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의 전주 입성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1-02 17: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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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황룡천 전투 승리 후 전주로


4월 23일 황룡장터에서 식사 중이던 동학농민군은 기습해 온 경군에게 70~80명이 부상당해 수세에 몰렸으나 전열을 정비하고 장태라는 신무기로 경군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동학농민군은 수백 개의 장태 안에다 짚을 넣고 불을 붙인 뒤 관군에게 굴려 관군의 화력을 소비하게 한 후 그 뒤에 숨어서 경군을 접근하여 공격하자 경군은 무기를 버리고 영광으로 도망쳤다. 경군은 도망치다 대관(隊官) 이학승과 군졸들이 동학농민군의 추격에 죽임을 당하였다. 동학농민군은 황룡천 전투에서 쿠루프포 1문, 회전식 기관포 1문, 그리고 수많은 탄환을 획득했다. 황룡촌에서 조선의 주력부대인 경군에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의 자신감은 한껏 고조돼 1차 목표지인 전주성을 향해 북상했다. 동학농민군이 황룡촌에서 승리한 4월 2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 27일인데 매년 이날 황룡촌의 승전기념탑에서 동학농민군의 염원을 기리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전사자 등을 장례 지내고 정읍으로 출발했다. 장성에서 출발한 지 이틀만인 25일에 동학농민군은 정읍에 진입했다. 정읍에 들어간 동학농민군은 정읍의 대표적인 탐관인 초토영(招討營) 운량감관(運糧監官) 김평창(金平昌)의 집에 난입해 가산을 파괴하고 전곡과 의복을 모두 탈취하는 등 탐관들을 징치했다. 이렇게 탈취한 가산은 팔아 동학농민군의 경비에 쓰거나 비축해 두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은 이렇게 탐관을 징치한 후 정오 무렵에는 원평으로 향했다.


동학농민군은 원평에서 고종의 효유문을 가지고 온 이효응, 배은환을 만났다. 하지만 전봉준은 고종의 효유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들을 처형해 버렸다. 이들에 대한 처형은 동학농민군이 황룡촌에서 ‘왕의 군대’인 중앙군, 즉 경군을 이긴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왕의 군대인 경군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혁명 초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룡촌 전투에서 왕의 군대에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의 의식은 크게 변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학승 순의비.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한 별동대장 이학승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학승은 좌승지로 추증됐다.
이학승 순의비.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한 별동대장 이학승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학승은 좌승지로 추증됐다.


동학농민군 전주에 무혈입성(無血入城)


동학농민군은 호남의 중심지 전주를 향해 빠르게 북상했다. 4월 26일 동학농민군은 전주 서쪽의 삼천(三川)과 전주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두정(豆亭)에 도착해 숙영했다. 당시 전주성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4월 18일에 파직을 당했고, 신임 감사인 김학진(金鶴鎭)은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다.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동학군 토벌을 위해 전라 감영군은 모두 데리고 가서 전주성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4월 27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전주성 입성에 돌입했다. 관군은 전주성을 공략하는 동학농민군을 전봉준과 김순명, 그리고 아기장수 이복용이 지휘했다고 기록했다. 이날은 서문 밖 장날로 동학농민군들은 장사꾼으로 변장해 수천 명이 손쉽게 전주성으로 들어갔다. 동학농민군은 정오를 전후해서 성의 서문 쪽에서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정오경에 동학농민군은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고 수천 발의 총을 쏘며 전주성으로 진격했다. 전주성의 성문은 같이 위장해서 들어간 동학농민군, 그리고 동학농민군과 내통한 관속들에 의해 안에서 열렸고 동학농민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전주성으로 들어갔다


동학농민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전라감사 김문현과 판관, 영장 등 감영의 관원들은 모두 동문 밖으로 달아났다. 감사 김문현은 공주의 충청감영으로 달아났고 판관 민영승은 도주하면서 조경모의 참봉 장교원과 박봉래가 숨긴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가로채 위봉사 대웅전에 모셔놓고 영정 보호의 명분을 만들기에 바빴다. 영장 임태두도 민영승과 함께 위봉산성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관원들이 제 한 몸 추스르기에 급급해 전주성을 빠져나가자 동학농민군은 큰 전투도 하지 않고 전주성으로 무혈입성했다.



전주성 풍남문(?南門). 전주성의 남문으로 전주성의 동서남북에 다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문인 풍남문만 남아있다. 반대쪽에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전주성 풍남문(?南門). 전주성의 남문으로 전주성의 동서남북에 다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문인 풍남문만 남아있다. 반대쪽에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전주성에서 농민을 위무


전주성에 입성한 전봉준은 전주성 선화당(宣化堂)을 차지했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며 성내의 주민들을 위무했다. 길에서 부녀자가 혹시 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동학농민군들이 직접 일으켜 세우지 않고 길가의 아동들에게 부축해 일으켜주도록 했다. 이는 동학농민군이 부녀자를 겁탈하는 관군과 다른 정의의 부대라는 것을 인식키기 위해서였다. 또 농민에게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모내기할 때를 놓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렇게 농민군들이 백성들 편에 서자 전주성을 점령한 27일 오후에는 성내 장시에는 사람들이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왕래했고 온 성안의 주민들이 모두 화합했다.


또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의 질서를 잡아갔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차지하자 전주성에서는 이교(吏校), 노령(奴令), 민인(民人) 가운데 도망할 겨를도 없이 살해, 약탈, 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했다. 동학농민군 가운데에도 일반 민인에 대한 이전의 원한도 있어서 폭력을 휘두르고 몰래 부호를 납치, 협박하여 재화를 빼앗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행동을 전해들은 전봉준은 힘을 다해 자신의 기포 목적을 동학농민군에게 설명했다. 전봉준은 전라 일대 농민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전 감사 김문현, 전 전운사 조필영, 전 균전사(前 均田使) 김창석(金昌錫), 전 고부 안핵사(前 古阜 按?使) 이용태 등 4명을 효수한 후에 해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동학농민군의 개인적인 원한이나 악행의 금지를 설득했다. 이렇게 전봉준 등 기포의 지도부가 질서유지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다행히 큰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특히 전주 출신의 동학 접주 서영두(徐永斗)는 동학농민군의 폭력을 막고 민간인과 동학농민군 사이를 중재하는 등 폭력과 약탈행위를 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동학농민군의 전주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완산공원에 세워졌다.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동학농민군의 전주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완산공원에 세워졌다.


전주성 전투


전주성이 함락되는 시각 초토사 홍계훈은 영광에서부터 계속 동학농민군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태인현에 도착해 있었다. 홍계훈은 이날 저녁 늦게 금구현에 도착했다. 4월 28일에 전주에 도착한 홍계훈은 전주성으로 바로 진격하지 않고 전주성 남쪽 완산에 진을 쳤다. 완산에 진을 친 홍계훈은 전주성 탈환을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먼저 홍계훈이 대포 세 발을 쏘자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서문과 남문을 열고 돌진해 나왔다. 남문으로 나온 동학농민군은 흰 천으로 휘장을 만들어 앞을 가리면서 공격했다. 성내의 동학농민군도 보루 위에 올라가 일제히 관군을 공격했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환도를 차고 천보총(千步銃)을 가지고 선두에서 공격해오던 동학농민군 30여 명을 살해하고, 퇴각하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해 수백 명을 사살했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자 곧바로 전주성 공략에 돌입했다. 홍계훈은 성을 공격하기 위해 전주성 주변의 민가 800여 호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동학농민군도 성 내외의 관청 건물과 민가에 불을 질러 관군의 공격에 대항했다. 관군은 공세를 취했으나 동학농민군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고 저항하자 날이 어두워 결국 완산으로 퇴각했다. 홍계훈의 전주성 함락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튿날인 29일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공격하기 위해 성 밖을 나섰다. 동학농민군이 북문을 나와 황학대를 쳐다보며 관군을 공격하자 관군이 회전식 기관포를 발사해 동학농민군 백여 명이 피해를 입고 성안으로 물러났다. 관군이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지 동학농민군 가운데 일부 이탈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5월 1일에도 동학농민군이 남문을 나오자 홍계훈은 회전식 기관포를 쏘아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살상 당했다.


조정에서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증원했다. 4월 30일 이원회(李元會)를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고 평양의 장병 500명과 통위영 포대 장병에게 대포를 끌게 해 전주로 보냈다. 다음날인 2일에도 동학농민군은 서문을 열고 몰려나와 용머리 고개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관군이 대포를 계속 발사하자 많은 사상자만 내고 되돌아왔다.


전주성 점령 후 관군이 날로 증가되고, 사방이 포위돼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끊겼으며, 몇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고 군량은 바닥이 났고, 성을 타넘어 도망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군들이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전봉준은 점괘를 보며 “3일을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 또한 여러분들은 내 말을 듣고 죽을 곳으로 들어왔는데 어찌 다시 한 번 내 말을 듣고 조금 더 참지 못하는가”라고 하며 동학농민군들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의 사기가 꺾이자 다음날인 5월 3일 전봉준은 직접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홍계훈의 부대를 공격했다. 동학농민군 수천 명은 오후 4시경 전주성 북문을 나와 황학대를 거쳐 완산의 홍계훈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순명과 14세의 장사 이복용이 사살됐고, 전봉준은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5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사살 당했다. 황학대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을 상징하는 대장기와 총과 창 500여 자루를 빼앗겼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에 승리하자 홍계훈은 전주성에 있던 동학농민군이 반은 도주하고 남은 동학농민군들도 자중지란에 빠졌다고 보고했다. 전주성을 차지하기 위한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공방을 치열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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