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부부 이효정·박두복 이야기(1)

배문석 시민 / 기사승인 : 2019-01-09 17: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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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2006년 8월 15일 광복 61주년 기념식 때 독립유공자 313명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졌다. 그날 가장 눈길을 끌었던 이가 이효정(李孝貞 1913~2010)이었다. 일제강점기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했던 사회주의자 이재유(李載裕 1905~1944)도 같은 날 훈장을 받았지만 언론의 관심은 그동안 잘 몰랐던 여성독립운동가에게 더 쏠렸다. 생존 중인 최고령 독립운동가란 칭호가 따라왔다. 더불어 가슴에 피눈물이 사라질 날 없었던 이효정의 삶이 하나둘 언론에 공개됐다.


사실 둘 다 해방 후 61년이 지난 뒤에야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으니 너무 늦은 결과다. 일본에서 “재일조선노동자의 맹장”이라 불리다 고문사 당한 울산의 서진문(徐鎭文 1901∼1928)도 그때 훈장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그 전까지 유공자 심의에 제대로 오르지도 못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2004년 8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및 유족 150명을 초청한 오찬 간담회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서훈 기준을 완화하는 방침을 밝히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 일부 인정됐던 것을 보다 확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사회주의 계열은 2005년 3.1절부터 서훈 명단에 많이 포함됐다. 몽양 여운형(1886~1947), 권오설, 조동호, 구연흠 등 54명이 대거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이 중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명예가 그나마 인정받게 됐다. 일제강점기 후반기인 1930년대를 거쳐 1940년대에 들어서면 민족말살정책에 굴종한 이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은 수배와 구속을 되풀이하며 꺾이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그럼에도 해방과 동시에 찾아온 분단, 남북의 이념갈등 그리고 한국전쟁이 빚은 굴곡의 시대에 주홍글씨로 새긴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했다.


이효정이 겪은 고통의 무게도 뒤지지 않는다. 본인이 사회주의 계열이었을 뿐 아니라 남편 박두복(朴斗福 1912~?)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박두복은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둔 채 한국전쟁 초에 월북해 남은 가족들은 가혹한 연좌제에 시달렸다. 일제의 경찰에 고문당했던 것만큼 해방된 조국의 경찰 역시 가혹했다. 그래서 이효정이 받은 국가유공자 서훈은 국가가 건넨 유일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이효정은 ‘뒤늦게라도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아 이제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이 된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말의 행간에 기쁨과 아픔이 동시에 배어있다. 훈장을 받기 전 이효정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준 소설 <경성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은 인터넷신문에 쓴 기고글 속에 그런 마음을 옮겨 적었다. 동덕여고보 학창 시절에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이순금(李順今), 박진홍(朴鎭洪)을 언급하며 친구들을 빼놓고 받는 훈장에 미안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효정은 그로부터 4년 뒤, 2010년 광복절 하루 전날에 영면했다. 향년 97세,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겪어냈던 파란만장한 삶이 그렇게 저물었다.



이효정의 친가와 외가


1913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성이씨 이병룡(李丙龍)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병하(權柄夏)의 딸 권중숙(權重淑)이다. 친가와 외가 쪽 어른들이 증조부 대에 안동지역의 갑오의병(1894)과 을미의병(1895)에 참가했다. 본가는 안동호수 근처에 위치한 부포리다. 1974년 안동댐이 들어선 바람에 지금은 수몰지역으로 바뀌었지만 진성이씨, 안동권씨, 봉화금씨, 횡성조씨 등이 살았던 오랜 마을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시대별로 각각 다른 유형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진성이씨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유림 안에서도 가풍이 엄격한 집안이다. 조선말기 국권이 바닥으로 향할 때 유림에서 시작한 의병운동의 맨 앞에 섰다. 특히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시행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이 안동 예안에서 전국 최초로 거병했다. 첫 통문(禮安通文)이 돌았던 예안에서 부포마을이 중심을 잡았다.


단발령이 안동에 도착한 것은 1896년 1월 11일이고 예안통문이 1월 13일에 돌았으니 겨우 이틀 만에 즉각 반발했다. 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왜인들이 임진왜란 때 성종과 중종의 왕릉을 파헤친 야만성과 을미사변에서 국모를 시해한 방자함을 보아 장차 왕위까지 맘대로 흔들 것’임을 경고했다. 그리고 ‘단발령이란 일본의 강압에 절대 고개 숙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은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持父母)라는 유교 예법에 반하는 것이기에 유림은 거세게 반발했다. 비록 고종이 칙령을 발송했다지만 일본과 친일 세력의 압박 때문이라고 여겼다. 예안의병을 이끈 의병장은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이중린, 이인화, 이찬화로 이어졌는데 모두 진성이씨 가문이다.


을미의병을 해산한 후의 계몽운동은 진성이씨 호동파의 종손 이규락(李圭洛 1850~1929)이 앞장섰다. 이효정의 증조부로 한성에 올라와 있던 영남의 유림들과 뜻을 모아 충의사(忠義社)를 만들었다. 충의사는 1904년 8월에 창립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한일의정서 반대’, ‘황무지개척 요구 반대’, ‘일진회 반대’를 내걸고 항일했다.


이규락의 아들 이동걸(李東杰)과 이동하(李東廈 1875~1959)도 경성과 대구에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를 만들어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동참했다. 이동걸은 이효정의 조부고 이동하는 종조부가 된다. 이동하는 1908년 3월 15일 교남교육회를 기반으로 만든 대구협성학교(協成學校)의 교감을 맡다가 진성이씨 문중이 안동에 세운 보문의숙(寶文義塾)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참여(1909년)하면서 계몽운동에 머물지 않고 비밀항일결사 신민회(新民會)와 서간도 무장독립투쟁으로 노선을 확장했다. 그래서 안동 유림이 대규모로 만주에 이주할 때 적극 동참한다.


이동걸과 이동하의 손아래 동생인 이경식(李京植 1895~1945)은 비밀결사 암살단을 주도했다. 1927년 10월 장진홍(張鎭弘), 이원록(李源祿 이육사) 등과 함께 경북도청과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 등 일제 통치기구 건물을 차례로 폭발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10월 18일 오전에 목표 지점에 폭탄을 배달시켜 은행원과 일경 등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고 유리창 70여 장을 완전히 부쉈다. 그 결과 이경식은 1928년 1월 6일 체포돼 1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의병에서 민족계몽운동 그리고 만주독립군과 비밀결사운동으로 이어진 집안의 독립운동은 마지막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으로 전개됐다. 이동하의 큰아들 이병린은 간도에서 사회주의자로 무장독립운동을 펼치다 옥사했고 둘째 아들 이병기(李丙驥 1906~1950)는 적색노조(赤色勞組)를 중심으로 항일을 했다. 그리고 이경식의 딸 이병희(李秉熙 1918~2012), 이동걸의 손녀 이효정이 있다.


일제강점기 안동지역 유림에서 사회주의 계열 항일·독립운동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효정의 집안 어른인 저항시인 이육사, 조선노동공제회에 참가하고 신간회(新幹會) 안동지회장을 맡은 류인식, 노동총동맹과 화요회(火曜會)의 핵심이었던 권오설, 경성트로이카에 속해 조선공산당 재건에 앞장 선 권오직 형제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유교와 사회주의가 사상의 측면에서 간극이 매우 넓게 느껴짐에도 항일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에서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효정의 출생과 어린 시절


이효정의 아버지 이병룡은 폐병을 앓아 몸이 약했다고 한다. 봉화의 외갓집에서 태어난 것도 그런 이유로 짐작된다. 이효정이 한 살 때 생을 마감한 아버지 대신 조부 이동걸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그리고 어린 시절 집안의 어른들을 따라서 만주로 옮겨갔다. 만주의 독립운동사, 특히 서간도에서 안동 사람들이 가지는 역사적 위상은 절대적인데 부포마을 사람들을 빼놓을 수 없다. 주도한 이가 종조부 이동하다. 둘째 아들을 가장 많이 아꼈던 증조부 이규락은 고향에 남는 대신 집과 토지를 팔아 망명자금으로 쓰도록 했다.


초기 만주의 독립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었다. 첫째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먹고살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동하도 가족 중 큰아들 이병린만 데리고 만주에 갔을 때 여러 곳을 떠돌았다. 첫 도착지는 안동 출신 김대락이 한인촌을 만들고 정착한 환인현(桓仁縣)이다. 고구려의 첫 도읍이었던 졸본성(卒本城)이 있던 곳이라 의미가 깊은 땅이었다.


이동하는 이곳에서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東昌學校)의 교장을 맡아 한동안 머문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일본군이 조선인들을 쫓아 올 것이 두려워 심하게 배척했다. 일본의 첩자라거나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관청에 불법신분이라고 신고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동하와 일행들은 남만주(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 三源堡 鄒家街)로 향했다. 그곳은 1909년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가 만주에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보냈던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장유순 등이 정착한 곳이다. 그들은 1911년 봄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만들었다.


만주의 독립운동의 두 번째 방향은 독립투사를 양성할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조직해 독립전쟁을 펼치는 것이다. 이동하의 주된 활동도 고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인재를 길러내는 데 있었다. 환인현을 떠나 도착한 삼원보에 있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의 교사를 맡았다. 그리고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尼河)에 신흥중학교로 확장 개교할 때 같이 옮겨갔다. 신흥중학교는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바뀌는데 서간도로 넘어온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지청천(池靑天), 윈난(雲南)사관학교 출신 이범석(李範奭) 등이 교관으로 합류한다.


이효정은 할아버지와 집안 식구들과 함께 6~7살 무렵 이동하가 있는 만주로 갔고 약 3년 정도 머물다 서울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효정 가족은 만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학교도 다녔지만 꼬박 개근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살림은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가 독립운동가들의 의복을 만들며 꾸렸다고 한다.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이들끼리 서로 연락하고 물건을 전달하는 일도 맡았는데 이 활동은 상해임시정부가 국내에 조직한 비밀 연락망 연통제(聯通制)와 관련 있다. 이동하가 함경도 회령에 회령독판부(會寧督辦府)를 설치한 사건으로 옥고를 당한 것도 연통제를 통해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된 것이다. 그리고 육혈포(권총)를 들고 만주 일대를 점령한 일본군 경찰서 앞을 지나다닐 정도로 담이 컸던 당숙 이병린은 홍범도(洪範圖) 부대를 따라 러시아로 넘어갔다.


서울에 도착한 이효정은 어머니 권중숙의 친정 안동권씨 집에 내려갔지만 조부 이동걸이 신식 학교에 보내자고 불러 12살에 다시 되돌아왔다. 보통학교 입학시험에 며칠 늦게 갔으나 보결로 합격했다. 이효정은 조부와 함께 등교했는데 유림의 꼿꼿한 선비가 신식학교에 손녀를 입학시켜 매우 놀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생 이동하 등과 함께 교남교육회 활동을 했던 이동걸의 이력을 보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선택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청산리대첩 후 독립군 기념촬영. 이중 다수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출처: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신흥무관학교. 청산리대첩 후 독립군 기념촬영. 이중 다수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출처: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략)


이순(耳順)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개화를 하신 걸까 노망을 하신 걸까


댕기머리 치렁한 처자 꼴 나는 손녀 앞세우고


신식학교 입학 시키려 가셨다네


한 달 동안이나 학교에 데리고 다니시던 할아버지


손수 도시락 갖다주시고


갓 쓰고 두루막 입으신 단정한 모습


가끔 교실에 와 지켜보시던 할아버지


(중략)


삼학년 여름방학 그 여름


고향에 다녀와서 묵화를 시작할테니


붓으로 동그라미 연습을 하라시던


그 약속 잊으신 채


영영 안 돌아오신 할아버지


여행용 가방 속에서 찾아낸


붓 두 자루 먹 한 개가


어린 가슴에 빼지 못할 못을 박았다네


이효정(1989) 시집 <회상(回想)> 중 ‘회상(回想) 1-할아버지’



그런 조부가 초등과정을 다 마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고향 예안에 다녀와 수묵화를 가르쳐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자신을 응원해주던 조부가 떠난 것이 슬펐지만, 증조부 이규락이 집안 형편을 들며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라고 말해 더 절망했다.


이효정은 보통학교 시절 한 반 90명 중 10등 안에 들 만큼 총명했다. 문학수업을 좋아했고 붓글씨도 잘 썼다.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을 때도 명필이 되겠다고 답했다 한다. 또 매일 한 장씩 서예 글씨를 썼고 동요와 동시를 자주 짓기도 했다. 이런 붓글씨 솜씨는 고등보통학교까지 이어져서 1929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전조선학생작품전’ 습자 부문에서 3위를 수상할 정도였다. 이효정의 담임이었던 일본인 여교사는 상급학교에 합격했지만 돈 때문에 포기한다는 집안 사정을 듣고 학비를 대신 내줄 만큼 이효정을 아꼈다.



동아일보. 1929년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3등을 한 이효정
동아일보. 1929년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3등을 한 이효정


다행스럽게도 종조부 이동하가 만주에서 옥고를 겪은 뒤 돌아와 상황이 바뀐다. 이동하는 이효정의 상급학교 진학을 적극 찬성했으며 이규락를 설득한다. 이규락도 둘째 아들 말은 거절 못 했다고 한다. ‘여자도 학교에 보내야 한다. 안 보내면 효정이는 너무 아깝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 있는데 혼자 된 딸이니 더욱 가르쳐야 한다.’는 설득이 통했다. 결국 증조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져 이효정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同德女子高等普通學校)에 무사히 입학한다.


배문석 시민기자, 울산노동역사관1987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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