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백운암에 선승들이 오다(1)

이병길 시민.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01-09 16: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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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 기행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가 통도사의 백운암이다. 통도사 암자 중에서 유일하게 차량으로 접근할 수 없는 암자다.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오르고 나면 오른 이유를 알게 된다. 백운암은 극락암과 비로암을 지나 산길을 접어 걸어간다. 마지막 주차장에서 오르면 대략 40여 분 걸리는 산행이다. 길은 가파르고 너덜길이지만 계단과 테크를 중간 중간 만들어 어려움은 없다. 백운암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백구다.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佛眼示佛) 개 눈에는 개만 보이기(狗眼示眼)” 때문이다. 휴게소 주련의 글이다.



신라시대 창건한 천년 고찰, 백운암의 역사


흰 구름이 감도는 듯한 가파른 산언덕 바위 틈새에 백운암이 있다. 백운암에는 법당, 용왕각, 조사각, 산신각, 공양간, 요사채 등 여러 건물이 있다. 백운암 건물은 대부분 최근래에 개보수하거나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최근 십여 년 동안 가장 많은 불사가 있었다. 헬리콥터와 모노레일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백운암의 건물 공간은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경계는 용왕각 옆 다리 혹은 계곡이다. 왼쪽의 승요 영역이 수행자의 영역이라면, 오른쪽 법당 영역은 신도를 위한 영역이다. 백운암 전체의 전경은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난 큰 바위로 가야 한다. 경봉스님은 1962년 12월 9일 백운암을 대중 9명과 같이 다녀와서 ‘백운암에 올라’라는 시를 남겼다.



“白雲巖上白雲飛(백운암상백운비), 萬象森羅大地圍(만상삼라대지위), 廳水觀山開活眼(청수관산개활안), 石頭殿角放光輝(석두전각방광휘)”


“백운암 위로 흰 구름이 날고, 삼라만상은 대지에 드리웠네. 물소리 듣고 산을 보는데 활안(活眼)이 트이니, 돌머리와 추녀 끝 어디든지 빛을 발하네.”



백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산내 암자로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83의 1번지(055-382-7085)에 있다. <통도사 사적기> 등에 따르면, 신라 진성(여)왕 임자년 6년(892년) 조일(朝日)대사에 의해 창건됐다. 조선 순조 10년(경오년, 1810년) 침허(沈虛)가 중창했고, 1959년 벽안스님이 고쳤다. 그 후 1970년대에 경봉(鏡峰)스님이 후원해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최근에는 만초(万草)스님에 의해 2004년 법당을 새로 신축하는 등 큰 불사가 있었다. 옛 법당은 승요 영역 무설당(無說堂)에 옮겨놓았다. 그 후 다시 은사 태봉(泰奉)스님이 2009년 공양실과 용왕당, 숙소, 화장실 건립 불사를 했다. 삼성전력항공(사장 정경환)은 헬기로 시멘트, 모래, 기와 등 자재를 백운암으로 실어 나르며 1억5000만 원 상당의 운임도 받지 않고 불사를 도왔다. 석공 남기용 씨와 목공 이삼술 씨도 무보수로 불사에 동참했다. 2012년 오래된 삼성각을 중수해 나한전으로 바꾸고, 2014년 산신각을 새로 지었다. 태봉스님은 늘 “자만심을 버려라, 초심으로 돌아가라, 베푸는 삶을 살아라.” 수없이 강조하신다.


백운암은 통도사 암자 중에서 창건 당시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는 자장암(646년) 다음으로 오래된 암자다. 즉 자장암과 같이 백운암은 신라시대의 암자다. 옛 암자의 흔적은 없다.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스승을 찾아, 혹은 수도처를 찾아 이곳저곳 떠다니는 수행승인 백운승(白雲僧) 또는 납자승(衲子僧)이 머물렀던 곳이다. 백운암은 의식이 중요시되는 일반 사찰과 달리 스님들이 더 큰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보림터, 즉 진리를 깨치고 안으로 힘을 단련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암 법당은 늘 등산객이 드나드는 열린 공간이다.
백운암 법당은 늘 등산객이 드나드는 열린 공간이다.


백운암에 통도사 최초의 선원을 개설한 경허스님


백운암은 근세 통도사에서 선방이 처음 개설된 곳이다. 불교계의 큰스님으로 꼽히는 경허, 만공, 한암, 경봉스님 등이 수도하면서 주석하셨던 곳으로 알려졌다. 불지종가(佛之宗家) 천년고찰(千年古刹) 통도사도 조선시대 불교의 암흑기를 거쳐 백운암에 선방을 열었다. 1900년에 개설된 통도사 보광선원 이전인 1899년 7월에 통도사 백운선실에서 수옹(睡翁) 혜윤(惠允)선사가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1899년 이전부터 백운선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9년 경허스님은 해인사 퇴설선원에서 동안거를 하고 난 후에 범어사에 들렀다가 통도사 백운선원으로 온다. 이듬해 스님이 직접 통도사에서 선풍을 떨치는데, 이때 통도사 내에 보광선원이 문을 열었다. 이후 1905년 한암스님에 의해 내원암에 선원이 개설되면서 1916년 안양암, 1928년 극락암, 1935년 백련암 등에 차례로 선원이 개설됐다. 통도사 선원의 역사는 경허스님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스님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스님


경허(鏡虛) 성우(惺牛)스님(1849∼1912)은 한국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로 꼽힌다. 텅 빈 거울에 깨우친 소가 바로 그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하)>에서 “조선의 모든 승려 7000명을 들어서 말하면 10중 8, 9는 모두 교종이며, 실은 선(禪)도 교(敎)도 아닌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실재 당시에 참선하는 스님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경허스님은 일대사(一大事, 깨달음의 일)에 매진했던 진정한 수행자였다. 그의 오도가(悟道歌) 일부다.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吾家(돈각삼천시오가). 六月?巖山下路(육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홀연히 들으니 사람이 말을 하되 콧구멍이 없다 하네, 문득 깨치고 보니 삼천대천 세계가 다 내 집일세. 한여름 연암산 아래 길에서, 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깨달음과 달리 그는 승속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동을 했다. 대중 앞에서 대놓고 음주식육(飮酒食肉)을 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여색(女色)도 서슴지 않았다. ‘해인사에서 문둥병에 걸린 여인과 여러 날 동숙(同宿)한 것’, ‘만공과 함께 길을 가다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의 입을 맞춘 것’, ‘어촌에서 머슴처럼 지내면서 남의 아낙네를 희롱한 이야기’, ‘송광사 점안식 법상에서 술과 돼지고기를 바랑에서 꺼내 삶아 오게 한 것’ 등 그에게 불교 계율은 무의미했다. 스님은 “대승은 불구소절(不拘小節, 대승은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음)이라 할까요. 그러나 식색(食色)은 인간의 본능이거니 이것을 어찌하겠소.” 하였다고 한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하)>에서 “세상 사람들이 ‘경허화상이 변재(辯才)를 갖추었고, 그가 하는 설법이 비록 조사들을 따르고는 있지만 지나치지는 않다’고 하지만, 호탕하여 삼가고 경계하는 것이 없으므로 사음?살생계를 범하는 데에까지 이르고서도 (그것을)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 (요즈음) 선(禪)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이를 따르고 있다. 심지어는 미치광이처럼 말을 하고 술을 마시며 고기를 먹기까지 하면서도 보리(菩提)에 막힘이 없다. 도적질을 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면서도 반야에 거리낌이 없다. (그러면서) 이것을 일컬어 ‘대승선(大乘禪)’이라고들 하면서, 그 무행(無行)이 지나친 것을 가리고 꾸미기 위해 당당하게 이 모두가 옳다고 한다. 대개 이러한 잘못된 풍습은 실은 경허가 처음으로 잘못된 풍조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총림에서는 그런 까닭에 (그것을) 마설(魔說)이라고 한다. 내가 감히 경허 선사의 오처(悟處)와 견처(見處)를 알지는 못하지만, 만약 불경(佛經)과 선서(禪書)들을 가지고 그 일을 논한다면 옳지 않은 것 같다.”고 경허스님을 평가했다. 그래서 한암스님은 훗날 스님들에게 절대 경허스님의 계행을 무시한 파격적인의 행위를 배우지 말라고 하였다.


경허스님은 1903년까지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화엄사 등 경남지역에 머물며 선을 중흥시켰다. 1906년(61세) 이후에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로 바꾸고 서당 훈장으로 속인이 되어 살다가 1912년 입적했다.


경허선사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1937), 수월(水月, 1855~1928), 월면(月面) 만공(滿空, 1871~1946) 선사가 있다. 경허 선사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경허와 그 제자의 일대기는 소설가 최인호의 장편소설 <길 없는 길(1993)>에 잘 나와 있다.



산신각 아래의 약사여래불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산신각 아래의 약사여래불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경허의 제자, 한암과 만공 백운암에서 다시 깨닫다


경허스님의 두 법제자인 만공스님과 한암스님은 백운암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우연히 두 스님 모두 이곳에서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세 분 스님은 각각 참선을 권하는 불교 가사 작품 <참선곡>을 썼다. 그들은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선지식이었다. 쇠미해가던 조선 선가의 중흥을 위해 경허가 먼저 선봉장으로 깃발을 들고 나섰다. 뒤이어 만공과 한암이 법고를 울려 선풍중흥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두 제자는 각각 독자적인 가풍을 이루어 ‘남만공(南滿空), 북한암(北漢岩)’의 선맥을 형성했다.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스님은 경허스님 법맥을 이어 한국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운 보름달이었다.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청정수행 가풍을 회복하는 한편 대중을 불법(佛法)의 세계로 인도했다. “萬法歸一 一歸何處(만법귀일 일귀하처,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대체 그 한 가지 돌아가는 곳이 어디냐)”를 화두로 참선에 들어간 스님은 25세에 온양 봉곡사에서 새벽종 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남겼다.



“空山理氣古今外(공산이기고금외) 白雲淸風自去來(백운청풍자거래) 何事達摩越西天(하사달마월서천) 鷄鳴丑時寅日出(계명축시인일출)”


“빈 산 이치 기운 고금 밖인데,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고 가누나.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왔는고? 축시(丑時)엔 닭이 울고 인시(寅時)에 해가 오르네.”



이후 스님은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수도했으나 경허스님으로부터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지 못했다.”는 점검을 받고 더욱 정진한다. 1901년 여름 31세 때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에 들렀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만공스님은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같은 어둠을 모두 밝히게 하소서.”라는 범종 치는 게송을 듣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으로 경허스님의 인가를 받았다. 만공스님은 종소리에 자신을 깨치는 경험을 두 번이나 했다.



“淸淨般若蘭(청정반약란) 時時吐般若(시시토반야) 若人如是解(약인여시해) 頭頭毘盧師(두두비로사)”


“깨끗한 반야 난초, 때때로 깨달음의 향기 토하네. 사람도 이와 같으면, 비로자나 부처님이구료.”



일제강점기 만공스님은 쇠락한 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진력을 다했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의 무력에 굴하지 않았다. 스님은 당시 31본산 주지 중 유일하게 일본식 이름 강요를 거부했다. 1937년 7월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이 전국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했을 당시 마곡사 주지였던 만공스님은 일본제국주의에 일침을 가했다. 의제는 “조선불교 진흥책”이었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 주둔군 사령관을 거쳐 조선 총독으로 와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 등 악랄한 방법으로 민족문화 말살을 위해 무단정치를 했던 무도한 군인이었다. 그는 훗날 2차 세계대전의 일급 전범으로 체포돼 사형을 당했다.



조선총독을 꾸짖은 만공스님
조선총독을 꾸짖은 만공스님


총독은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허용하게 한 일본의 공을, 사찰령으로 조선 불교를 중흥하게 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총독을 칭송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전 총독은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라면서, 조선 승려로 하여금 아내를 얻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게 하여 “부처님의 계율을 파하게 한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이라고 경책했다. 이어 “이 사람은 당연히 지금 무간아비 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음이 끝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만약 데라우치를 구원하려면 부지런히 도를 닦아 성불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종교를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조선불교) 진흥책”이라고 사자후를 했다.


하지만 스승인 경허스님에게는 곡차와 고기안주를 올렸고 만약 식량이 떨어지면 자신의 살점까지도 오려 봉양하겠다 할 정도로 스승에 대한 존경은 극진했다. 만공스님은 전생이 육보시(肉布施)를 잘한 기생으로 많이 베풀어서 주석하는 곳마다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의 공간인 승요. 바로 앞의 무설당은 옛 법당을 옮긴 것이다.
스님의 공간인 승요. 바로 앞의 무설당은 옛 법당을 옮긴 것이다.


이병길 보광중 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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