지개혁과 화폐개혁으로 몰락했다.

 

오욕의 역사 문화유산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바위에 애국지사와 친일인사의 이름이 같이 적혀있는 것이 우리나라 역사의 현실이다. 애국가의 작사자인 윤치호와 작곡가 안익태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태극기를 만든 박영효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상징인 국가와 국기가 그 민족 국가를 사랑하다가 배신했던 혹은 배반했던 인물들의 작품이란 사실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가끔 나는 우리의 국가나 국기가 일제에 저항해 싸웠던 독립군이 불렀던 노래나 깃발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통도사 이름 바위는 역사의 방명록이다.
통도사 이름 바위는 역사의 방명록이다.

 

역사는 기록이지만 한편으로 사람의 일이다. 연관된 사람들의 권력에 따라 역사는 사실이지만 평가에 있어 대립과 갈등을 유발한다. 역사의 기록도 권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립운동도, 친일의 역사도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기억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재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역사 일부가 수치스럽다 하여 지우려는 시도가 있다. 역사를 청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을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역사 문화유산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문화유산을 제거하면 역사적 기록과 기억이 사라지게 된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대상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왕조의, 일제의 유산이라도 그 흔적을 남겨두어야 한다. 남겨두어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존재하므로 교육이 되고 교훈이 되지만, 사라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과격하게 청산할 것은 역사 문화유산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과 생각이다. 존재하는 것이 수치임을 기억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이병길 양산 보광중학교 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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