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보는 세상] 이 낡은 세계가 지겹다
[작가가 보는 세상] 이 낡은 세계가 지겹다
  • 이인호 시인
  • 승인 2017.11.01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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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었다. 하늘은 마침 맑았고, 둘째의 가을 운동회를 다녀왔고, 몸은 적당히 노곤한 저녁. 흔들 의자에 앉아 지지고 볶는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음악삼아 책 한권을 펼쳐 들었다. 내가 산 기억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아내가 산 책이 분명했다. 그렇게 펼친 책의 한 순간. ‘마침내 너는 이 낡은 세계가 지겹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변두리’의 첫구절이 머리를 확 때렸다.


그랬다. 어느 순간 나는 이 낡은 세계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집권자를 감옥에 보내며 스스로들에게 혁명이라고 칭했던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뀐지 육개월이 지났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세상은 혁명이라고 불리우기 민망할 정도로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많았다. 사드 재배치가 그랬고 신고리 5,6호기 문제는 공론화위원회라는 희안한 제도 앞에 대통령의 공약이 뒤집어지는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은 비단 정권을 잡은 사람들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일단은 내가 속한 한국작가회의가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놓고 내놓은 입장이 그랬다. 한국작가회의는 최근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발표했다. 결론을 옮겨 놓으자면 ‘작가회의는 회원들이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을 심사하거나 수상하는 데 대하여 특별한 조항을 만들어 강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 제정 및 운영과 관련되는 모든 사안이 작가회의의 전통 및 지향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은 웅숭깊게 성찰해야 한다. 따라서 작가회의는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과 관련된 심사, 수상 등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모든 회원들에게 권고한다.‘는 것이다.


정말 작가회의 답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친일문학인을 기리는 사업들이 한국작가회의 전통 및 지향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결론에서 성찰하고 참여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 사이에 벌어지는, 성명에서 밝힌 말 그대로 자신들의 양립할 수 없는 입장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작가회의는 회원들을 강제할 수 없음에 대해 ‘조직의 권위로써 구성원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착상은 그동안 작가회의가 줄기차게 맞서 싸워온 국가 폭력의 작동 방식과 유사한 바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냥 “이 상은 나쁜 사람을 기리는 상이야. 하지만 그 사람이 나쁘다고 그 사람을 기리는 상을 받고 말고는 니가 알아서 해. 대신 우리는 분명히 저 사람 나쁘다고 했다. 그러니 나중에 문제 생기면 우리한테 이러쿵 저러쿵 따지지 마”라는 말을 저토록 유려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래서 대전작가회의는 당장 친일문학상을 받거나 심사하는 회원에 대해 회원자격 박탈 등 확실한 제재를 취할 것이라며 본회와는 입장을 달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지난 정권 시절 예술가들을 옭아매는 블랙리스트가 문제가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런 리스트를 만들어서 관리를 했다는 것이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혼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회원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이 국가폭력의 작동방식과 유사하다고 한다. 친일문학인을 기리는 사업들이 한국작가회의에 속한 작가들의 어떤 자유로운 창작혼을 억압하는 지 알 수 없다. 없는 밥상에 반찬이 자꾸 줄어들기 때문이라면 다른 깨끗한 재료로 반찬을 만들면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낡은 밥상은 걷어차고 다시 상을 차리면 된다. 그리고 그동안 상을 받은 사람들도 나서서 미안하다고 하면 될 일이다. 그게 이 지겨운 낡은 세계를 떠나보내는 길이다. 당신들은 이 낡은 세계가 정말 지겹지도 않냐?


이인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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