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중심 낙양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1-09 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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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나는 한 번 목욕하는 데 머리카락을 세 번 움켜쥐고 한 번 식사하는 데 세 번을 뱉어가면서 선비를 맞이하면서도 오히려 천하의 현인을 잃을까 걱정했다.”(주공 단이 자신의 아들 백금을 봉지인 노 땅으로 보내며 훈계한 말)


장안과 낙양은 고대사회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수도이다. 낙양은 오랜 세월 장안과 짝을 이뤄 ‘13왕조의 수도’의 지위를 누렸기에 ‘서도’(장안)와 함께 ‘동도’(낙양)로 부르기도 했다. 장안은 중국 최초로 국가의 형태를 갖춘 주(B.C 1111~B.C 771)의 수도였고,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B.C 221~B.C 206)의 도읍이었으며, 한나라(서한 B.C 206~A.D 8)와 수나라(581~618), 당나라(618~907) 등 대제국의 도읍이었다.


낙양은 주나라 초기에 중원 땅을 다스리기 위한 전진기지로서 성왕 때 처음 건설한 도읍으로 ‘낙읍’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주 왕조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상나라(은 왕조)의 유민들과 주변 이민족의 준동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여러 제후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부도의 건설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낙양은 회하유역으로 남하할 때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낙양을 기점으로 은 왕조의 옛 영지가 시작되었던 까닭에 낙양을 장악하면 곧 동쪽과 남쪽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주공은 소공석으로 하여금 낙읍의 건설을 감독케 하였다.




주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기원전 770년 평왕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한나라도 장안에 도읍하고 있다가 왕망의 신나라(8~23)에 멸망당한 뒤 다시 광무제가 후한(25~220)을 세우고 도읍을 낙양으로 옮겨 명맥을 이어간다. 그 뒤로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220~265), 사마씨의 서진(265~317), 남북조 시대의 북위(386~534), 오대의 후량(907~923), 후당(923~936), 후진(936~946)을 거쳐 다시 중국의 통일 왕조였던 북송(960~1127) 때 서경으로, 여진족의 금나라(1115~1234) 시절에는 중경으로 정해지는 등 긴 역사를 통해 언제나 중원의 중심지였다.


약 3000년 전, 주나라 제2대 왕인 성왕의 명령에 따라 이곳 낙양에 도읍을 건설하고 ‘구정’을 안치한 주공은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러 오는 거리가 모두 같습니다.” 구정이란 왕권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솥을 말한다. 마치 로마의 ‘파스케스’와 같은 것이다. 파스케스란 고대 로마에서 공권력의 상징으로 자작나무 막대기 다발에 청동 도끼를 끼운 모양이었다. 공화제 시절에 집정관은 12개, 황제들은 24개씩 지니고 다녔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 하나라를 세운 대우가 천하를 구주로 나눈 뒤 구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공은 공자가 평생 흠모하여 롤모델로 삼았던 인물이다.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직후 불과 2년 후에 병사한다. 그런데 무왕의 동생이었던 주공은 왕위를 계승한 어린 성왕을 충실히 보좌하며 ‘주나라 예악제도’를 정립했다. 주나라의 예악제도를 훗날 공자가 예악사상으로 발전시켜 수천 년간 중국의 정신문명을 지배하게 된다. 주공이 말하기를 “천자는 말 여섯 필이 끄는 마차를 탄다”고 했다. ‘주공사당’, ‘왕성광장’, ‘천자가육박물관’에 가면 주공의 동상과 거마갱에서 중원문명의 산실이었던 주나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낙양에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지가 총 여섯 곳이 있다. ‘한.위 뤄양고성 유적지’, ‘수.당 정정문 유적지’, ‘신안현 함곡관 유적지’, ‘용문석굴’, ‘회락창과 함가창 유적지’다. 한.위 뤄양고성은 후한과 북위를 비롯한 4왕조의 도읍이었고 실크로드 문명교류의 중심이었다. 신안현 함곡관은 시안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항우와 유방에게 초나라 회왕이 “제일 먼저 함곡관에 들어가 관중을 함락시키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언약했던 약속의 땅이다. 한.위 뤄양고성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수.당 뤄양성 정정문 유적지는 주공이 구정을 안치했던 곳이다. 상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킨 후 구정은 상나라로 옮겨졌고,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린 뒤 구정은 주나라로 옮겨졌다. 구정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진나라 진시황의 증조할아버지인 소양왕은 훗날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수 있도록 진나라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었다. 소양왕 대에 이르러 진나라는 서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구정을 얻게 된다. 소양왕의 이복형인 무왕이 구정을 두 팔로 들어보다가 발이 깔리며 상처를 입고 사망한다. 천자가 되고 싶었던 소양왕은 주나라에서 구정을 옮겨가려 했지만 옮기는 과정에서 사수에 빠트려 잃고 말았다. 나중에 진시황이 잠수부 1000명을 동원해 사수 강바닥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이에 진시황은 ‘화씨벽’을 깎아 전국옥쇄를 만들어 구정의 대용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회락창과 함가창 유적지는 수 양제가 만든 식량 창고다. 각각 700개에서 400개에 이르며 큰 것은 1만 석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낙양이 13개 왕조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식량공급이 원활했던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수 양제가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오로지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완성한 ‘경항대운하’의 물길이 이곳 낙양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회락창은 수나라 때 낙양성 가까이 있어 그 창고에서 성내로 식량을 운반할 수 있었다. 회락창에는 당시 중국사람 모두를 20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의 양곡이 쌓여 있었다. 이 회락창을 둘러싸고 수나라 군사와 반란군인 밀군 사이의 싸움이 맹렬하게 전개된 적이 있었다. 반란군의 수장 이밀은 오로지 회락창 확보에만 집착한 나머지 수나라의 수도가 장안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틈에 태원(산서성 하동지역) 유수 이연이 갑자기 남하하여 장안을 급습하고 그곳에 당 왕조를 세운다.




수 양제는 동도 낙양을 새롭게 건설하였는데 이 동도의 건설을 위해 한 달에 200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하였다. 3000리에 걸친 항주와 북경을 잇는 운하 건설에도 100만 명 이상 동원했고, 동원된 백성들 중 4할이 굶주림과 중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한다. 백성들은 강제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내고 복수(행복한 손), 복족(행복한 발)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었다. 문명이 시작된 고대국가들이 이곳에 도읍을 정했고, 구정을 안치했으며,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예악제도가 낙양에서 비롯되었다. 낙양에서 가까운 곳에 소림사가 위치한 숭산이 있다. 숭산은 오악의 중심인 중악이다. 그래서 중국 역사에서는 장안을 가르켜 ‘서도’로 불렀고 낙양을 ‘동도’로 지칭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이곳에 도읍했던 13개 왕조의 흥망도 이곳 낙양에서 이루어졌다.


사마광은 ‘옛 낙양성을 지나며’라는 그의 시에서 “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거든 낙양성을 보시게나”라고 말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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