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보는 세상] 미완성품 도자기
[작가가 보는 세상] 미완성품 도자기
  • 조숙향 시인
  • 승인 2017.11.0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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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거실 장식장 위에는 겨우 초벌구이만 거치고 나온 황토색 도자기 하나가 있다. 주둥이가 좁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호리병 모양이다. 앞면은 코뚜레를 낀 늙은 황소가 그려져 있다. 등 위엔 밀짚모자를 쓰고 한복 옷소매를 걷어 올린 농부가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듯 피리를 불고 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림의 도자기이다.


가끔 우리 집을 방문하는 지인들은 이 보잘 것 없는 도자기를 애지중지하는 내 모습에 의아해 한다. 그리고 특별한 사연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 도자기는 나와 관련된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 어느 초겨울, 낚시를 즐기는 남편을 따라 경주 근처에 있는 영지못으로 따라 간 적이 있다. 이 도자기는 영지못 주위에 있는 야산에서 주워 온 것이다.


남편은 낚시에 몰입하며 차츰차츰 말수가 잦아들었다. 일렁이던 물결조차 깊은 잠에 빠진 듯 잠잠해진 수면 위로 산 그림자와 햇빛만 반짝였다. 바람 한 점 없는 한낮의 무료함이 점점 나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에 있는 야산을 걷기 시작했다. 겨울 가뭄으로 산은 건조할 대로 건조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서지는 가랑잎 소리가 나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산자락을 돌아서다가 허물어진 옹기가마를 발견했다. 폐허가 된 옹기가마 옆에는 유약을 반쯤 칠하다만 도자기, 초벌구이만 거친 도자기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깨진 도자기들이 파편 무덤처럼 버티고 있었다. 이곳을 지켰던 도공은 도자기를 정성껏 완성은 했지만 무엇인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무심코 그 잔해들을 들여다보다가 아련해진 기억 하나를 들추어냈다.


나에게는 옹기장이 딸인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우리 동네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산자락에 작은 옹기점이 있었다. 그곳에는 나와 동갑인 영옥이가 털이 많고 키가 작은 아버지와 다리를 약간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영옥이 아버지를 털보 황 씨라고 불렀다. 털보 황 씨는 가끔 마을로 내려오곤 했다. 농주 병을 손에 들고 거나하게 술이 오르면 구성지게 노래를 잘도 불러 젖혔다.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얼굴에 덥수룩한 털만큼 그의 행색도 단정치 못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꺼리지 않았다.


아이들도 자주 그의 옹기점으로 자주 몰려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옛날에 말이야 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노상 하던 이야기는 심청전이나 별주부전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지치도록 그가 했던 얘기를 듣고 또 들었지만 심심하면 늘상 그를 찾아가곤 하였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었던 그 시절, 그는 마을 아이들에게 더할 수 없는 재미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엔가 우연히 내가 본 그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이글거리는 가마 앞에 쭈그리고 앉아 벌겋게 타오르던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던 털보 황 씨.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숨죽이고 바라보다가 나는 아주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그의 생애 전 힘을 모아 부은 숭고한 엄숙, 그것이었다. 영지못 근처 누군가 온기를 불어넣던 폐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또 다른 털보 황 씨의 모습을 그곳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도자기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도자기가 아니다. 도자기가 되지 못한 그냥 토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름 모를 도공은 그의 혼신을 기울여 진흙을 이기고 성형을 빚어 정성어린 마음을 여기에 그려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글거리는 불꽃 너머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열정을 불태웠으리라. 비록 완성된 명품은 되지 못했으나 나는 이 도자기를 바라보며 내 삶의 불꽃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엄숙한 눈으로 그것을 응시하고 싶다.


조숙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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