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도 감수성이 필요하다
역사에도 감수성이 필요하다
  •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 승인 2019.01.09 17: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억과 기록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답사 후기

“한국사람? 일본사람? 쉿! 일본말 같은데..?”

“아니야, 한국말이잖아. 한국 사람들이네.”

일본 관광객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그들의 대화를 마치 일본어처럼 들리게 한 걸까. 함께 답사를 간 사람들과 귀를 기울여 한 무리 사람들의 말소리를 엿듣는다. 커다란 카메라 앞에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예쁜 포즈를 잡고 있다. 햇살을 받으며 창가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일본풍의 오래된 건물과 어우러져 화보 촬영장 같다.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80~90년 전 일본식 여관 또는 유곽이었을 건물을 빠져나와 걸음을 옮기니 긴 칼을 찬 사무라이를 만난다. 칼을 뽑아 드는 포즈를 하고 멋진 포즈를 취해보는 남자. “됐어? 찍었어?”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이 나온다. “감수성이 참 다르다, 그쵸? 비석에 시멘트를 부었던 사람들과.” ‘역사와... 감수성?’ 인터넷 유머게시판에서 볼 수 있는 ‘같은 옷 다른 느낌’처럼 같은 장소를 전혀 다르게 느끼는 사람들. 같은 장소, 다른 느낌. 역사와 감수성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를 연결 짓게 된 답사였다.

기억과 기록 모임의 두 번째 답사장소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였다. 과매기가 제철을 맞은 구룡포항은 관강객들로 북적였다. 거리를 들어서면 만나는 긴 계단에는 양 옆으로 120개나 되는 비석들이 줄지어 세워져있다. 1944년 일본인들이 조성한 이 비석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 구룡포 이주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떠나자, 구룡포 주민들은 비석에 시멘트를 발라 거꾸로 돌려 세웠다. 그리고 1960년,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할 충혼각을 세우는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을 다시 새겼다. 시멘트를 부어버린 더 큰 비석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게 된다.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거대한 규화목 비석은 시멘트가 덧발라져 비문이 지워진 채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다. 그 위쪽으로 비문이 지워진 흔적이 있는 구조물이 또 있다. 일제시기 쓰여진 ‘제국재향군인회’라는 명문을 지우고 ‘대한군인유족회’라고 다시 새겨 충혼탑으로 사용되었던 기단이다. “재활용이 테마인가 봅니다.” 아이러니한 역사적 장소 덕에 웃음이 터진다. 일본인들의 흔적을 다 지워버리고 싶었던 구룡포 주민들과 일본식 가옥 앞에서 일본식 의상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는 관광객들은 전혀 다른 감수성으로 이 장소를 공유하고 있다.

“여기가 어딘 것 같아요?” “교토 같아요.” 구룡포 근대역사관 1층. 일본인들의 인터뷰 장면을 시작으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소개하는 영상이 상영된다. 지도와 함께 한국어와 일본어로 쓰여진 안내문의 제목은 ‘구룡포 엘도라도’.(*엘도라도, El Dorado: 16세기 에스파냐 사람들이 남아메리카 아마존강 가에 있다고 상상한 황금의 나라. 이상향) ‘가가와현의 가난한 어부들의 조선출어는 1880년~1884년경에 시작되었다. (중략)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어민들은 본격적으로 조선해에서 고기를 잡았다. 구룡포의 풍부한 어자원은 일본 어부들의 꿈을 이루어주었다. 황금빛 엘도라도 구룡포는 가난한 일본인 어부들에게 새 시대, 새 삶을 열어 주었다.’ 구룡포에 이주했던 일본인 어부들에게는 이상향, 엘도라도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이주는 구룡포 주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던가. 이 거리를 조성하고 역사관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의 감정에 공감했던 걸까.

역사를 마주할 때, 감수성이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과거는 과거를 불러내는 이가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어떤 이의 감정에 공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재현된다.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와 꼭 닮은 장소가 울산에도 있다. 구룡포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는 방어진항. 적산가옥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리를 재생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곳에서 나는 과거 어떤 사람들과 공감하게 될까 걱정 반 기대 반이다.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