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풀로 역사] 꽃을 이고 진 남정네들
[내풀로 역사] 꽃을 이고 진 남정네들
  • 윤지현 전문 기록인
  • 승인 2017.11.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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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풀로역사그림1

<악학궤범>에 그려진 처용탈


내풀로역사그림2

<원행을묘의궤>에 그려진 준화


얼마 전 지하철역에서 멋진 청년을 발견했다. 내 앞 시야를 모두 가릴 정도로 훤칠한 그 청년은 시크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한껏 차려입었는데 나의 시선을 고정시킨 곳은 다름 아닌 그 자의 가방. 한 송이 붉은 장미가 커다랗게 수놓인 까만 배낭은 늦은 밤 지친 나의 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흐흐. 꽃을 진 남자다. 꽃을 들고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남성세대는 이제 역사 속으로? 꽃은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먹은 것을 오롯이 성장에 쓰는 유아기를 생각해보라. 남아 여아 구분 없이 오감을 열어 꽃을 탐하지 않는가. 꽃을 보고 달려드는 것은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성이지 않을까?


“이번 행사의 꽃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일을 할 때, 꽃이 가진 의미는 가장 돋보이는 가장 중심된 무언가를 상징한다. 오늘날 꽃은 있으면 좋은 장식적 기능으로 전락하였지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역사에서 꽃은 그 자체가 독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멀리 가지 않고 우리주변에서 찾아볼까? 울산사람이라면 처용탈을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다른 전통탈과 달리 유난히 크고 머리장식이 화려하다. 그 중심에는 꽃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일도 보인다(목단화, 복숭아, 복숭아 나뭇가지로 장식). 요즘 눈으로 생각하면, 머리에 꽃을 얹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과일까지? 실제 과일을 얹었다기보단 모형을 만들었겠지만, 생각해보라. 지금 누가 머리에 복숭아를 얹고 춤을 추겠는가!


한편 조선시대 각종 의식행사의 지침서인 <의궤>엔 당시 행사의 절차와 의식에 쓰인 물품목록(그림 포함)이 잘 정리되어 있다. 축하연일 경우 주빈에게 꽃을 바치는 의식이 있는데 이건 오늘날 꽃다발 증정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의식의 첫머리에서 술을 올리기 전에 하나의 독립된 절차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행사를 준비하는 데 가장 많은 인원과 시간이 투입되는 것도 종이꽃을 만드는 과정이다. 주빈석의 좌우엔 항아리 수준의 화병(준화樽花)을 두고 음식상에는 상화床花를, 기둥장식엔 화가花架를, 수많은 무희들과 참석자의 머리장식에 꽃을 사용한다. 사용한 꽃의 종류와 수에 따라 행사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준화는 약 3미터정도 높이로 상상이상 거대한 규모이다. 여기에는 꽃(복숭아꽃)뿐만 아니라 10여종의 새(꾀꼬리, 종아리, 박새 등 몸집이 작지만 울대가 발달한 명금류와 장끼 까투리, 공작 등)와 곤충(잠자리, 나비)도 등장한다.


이쯤 되면 꽃이 단순한 장식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스런 의식의 최대의 공경의 표시로 바쳐지는 꽃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꽃이 크고 화려한 목단화는 부귀영화를, 선경과 낙원을 상징하는 복숭아는 불로불사의 의미 내지 공간을 낙원으로 꾸미고자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국화는 서리를 견디며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아 길상의 징조로 받아들여지며 차로 마시면 장수하는 장수화로서 주로 환갑연, 진갑연 등에 많이 쓰였다. 한편 포도꽃, 유자꽃, 복분자꽃, 가지꽃, 오이꽃 등 열매가 달리는 꽃들은 결실의 의미로서 자손번성, 부귀영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꽃을 그리 반기지 않는 나이가 있었다. 순간의 기쁨을 위하여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이 너무 아깝기도 하고, 시들어 버리자니 쓰레기봉투가 아깝기도 하고...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경제적 논리에 매몰된 것이다. 지금도 꽃을 좋아하는 어미를 위해 꽃을 사가면 얼마 줬냐가 먼저 나오는 말이다. 그럼에도 축하받을 행사에 꽃다발 하나 받지 못한다면 왠지 서운한 게 사람의 마음이지 않을까? 사진에 남기기 위함이 아닌, 헌화의 의미를 새기며 주고받는다면 그 가치가 더해지지 않을까한다.


참고자료: ‘조선시대 궁중 연향에 장식된 채화에 관한 연구’(김혜자, 2008, 한국꽃예술학회지 134); <한국문화상징사전>(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2006, 두산동아); ‘한국화예사료의 분석과 전통 꽃꽂이 양식의 확인’(한상숙, 2015, 서울시립대박사)


윤지현 전문 기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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