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군 황토현에서 관군에 대승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8-12-20 0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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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백산에 모인 동학혁명군은 1만여 명


처음 백산에 모인 동학도와 농민은 4000명이었으나 며칠 사이에 약 1만 명으로 배 이상 늘어났다. 이중 손화중 포에서는 고창접부 오하영이 이끄는 1500명, 무장접주 송경하가 이끄는 700명, 정읍접주 손여옥이 이끄는 1200명 등 3400명으로 제일 많았고, 김개남 포에 속한 태인접주 김도삼의 1300명, 김덕명 포에 소속된 태인접주 최경선, 금구접주 김사엽이 이끄는 2000명 이외에 전라도 전역의 동학농민군들이 모였다. 이들은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뜻을 함께하는 백성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뿌렸다.


격문에서 “창생(蒼生)을 도탄(塗炭)의 중(中)에서 건지고 국가(國家)를 반석(磐石) 위에다” 두고, “탐학(貪虐)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橫暴)한 강적(强敵)의 무리들을 구축(驅逐)”한다는 동학농민군의 투쟁 목적을 분명히 했다. 또한 “양반(兩班)과 부호(富豪)의 앞에 고통(苦痛)을 받는 민중(民衆)들과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이라고 하여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투쟁의 주체로 민중과 소리(小吏)들을 상정하고 이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백산에서의 격문은 3월 20일 발표한 무장포고문을 한층 격상시켰다. 무장포고문에서는 기포의 목적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학정, 사회적 문란상을 해결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지만 해결 방안으로는 임금의 덕화만 기다린다는 유약하고 수동적인 측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격문에서는 투쟁의 목적과 혁명의 주체를 명확히 함으로써 기포의 당위성을 확고히 했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첫 번째 조형물로 1963년 10월 3일 개천절에 황토현에 세웠다. 탑에는 동학농민군의 염원인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保國安民)’이 새겨져 있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첫 번째 조형물로 1963년 10월 3일 개천절에 황토현에 세웠다. 탑에는 동학농민군의 염원인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保國安民)’이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군의 행렬


백산에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군세의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은 일부를 백산에 남겨두고 3월 말경 동학농민군의 첫 번째 목표인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출발했다. 동학농민군은 죽창 외에 활과 화살, 창, 화승총 등 여러 가지 무기로 무장했다. 동학농민군의 의복은 붉은색을 띤 옥자색의 마포였으며, 어깨에 화승총을 메고 허리에는 탄약통과 화승을 차고 있었다. 또 어깨에는 ‘궁을(弓乙)’이라는 두 글자를 써 붙여 호신부(護身符)로 삼았고 몸에는 ‘동심의맹(同心義盟)’이라는 네 글자를 간직했다. 황현이 지은 <오하기문>에는 동학농민군의 행진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평민이 선두에서 나이 십사오 세쯤 된 아이 한 명을 업고 진(陣) 앞에 나섰는데, 아이는 푸른색 홀기(笏旗)를 쥐고서 마치 지휘하는 것과 같았고 그 뒤를 뭇 적(동학농민군-필자 주)들이 뒤따라 왔다. 앞에서는 날라리를 불고 그다음에 ‘인(仁)’.‘의(義)’ 자를 새긴 깃발 한 쌍이, 다음으로 ‘예(禮)’.‘지(智)’ 자를 새긴 한 쌍이, 그 다음에는 흰색 깃발 두 개가 뒤따랐는데, 그중 하나는 ‘보제(普濟)’라 썼고, 다른 하나에는 ‘안민창덕(安民昌德)’이라 썼는데 모두 전서체로 쓰였다. 다음의 황색기 하나에는 해서로 ‘보제중생(普濟衆生)’이라 쓰여 있었고, 나머지 깃발에는 각 고을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다음은 갑옷에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검무를 추는 자가 한 명, 그다음에는 칼을 가지고 걷는 자 네다섯 명, 다음에는 피리를 불고 북을 두드리며 붉은 관복을 입은 자 두 명, 다음에는 두 명이 또 날라리를 불고, 다음의 한 명은 벼슬아치의 관모를 쓰고 우산을 가지고 도인의 복장을 하고 나귀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소매가 좁은 옷을 입고 관모를 쓰고 우산을 가진 대여섯 명이 나귀를 타고 있는 사람의 주위를 에워싸고 따랐으며, 그다음에는 두 줄로 만여 명의 총수(銃手)가 뒤따르는데, 모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머리에 두른 수건은 다섯 가지 색깔로 색이 각기 달랐으며, 총을 가진 사람들 뒤에는 죽창을 가진 자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걸으면서 휘어지고 꺾이면서 혹은 ‘지(之)’자를 또는 ‘구(口)’자를 만들기도 하면서 진세(陣勢)를 배열하였는데 모두들 어린아이가 잡고 있는 푸른색 기가 지시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황현은 함평에서의 동학농민군의 모습이라고 했는데, 동학농민군들의 행진에는 신동이라고 불리는 어린아이를 목말 태우고 깃발을 흔들며 날라리를 부는 등 농민들에게 친숙한 민속적 연출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갖게 하고 아울러 오락적인 요소를 가미해 농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이러한 동학군의 신비로운 퍼포먼스를 보고 동학농민군에 가담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주 공략을 위한 출정


동학농민군은 첫 목적지인 전주를 향하여 진군하면서 각지의 관아를 점령해 폐정을 개혁했다. 3월 29일에는 6~7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태인읍으로 들어가 곧장 동헌과 내아를 공격해 군기를 탈취하고 하루를 머물며 아전들을 결발하여 죄를 물었다. 다음 날 금구를 향해 출발한 동학농민군은 4월 1일 태인으로 진입해 죄수들을 방송하고 공금과 문서들을 몰수했다. 오전 10시경에 원평으로 가는 대로로 진입해 정오쯤에 원평에 도착했다. 동학농민군은 원평천변에서 숙영했다.


원평에 숙영하던 동학농민군은 감영의 포군 1만여 명이 동학농민군을 치러 온다는 소문을 듣고 3일 부대를 3개로 분산시켜 후퇴했다. 1개 부대는 부안현 서도면 복흥역으로 가고, 1개 부대는 태인현 인곡, 북촌, 용산 등지로 내려왔다. 1개 부대는 원평에 머물다가 4월 4일 부안으로 가서 먼저 간 부대와 합류해 전봉준, 손화중이 이끄는 4천 명이 부안현을 점령해 현감을 구금하고 군기를 탈취했다. 이때 관군의 추격 소식을 듣고 4월 5일에는 부안 삼소산으로 진을 옮겼고 6일 고부 천태산(天台山)을 넘어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자 김개남의 부대도 합류했다.



황토현전적지.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으로 사진의 오른쪽에 동학혁명기념탑이 있고, 왼쪽으로 멀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보인다. 황토현은 사진의 오른쪽 편이다.
황토현전적지.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으로 사진의 오른쪽에 동학혁명기념탑이 있고, 왼쪽으로 멀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보인다. 황토현은 사진의 오른쪽 편이다.


농민들 동학농민군에 호응


동학농민군은 진격하면서 각지에서 반탐관오리 투쟁을 과감하게 전개했다. 관아를 점령하면 군기를 탈취하는 것은 물론 부당하게 체포당한 양민과 천민을 석방했고 수령을 포박해 동헌에서 징치했다. 그리고 서리 중에서도 수령의 수탈을 집행하는 형방과 공방을 포박해 벌했다. 이들 중 원성이 높은 자들은 집과 재산을 파괴하거나 죽이기도 했다. 또한 백성을 괴롭히는 부민(富民)들도 벌했는데 고장의 은대정과 함평 읍내의 요민(饒民, 살림이 넉넉한 백성)으로부터 양곡을 빼앗기도 했다.


이렇게 과감한 탐관오리에 대한 투쟁과 불량한 부민에 대한 징벌을 진행하고 있었음에도 농민군들은 각지에서 환영받았다. 이는 농민군의 엄중한 규율로 인해 일반 백성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이 환영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탐관오리와 부민들의 탐학이 심했음을 방증한다. 일본의 특파원은 동학농민군의 이러한 모습을 기사화했다.



고부에서 주로 진행하는 때에는 구경꾼이 군집하여 오히려 그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고, 또 혼잡 때문에 논밭을 밟아 황폐하게 하는 것을 보고 농작물 해치는 것을 경계했으며, 또한 이런 하찮은 물건이라도 그것을 구입할 때는 반드시 현금으로 지불하는 것 등에 의해 지방민에 있어서는 다소의 이익이 되기도 해서, 위로 조금이라도 위해를 끼칠 염려가 없다면 일반 완민(頑民, 통치자를 잘 따르는 백성) 사이에서는 대단히 평판이 좋았다.



동학농민군은 혼잡하게 모여 있어도 농민들의 농작물에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조심했으며, 동학농민군이 필요한 물건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현금을 주고 사서 농민들에게 이득이 돼 농민들도 동학농민군을 환영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 땅은 일단 동학도에게 점령된 땅이 되었다면 그 피해도 얼마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민가 및 관청 등 하나도 파손된 것이 없으며, 또한 동학도들이 통과할 때를 당해도 그들은 어떠한 폭행도 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들의 투쟁 대상은 탐관오리와 불량 부민에 국한됐고 실제 동학농민군은 이를 엄정히 지켰다.



황토현에서 관군에 대승


동학농민군이 백산에서 집결해 혁명을 본격화하자 4월 1일 전라감사가 백산에 주둔하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부관 이재섭과 송봉호 등이 1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다. 토벌군이 편성됐다는 소문에 농민들은 대부분 빠져나가고 동학도들이 중심이 된 혁명군으로 수효가 줄어들었다. 실제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태인과 화호에서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부안과 고부 방면으로 후퇴했다. 정부군은 고부로 향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했다. 정부군은 4월 4일 금구 원평에서 113명의 동학농민군을 체포했고, 여산에서도 1명, 전주 부근 마을에서 2명이 체포해 동학농민군 토벌을 본격화했다. 4월 6일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에 올라 진을 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비장 이경호와 군사 수백 명, 열읍의 속오군을 도교산으로 출동시켰다.


4월 6일 부안에 있던 동학농민군은 아침 8시경부터 부안을 빠져나오기 시작해 고부의 도교산으로 향했고, 전라감영에서는 감영군과 보부상으로 구성된 정부군을 동학농민군이 주둔하고 있는 도교산(道橋山)으로 파견해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은 황토산(黃土山)에서 맞닥뜨려 오후 4시경부터 접전이 시작됐다. 전투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 남아 있던 동학농민군들도 도교산으로 이동해 동학농민군과 합세했다. 밤새 치러진 황토현 전투는 4월 7일 새벽 4시경에 동학농민군이 정부군을 크게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농민군은 50명의 총수(銃手)를 남원부에서 보낸 원병으로 위장해 정부군 쪽으로 들여보내는 작전을 세웠고, 정부군이 잠이 들자 안팎에서 관군을 공격했다. 동학농민군은 정부군 780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정부군은 규율이 없는 존재로 경멸했던 동학농민군에 꼬꾸라졌다.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의 황토현 전투 부분. 양호초토등록은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 ?~1895)이 장위영군(壯衛營軍)과 강화영군(江華營軍) 등 경군(京軍)을 인솔하고 서울을 출발한 4월 초 3일부터 전주성(全州城)을 수복한 직후인 5월 16일까지 양호초토사가 한 일을 일기체(日記體)로 수록한 자료다. 4월 8일자에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이 패했다고 기록돼 있다.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의 황토현 전투 부분. 양호초토등록은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 ?~1895)이 장위영군(壯衛營軍)과 강화영군(江華營軍) 등 경군(京軍)을 인솔하고 서울을 출발한 4월 초 3일부터 전주성(全州城)을 수복한 직후인 5월 16일까지 양호초토사가 한 일을 일기체(日記體)로 수록한 자료다. 4월 8일자에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이 패했다고 기록돼 있다.


황토현 전투에서 정부군과 싸워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오후 2시경 정읍의 연지원(蓮池院)과 모천변(茅川邊)에 진을 쳤다. 동학농민군은 이날 밤 8시경 읍내로 들어가 정읍관아를 공격해 옥문을 파괴하고 수감돼 있던 동학교도 6명을 풀어주었으며, 무기고를 파괴해 기계와 창검 등의 무기를 탈취한 다음 공형과 이속, 도사령(都使令)의 가산을 파괴하고 보부상의 주거지 3집을 불태웠다. 동학농민군은 저녁을 먹은 다음 밤 10시경 고부 삼거리로 가서 숙영했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로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우선 정부군의 토벌로 흩어졌던 농민들도 동학농민군에 가담해 군세가 급증했다. 또한 동학의 종교적 힘으로 얻은 승리라는 소문이 돌아 동학에 입도하는 자도 갑자기 늘어났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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