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성벽에 올라 그 옛날 장안성을 생각한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1-02 18:4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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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중국인들에게 성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성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일 뿐만 아니라 도시의 영혼도 그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벽과 성문을 건설할 때, 전쟁터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백골을 최대한 모아서 그것을 성벽 안에 넣었다. 그리고 성벽을 완공한 뒤에는 살아 있는 개를 그 자리에서 죽여 더운 피를 그 위에 뿌렸다. 이러한 세례를 통해, 도시가 외적의 모든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생명력과 영혼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둥젠훙. <고대 도시로 떠나는 여행> 중)


중국의 고대 도시는 서주시대 이후로 ‘주나라 왕성도’를 모델로 삼았다. 주나라 왕성도에 따르면 ‘도성은 사방 9리이고 각 면에 3개의 문이 있다. 도성 안의 도로는 가로세로로 각각 9개의 길이 나 있다. 이중 남북 방향 도로는 9대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너비이고, 성곽을 둘러싼 도로는 7대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너비이며, 성 밖의 도로는 5대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너비다. 황궁의 왼쪽은 종묘이고 오른쪽은 사직을 두었으며 황궁 앞쪽은 조정이고 뒤쪽은 시장이다.’




전한시대 장안성은 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의 길이가 5km에 달했으며 폭은 약 50m에 이르렀다. 도로의 가운데 20m는 황제가 다니는 치도였고, 치도 양쪽으로는 도랑이 파여 있었으며 도랑 밖 양쪽에는 각각 폭이13m인 길이 있었다.


수.당 장안성과 낙양성은 남북 방향으로 11갈래의 도로와 14갈래의 동서 방향 도로가 나 있었다. 성 전체가 마치 바둑판처럼 구획되어 있어 “수많은 집은 마치 바둑판 같고 열두 갈래 길은 채소밭처럼 가지런하네”라고 백거이는 그의 시에서 묘사했다. 한나라 대명궁 앞의 주작대로는 폭이 무려 180m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해만 보이고 장안은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통칭해서 장안(시안)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장안의 위치는 제각기 달랐고 같은 장소는 아니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물리치고 수도로 정한 곳은 지금의 시안 근처 호경이라 부르는 곳이었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다음 수도로 삼은 곳은 시안의 서북쪽 함양이었으며,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수도를 이곳 장안에 두었다.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는 도읍을 장안에 두었지만 모두 한나라의 장안과 완전히 같은 장소는 아니었다.




이들 왕조의 수도가 같은 장소가 아닌 이유는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새로운 정복 왕조가 이전 왕조의 도읍으로 쳐들어와서 도성을 완전히 불태우고 부숴버려 거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앞선 왕조의 도성보다 더 크고 더 호화로운 수도를 반복해서 건설하였다. 이들은 모두 비슷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려진 장안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지금 시안 시내에 있는 성벽과 망루는 명나라(1368~1661) 때 서북지역을 방위하기 위해 지어졌다.


현재의 도시 시안을 만든 사람은 3백 년간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재통일한 수 문제 양견이었다. 그는 581년 수나라를 세웠고 그 이듬해에 새로운 도시 건설에 착공한다. 그는 새 왕조의 기백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나라 장안성이 있던 동남쪽에 새로운 수도를 따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당시 수 문제 양견이 한나라 장안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 했던 이유 중에는, 장안성이 한나라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궁궐이 많이 파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물 물이 짜졌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도성은 백성들의 거주지역과 뒤섞여 있어서 관리하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새 수도 건설 책임자는 선비족 출신의 우문개였다. 그는 뛰어난 도시설계자이자 엔지니어였다. 그가 장안성을 완공한 뒤에 동도 낙양성도 그의 손에 의해 설계되었다. 장안성 건설에는 20여만 명의 농민이 동원되었고 아홉 달만에 완공한다.


황제가 거주하는 궁성과 관청이 들어선 황성, 백성들이 거주하는 구역을 구별하여 모두 담장을 둘러쳤다. 그리고 장안 전체를 둘러싼 거대한 성곽을 지었다. 수나라 때까지는 이 신도시의 이름을 대흥성이라 지었는데 당나라가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름만 바꾸어 장안성으로 부르게 된다. 직사각형으로 구획된 장안성은 동서로 9.7킬로미터, 남북으로 8.5킬로미터에 이르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보다 7배나 컸다고 한다.


그러나 장안은 황권 구현과 치안 유지를 위해 폐쇄적으로 구획되고 운영된 도시였다. 백성들의 거주구역을 ‘방’이라 불리는 108개 구역으로 나눠 놓고 각 구역별로 담장을 또 쌓았다. 외곽 성벽이 5미터 높이였다면, 바둑판처럼 구획된 각 방은 2미터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안 성벽에 올랐다. 그 옛날 장안성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었다. 당나라 때 시인 두보와 백거이도 이곳 성벽에 올라 장안성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 끝없이 펼쳐진 ‘관중평원’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사실 시안이 속한 이곳 관중평원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지세를 갖추었다는 곳이다.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뼈가 나뒹구는구나.” 시름에 젖어 한탄을 했을 것이고, 유유자적이며 비교적 평온한 인생을 살았던 백거이는 “7백 리 밀밭 길이 끝이 없는 곳이 장안이로구나.”하며 감탄사를 연발했을 것이다.


폭이 180미터에 이르는 대명궁 앞 주작대로는 서역 원정에서 돌아오는 병사들의 행렬로 가득 메워지고 그들이 일으킨 뿌연 흙먼지와 일제히 불어대는 뿔 호각 소리에 천지는 진동하고 혼미하며 정신이 아득해졌을 것이다. 장안성의 서쪽 시장, 서시에는 서역과 중앙아시아에서 교역차 찾아온 상인들과 사신단. 아랍, 페르시아, 인도, 신라, 일본에서 유학 온 수많은 학생과 승려들로 북적이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당시 장안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고 다양한 문명의 집결지였다. 수많은 민족이 교류했고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으며 무역은 교차되었다. 외국인 거주지역인 ‘서시’에는 경교와 조로아스터교, 마니교와 같은 다양한 종교 사원이 세워져 있었다. 1백만 명이 살았던 장안성에서 거주인의 1/3은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당시 국제도시 장안의 모습이다.


높이 12미터, 아래 폭 15~18미터, 위쪽 폭 12~14미터, 총 길이 13,7킬로미터에 달하는 시안 성벽은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만들었다. 무려 8년 동안, 당나라 때 만든 성벽의 기초 위에서 이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토대와 내부는 황토와 석회, 찹쌀즙을 섞어 다졌고, 외부는 구운 벽돌로 덮어 입혔다. 게다가 성벽을 둘러싸고 폭이 10미터에 이르는 해자를 깊이 팠다.


성벽 위에서 시안 시내를 바라본다. 성벽 주변에는 고층 건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산시성 정부에서 규제를 강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적지 보호와 미관상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산시성 인민정부가 들어선 자리는 명나라 때 ‘진왕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 뿐만 아니라 ‘서북을 안정시킨다’는 의미로 이곳을 시안이란 명칭을 부여한 이도 주원장이었다. 주원장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시안의 왕인 ‘진왕’으로 봉해 시안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때 지은 진왕의 궁궐이 진왕부였다.


현재 시안 성벽은 동서남북으로 성문이 18개나 되는데 처음 지을 때는 4개의 문밖에 없었다. 동문인 ‘장락문’은 명나라 말기 이자성이 이끈 농민군이 시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공교롭게도 이 성문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자성은 성문에 걸린 편액을 보고 “황제가 오래도록 즐거우려면 백성은 오래도록 고통스러워야 하겠지”라고 말하자 즉시 곁에 있던 부하가 성루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지금 장락문의 성루는 청나라 때 재건축된 것이다.




당나라 황성의 서쪽 중문인 ‘안정문’에는 서쪽 변방을 안정시킨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사신단과 상인, 낙타와 말, 때로는 서역 원정을 떠나는 병사들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왕래했을 것이다.


남쪽 성벽에는 시안 성문 중 가장 오래된 ‘영녕문’이 있다. 수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영원히 안녕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외에도 성벽 남쪽에는 총 7개의 성문이 있는데, 이 중에 ‘문창문’이 있다. 문창문의 안쪽으로 난 길은 박수림가도로 불린다. 이 길을 따라가면 비림박물관이 나온다. 아마도 문묘에 측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거리 지명이 된 것 같다. 문창문 바깥으로 난 길은 문예로다. 고문서 거리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곳에는 고서점과 문방구, 화실 및 골동품 상가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다. 또 남쪽으로 난 문 중에 건국문이 있다. 시안사변의 주인공 장쉐량의 공관이 건국문 안쪽 거리에 있다.


북쪽 성벽에는 총 6개의 문이 있지만 ‘안원문’을 제외한 나머지 문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안원문은 명나라 때 만들어졌는데 소수민족을 평안케 한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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