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츠에 웃고 탱고에 넘어가고

박기눙 소설가 / 기사승인 : 2019-01-09 16: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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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퇴근한 남편이 다짜고짜 음악을 튼다. 많이 들어본 선율인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클래식을 들을 때 매번 겪는 어려움이다. 영상의 제목을 미처 보기도 전에 음악과 영상이 내 눈과 귀에 가득하다.


여자가 계단을 내려온다. 아직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엷은 분홍빛 치맛자락이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나폴거린다. 홀로 내려선 여자에게 쟁반을 든 웨이터가 다가온다. 여자는 목이 긴 샴페인 잔을 집는다. 발목을 드러낸 여자의 드레스는 인어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아래가 풍성하다. 여자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사람들은 여자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선 상태. 주변의 다른 여자들의 시선이 여자에게 꽂히는 순간 여자는 한 남자에게 다가선다. 이미 악단에게 다가가 춤곡을 청한 직후다.


여자의 눈길은 남자의 얼굴에 닿아 떨어지지 않는다. 여자의 눈길을 이겨내는가 싶던 남자의 얼굴이 순간 굳는다. 남자는 단호하게 돌아서서 여자와 남자를 둘러싼 구경꾼들 사이로 사라진다. 여자의 가슴이 한숨과 함께 덜컥 아래를 향한다. 이미 하얗게 변한 낯빛을 숨기기라도 하듯 여자는 술잔을 들고 사람들을 둘러본다. 둘러선 사람들 중 한 사내가 여자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여자는 희미하게 웃더니 남자에게 샴페인 잔을 건넨다. 거절당한 남자는 그러나 웃음을 띤 채 얼굴로 군중에 섞인다. 여자의 망연자실이 홀 전체를 채울 무렵, 여자의 마음을 대변하듯 어떤 음악도 흐르지 않는다. 주변의 눈길이 다시 여자에게 집중된다. 여자가 홀로 지킨 홀 가운데, 아랑곳없다는 듯 여자가 원을 그리며 몇 발자국 걷는다. 등이 훤히 드러난 여자의 드레스가 보이고 뒷머리칼을 묶어 고정시킨 금색 핀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린다. 깊게 파인 목선을 가두는 것은 역시 가슴께까지 내려온 목걸이.


여자가 다시 돌아선다. 검은 보타이에 검은 구두를 신은, 턱시도 차림의 다른 사내가 서있다. 사내가 여자에게 손을 내민다. 하얀 와이셔츠 소맷자락이 살짝 남자의 팔과 함께 나온다. 여자의 귓불에서 귀걸이가 반짝인다. 순간 음악이 가득 흐른다.


여자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는 동시에 다른 손을 남자의 어깨에 올린다. 남자는 맞잡은 손의 반대편 팔로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반짝이는 비즈를 박은 여자의 하이힐과 남자의 검정 구두가 함께 움직인다. 여자가 앞으로 나서면 남자는 물러서고 남자가 다시 다가서면 여자가 살짝 비켜선다. 둘의 걸음은 숫자는 같되 방향은 반대, 음악을 따라 여자의 몸과 남자의 몸 사위가 함께 움직인다. 여자와 남자의 춤사위는 이제 누구도 아랑곳없이 계속된다.


문득 여자가 불쑥 남자의 두 다리 사이로 발을 내민다. 여자의 몸이 남자의 가슴께로 밀리듯 내려간다. 여자의 무게를 견디듯 남자는 가슴을 젖혀 동작을 이어간다. 둘의 손끝이 닿을 듯 멀어지고 이내 둘의 몸 방향이 반대로 돈다. 숨이 차오르듯 여자의 가슴이 오르내린다. 남자의 어깨도 덩달아 빠르게 움직인다. 여자는 몸을 비틀어 왼쪽으로 남자의 허벅지에 기댄다. 둘의 몸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쓰러질 무렵 둘의 간격은 어느새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깝다. 여자가 발을 휘돌려차듯 올렸다 내리고 남자도 여자를 따라 왼쪽과 오른쪽으로 발목을 돌린다. 중심을 잡는 둘의 손길이 바쁘고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을 둘러싼 이들의 이목들 사이로 아까 여자를 홀로 두고 돌아선 남자의 것도 섞였다. 지느러미를 닮은 여자의 드레스는 뭇 사내들을 유혹하듯 계속 흔들리고 남자의 머리칼이 가리마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바이올린과 오보에가 흐느적거리는 박자를 겨우 따라갈 무렵 여자가 오른손을 올리면서 남자의 주위를 맴돈다. 어느새 이마가 닿을 정도로 둘의 간격이 가깝다. 남자가 여자를 번쩍 들어 자신의 허리춤으로 이끌고, 여자는 두 발을 모아 남자의 허벅지를 감았다 푼다. 이 동작을 완성하는 것은 둘의 찰나적 눈빛 교환, 남자와 여자의 맞잡은 손이 풀리고 박수와 환성이 홀을 가득 메운다.


왈츠 춤사위에 저런 동작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뭔가 미세한 차이로 음악과 둘의 동작이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나오는 음악은 왈츠인데 둘의 동작을 담아내기엔 왠지 반의 반 박자가 모자란 느낌. 영상의 제목을 확인한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더 세컨드 왈츠. 뒤에 한 낱말이 더 붙었다. 탱고.


처음부터 영상을 다시 튼다. 음악이 시작하는 찰나와 영상이 아주 조금씩 어긋난 게 눈에 띈다. 춤과 음악 장르가 교묘하게 섞인, 하이브리드 같은 영상. 처음에 알아차리지 못한 탓은 순전히 내 몫이다. 그럼에도 몇 번을 다시 틀어 영상을 본다. 왈츠에 웃고 탱고에 넘어간 시간, 내게 그저 귀와 눈이 함께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으리. 새해에는 춤을 배울까나, 왈츠 혹은 탱고?!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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