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화약과 폐정 개혁
전주화약과 폐정 개혁
  • 성강현 전문기자/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9.01.0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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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홍계훈의 포격으로 경기전(慶基殿) 파손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하는 과정에 대해 홍계훈은 <양호초토등록(兩湖剿討謄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시 여러 갈래로 자세히 탐문하니 감사와 판관은 저들이 돌진하여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군사들을 동원하여 주민과 함께 사대문을 지키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당(賊黨, 동학농민군)들이 갑자기 사방으로 포위해 오는 기세가 맹렬하여 성을 지키던 포군(砲軍)들이 겨우 한 발의 포를 발사하였더니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적당이 돌진하여 모두 서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적의 우두머리(전봉준)는 선화당을 점거하고 다른 도당들은 나누어 사대문을 지키니, 성안의 백성과 아전·군교·노비·사령·남녀노약자가 미처 피해 나오지 못하고 적의 화염 속에 빠진 자가 많아 그 수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전주성이 삽시간에 함락된 것은 감영이나 전주부의 관속이 내응(內應)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판관은 조경묘의 위패와 경기전의 영정을 받들고 동문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순식간에 전주성을 장악하고 전주감영의 선화당을 차지하자 성안의 아전과 군교 등이 미처 전주성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에 붙잡혔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감영이나 전주부의 관속들이 동학농민군에 가담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동학농민군에 호응한 관속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동학농민군의 주장에 동의하는 백성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무혈 입성한 다음날인 4월 28일 전주에 도착한 홍계훈은 전주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주 남쪽의 완산에 진을 쳤다. 그리고는 전주성을 향하여 포를 쏘았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성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경기전(慶基殿)이 있었다. 태조의 어진은 위봉산성으로 도피시켰지만 포격으로 경기전이 파손됐다. 태조의 어진은 없었지만 정부군의 경기전의 포격은 동학농민군이 정부군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수차례 전주성을 나와 완산을 공략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의 전투 장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홍계훈은 1894년 7월 24일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에 실린 인터뷰 ‘초토사(招討使)의 득의담(得意談)’에서 “그들은 이 일전을 최후라고 작정하여 옆도 쳐다보지 않고 피를 밟고 시체를 넘어 무이무삼(無二無三, 둘도 셋도 아닌 오직 하나임)으로 공격해 왔으며”라고 동학농민군의 전투 상황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적병(동학농민군)은 탄환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번 창검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분투 진격해 오는 용감함에 이르러서는 실로 느끼는 바가 있다.”라고 동학농민군의 결사항전의 자세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학농민군은 신명을 다해서 전투에 임했다.

 

동학혁명 1차 기포도. 1월 10일 고부에서 시작한 동학혁명은 4월 27일 전주성에 입성함으로써 1차 기포가 종료됐다. 반봉건을 기치로 내건 동학농민군은 당당히 호남의 중심인 전주를 장악했다.(출처: 조경달 저, 박맹수 역, "이단의 민중반란")
동학혁명 1차 기포도. 1월 10일 고부에서 시작한 동학혁명은 4월 27일 전주성에 입성함으로써 1차 기포가 종료됐다. 반봉건을 기치로 내건 동학농민군은 당당히 호남의 중심인 전주를 장악했다.(출처: 조경달 저, 박맹수 역, "이단의 민중반란")

 

동학농민군, 정부군에 휴전 제의

동학농민군이 신명을 바쳐 싸웠지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홍계훈의 부대를 무찌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장성에서 대포를 빼앗았지만 사용 방법을 몰라 전투에 동원하지 못했다. 또한 탄약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투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지도 못했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성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의 숫자와 기개에 눌려 쉽사리 전주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성안을 항해 포를 쏘는 공성전만 전개하면서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의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전주성을 사이에 두고 동학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의 전투가 전개되자 전주에는 막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정부군의 포격과 동학농민군의 민가 소실 등으로 전라감영 부근 10리 안의 인민이 모두 피신해 인적의 왕래가 끊겼다. 또한 공방전으로 인해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켜졌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동학농민군도 정부군과 장기전이 실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청군과 일본군의 국내 유입은 ‘보국안민’을 기치로 내건 동학농민군의 거병의 명분에도 맞지 않았다. 이런 여러 이유로 동학농민군은 홍계훈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동학농민군은 5월 4일 ‘제중생등의소(濟衆生等義所)’의 명의로 홍계훈에게 피도소지(彼徒訴志)를 전달했다. 피도소지의 주요 내용은 ‘먼저 거병도륙(擧兵屠戮)한 것은 지방관들이었고, 대원군을 모셔 감국(監國)케 하는 것은 이치가 매우 합당한 것으로 역모(逆謀)가 아니라는 점, 경기전(慶基殿)에 방포(放砲)한 것은 관군이고, 전주성을 점령한 것은 다만 목숨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 그동안 있었던 보복행위와 굴총(堀塚)과 재물을 빼앗은 일은 자신들도 매우 증오하는 것이라는 점, 초토사가 선처하여 보고해주기를 바란다는 점’ 등이었다.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군과 홍계훈 사이에 몇 차례 교섭이 이루어졌다.

 

완산공원의 동학전적지 기념비. 홍계훈이 이곳 완산에 주둔하면서 전주성을 향해 대포를 쏘아 경기전이 파손됐다. 완산공원에는 동학혁명군 전주입성비와 함께 동학전적지 기념비가 함께 서있다.
완산공원의 동학전적지 기념비. 홍계훈이 이곳 완산에 주둔하면서 전주성을 향해 대포를 쏘아 경기전이 파손됐다. 완산공원에는 동학혁명군 전주입성비와 함께 동학전적지 기념비가 함께 서있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와 전주화약(全州和約)

5월 7일 동학농민군은 정부군에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온 동학의 신원을 포함한 27개 조의 폐정개혁에 관한 청원을 국왕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다. 정창렬은 고부에서 기포한 이후 동학농민군이 주장한 각종 개혁안을 바탕으로 27개조의 폐정개혁 방안을 정리했다.

1. 전운소(轉運所)를 혁파할 것

2. 국결(國結, 과세 전답)을 늘이지 말 것

3. 보부상인의 작폐를 금지할 것

4. 도내의 환곡전(還穀錢)은 전임 관찰사가 이미 징수했기 때문에 민간에게 다시 징수하지 말 것

5. 대동미(大同米)를 상납하기 전에는 각 항구에서 잠상(潛商, 무허가 상인)의 무역미를 금단할 것

6. 동포전(洞布錢, 동리에 부관된 군포)은 매호 봄가을 2냥씩으로 할 것

7. 탐관오리(貪官汚吏)는 전부 파면할 것

8. 상총(上聰, 임금의 총명)을 가려 매관매직을 하고 국권을 조롱하는 자는 전부 쫓아낼 것

9. 관장(官長, 수령) 된 자는 해당 경내에 묘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밭은 매입하게 하지 말 것

10. 전세(田稅)는 전과 같이 할 것

11. 호(戶)마다 과하는 잡역은 줄일 것

12. 항구의 어염세(魚鹽稅)는 혁파할 것

13. 보세(洑稅) 및 궁방(宮房, 왕실)의 수세는 하지 말 것

14. 각급 수령은 귀환 때 일반 백성의 산지에 와서 강제로 내치거나 멋대로 매장하지 말 것

15. 균전어사(均田御史)는 혁파할 것

16. 각 읍 시정의 각 물건은 조금만 수세하도록 하고 도고(都賈)는 혁파할 것

17. 수확이 없는 토지에서 징수하거나 전답을 제 것으로 삼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의 일을 하지 말 것

18. 국태공(國太公, 대원군)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은 민심이 원하는 바임

19. 진휼고(賑恤庫)는 혁파할 것

20. 전보국(電報局)은 민간 최대의 폐이기 때문에 혁파할 것

21. 각 읍 각 창고의 물품은 시가에 의해 취급할 것

22. 각 읍 서리의 직책을 정할 때에는 채전(債錢, 빚진 돈)을 써서는 안 되며 사람에 맞춰서 각각의 직책에 임명할 것

23. 각 읍 포리(逋吏, 관물을 착복․포탈한 서리)는 천 냥을 써버린 경우는 사형으로 하고 그 일족으로부터 징수할 것

24. 관장(官長)을 사이에 두고 오래된 사채(私債)를 강제로 징수하는 것은 금지할 것

25. 동학교도로서 죄 없이 살육하거나 투옥된 자는 모두 신원할 것

26. 경․영․병저리의 요미(料米, 관원들에게 급료로 주는 쌀)는 구례에 의해 삭감할 것

27. 각국 상인은 각 항구에서 거래하고 도성에 들어와 시장을 열어서는 안 되며 각기 정해진 곳을 나와 임의로 행상을 하게 하지 말 것

동학농민군이 주장한 폐정개혁의 핵심은 동학도의 신원과 민씨 척족의 퇴진 그리고 대원군 정권의 수립, 가렴주구에 반대해 심정을 비롯한 조세 바로잡기, 탐관오리의 축출, 농촌 장시 질서 회복과 사채 무효화 등 빈민들의 생활환경 개선, 독점상인 및 외국 상인의 폐해 개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은 구체적 실천의 차원에서 지방 관리의 응징과 농촌 경제의 활성화를 요구했다. 동학농민군의 개혁안을 접한 홍계훈은 다음날인 5월 8일 그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체결했다.

 

경기전(慶基殿). 조선 왕실은 전주이씨의 발상지인 전주에 경기전을 세우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하자 태조의 어진은 조경묘의 참봉 장교원과 박봉래가 위봉사로 피신시켰다. 홍계훈은 전주성을 장악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해 전주성을 향해 포를 쏘았는데 이때 경기전 일부가 허물어졌다.
경기전(慶基殿). 조선 왕실은 전주이씨의 발상지인 전주에 경기전을 세우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하자 태조의 어진은 조경묘의 참봉 장교원과 박봉래가 위봉사로 피신시켰다. 홍계훈은 전주성을 장악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해 전주성을 향해 포를 쏘았는데 이때 경기전 일부가 허물어졌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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